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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이목 Oct 18. 2024

다시는 마귀의 꾐에 넘어가지 않도록(1)

소설

 남우는 어느때보다 급하게 차를 몰았다. 에녹의 개인전이 열리는 선오름 갤러리로 향하는 길이었다. 조금 전에도 남우의 오른발이 가속페달을 강하게 밟았다. 오픈 행사 시간에 늦었다기엔 이대로라면 1시간이나 여유가 있었다.

 갤러리 주차장에 들어선 남우는 고개를 두어번 좌우로 젓다 금세 에녹의 하얀 SUV 차량을 발견했다. 갤러리가 문을 열기 전이라 관람객이 없었기에 쉬운 일이었다.

 바로 옆자리에 주차를 마친 남우는 곧장 내려 에녹의 차 조수석의 손잡이를 당겼다. 하지만 문이 잠겨있던 탓에 손잡이의 달칵거리는 소음만 확인할 수 있었다. 그 소리에 핸들을 잡은 손에 머리를 기대고 있던 에녹이 고개를 들었다. 얼굴엔 무언가 체념한 듯 건조한 감정이 담겨있었다.

 남우를 보고도 에녹은 한숨을 크게 쉰 후에야 문을 열어주었다.


 “전시회에 참석하지 않겠다니. 에녹아. 진심이야?” 남우는 조수석에 완전히 착석하기도 전에 질문을 쏟아냈다. “네 첫 개인전이잖아. 대체 왜? 무엇 때문에 그래?”


 총알처럼 날아오는 질문에도 에녹은 대답이 없었다. 그저 텅 빈 동공으로 차창 밖 너머 어딘가를 응시할 뿐이었다.

 마침 그곳엔 에녹의 개인전을 안내하는 현수막이 걸려있었고, 이를 포착한 남우는 한 번 더 희망을 걸어보기로 했다.


 “안정은 됐어? 지금은 좀 괜찮은 거지?”

 “.......”

 “혹시 내가 말한 그 평론 때문인 거야? 설마...... 아니지?”

 “맞아.”


 드디어 듣게 된 에녹의 첫 대답에 남우는 맥이 탁 풀렸다. 가족 다음으로 에녹의 옆을 가장 오래 지켜온 이는 자신이라고 단언할 수 있었다. 그래서일까. 마치 예상했던 대답을 들은 사람처럼 남우는 당황하지 않았다.

 오랜 기간 미술계에 몸을 담고 있었지만, 에녹은 평가에 유독 취약한 편이었다. 대체로 긍정적인 평가가 주를 이뤘음에도 단 하나의 비판에 몇 날 며칠을 화실에 처박히기 일쑤였다. 물론 이런 완벽주의적 성향이 지금 저명한 서양 화가 김에녹을 만들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번엔 경우가 조금 달랐다. 미술에 대해 무지한 평론가가, 게다가 전시를 보지도 않은 채로 써 내려간 평론에도 흔들리기엔 에녹이 그동안 쌓아온 탄탄한 경력이 아까울 정도였다.

 남우는 유사한 사건이 있을 적마다 에녹의 연인이자 지원자의 역할을 충분히 해내 왔다. 판단하건대 이 사례는 대체로 가벼운 축에 속했다. 고로 남우는 오늘도 제 역할을 충실히 해낼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에녹은 여전히 핸들을 양손으로 꼭 쥐고 있었다. 남우는 에녹의 오른손을 조심스럽게 떼어내 제 허벅지 위로 가져왔다. 겨울 바닷물에 담근 듯 피부가 차가웠다. 이를 녹이고도 남을 만큼 다정한 목소리로 남우가 말했다.


 “에녹아. 이번 전시는 전과 차원이 달라. 네가 얼마나 고생했는지 그 과정은 바로 옆에서 지켜본 내가 너만큼이나 잘 알잖아.”


 남우는 에녹의 손가락 하나하나를 애틋하게 매만졌다. 마디 곳곳 박혀있는 굳은살이 조금 전 남우의 말에 힘을 실었다. 에녹의 손을 끌어 제 볼에도 대보았지만, 조금의 저항도 느낄 수 없다. 긍정적인 신호로 봐도 되는 걸까.


 “그런 내 눈이 네 작품을 완벽하다고 느끼는데 아무리 평론가라지만 처음 보는, 아니지. 아직 전시를 보지도 않고 지껄이는 그런 것 따위에 휘둘리면 오히려 내가 더 섭섭한걸.”


 남우는 신랄한 비난을 애교 있는 목소리로 중화시키며 개인적인 투정도 섞어보았다. 이럴 때면 에녹은 제 감정 속에 가라앉아 있다가도 피식 웃음을 터트리며 수면 위로 올라오곤 했다.


 “내 눈이 그렇지가 않아.” 문제는 매번 이 방법이 통하지는 않는다는 것이었다. “오빠나 그 평론가의...... 시선이 어떻든 내겐 당장 저기 걸려있는 그림들이 전부 쓰레기처럼 느껴져.”


 핸들에 남아있던 왼손의 검지가 곧게 뻗었다.

 떨리는 에녹의 손끝을 따라 남우의 시선도 갤러리로 향했다. 자신이 인정하는 최고의 서양화가 김에녹의 첫 개인전이 열리는 곳. 그리고 그런 에녹과의 결혼 발표가 이루어질 곳. 볕을 온몸으로 받은 갤러리는 명암이 선명하게 어우러져 더욱 견고해 보였다. 남우가 꿈꿔온 두 사람의 앞날을 가시화한다면 저런 모습이리라.


 “아니, 아니라니까. 에녹아. 내 말 믿어.”

 “.......”

 “내가 실수로 얘기한 건 미안해...... 미안한데. 이건 아니잖아. 네 개인전을 고대한 건 너뿐만이 아니야. 그리고.......”


 우리 결혼 발표는. 점점 흥분에 쌓여 말을 뱉어내던 남우는 급히 입을 다물었다. 어떻게 인내한 시간인데 아직 시작도 못 한 마당에 에녹의 마음이 또 한 번 밀려나게 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애가 타는 마음 또한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종교적 이유와 커리어 문제로 오랜 기간 만나왔음에도 에녹의 전부를 가지지 못했다. 에녹은 여전히 남우의 기억 속 젊은 날의 첫사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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