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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이목 Oct 21. 2024

다시는 마귀의 꾐에 넘어가지 않도록(2)

소설

 새벽 4시. 컴컴한 서재를 밝혀주는 것이라곤 노트북 화면에서 새어 나오는 불빛뿐이었다. 그마저도 에녹의 실루엣에 가려 희뿌연 빛은 일정한 형태도 띠지 못한 채 제멋대로 산란했다.

 이는 며칠 동안 불안에 휩싸여 전전긍긍하는 에녹의 마음과도 닮아있었다. 제 개인전 행사에 불참한 후 에녹은 집에 틀어박혀 단 한 발짝도 나가지 않았다.

 노트북 옆에 놓아둔 휴대전화에 진동이 일며 화면이 밝아졌다. 에녹은 눈동자만 굴려 휴대전화를 확인했다.


 -에녹아. 화실에 있던 것 아니었어?

 -대체 어디야?

 -집인 거야? 며칠째 계속?

 -오늘 주일인 건 잊지 않았지?


 남우에게서 메시지가 연달아 도착했다. 익히 남우에게 상황을 전달받은 에녹의 부모를 포함, 세 사람은 이번 평론 일로 에녹이 또 한 번 화실에 틀어박혀 그림을 몇 점이고 그리고 있을 거라 여겼다. 에녹의 개인 화실은 더 이상 어린 시절의 창고가 아니었다. 뒤뜰을 벗어나 외지에 자리한 그곳은 이제 부모라도 쉽게 드나들지 못했다.

 그 때문에 세 사람은 개인전이 성공적으로 진행 중이라는 소식을 알려주어도 시큰둥한 에녹의 반응을 보며 연락도 최소한으로 주고받던 중이었다. 그러다 너무 걱정된 나머지 남우가 비밀리에 에녹의 화실에 들른 모양이었다.

 하지만 걱정이 가득 묻어나는 연인의 메시지에도 에녹은 별다른 답장 없이 그대로 휴대전화를 뒤집어 화면을 가렸다. 시선은 다시 노트북 화면에 고정됐다. 포털 사이트에 접속해 로그인을 마친 에녹은 마우스 커서를 메일함 위로 끌고 갔다. 몇 번이고 반복한 작업이지만 다리의 떨림은 매번 격렬해졌다. 반대 손의 엄지와 검지의 손톱이 마찰하는 소리가 고요한 어둠으로 녹아들었다.

 이번에도 새로이 도착한 메일은 없었다. 에녹은 이제 숨도 제대로 쉬지 못했다. 보낸 메일함을 확인했다. 그리고 붉게 뜬 ‘수신확인’이라는 글자에 결국 숨이 멎었다. 한동안 붉은 글자를 뚫어져라 바라보던 에녹은 흰자위가 같은 색으로 충혈되고 나서야 바르르 떨며 숨을 내쉬었다.


 “왜.......”


 왜 답장이 없는 거지. 에녹은 집에 고립되어 있던 며칠간 고심하고 또 고심한 끝에 평론가 주해수의 블로그에 적힌 이메일 주소로 어제저녁 이메일을 보냈다. 그리고 지금과 변함없는 자세로 밤이 새도록 메일함을 몇 번이고 들락거렸다.

 자신의 재능에 대한 부정이 극에 달한 이때 답장까지 받지 못한 에녹은 끝을 모르고 무기력해졌다. 더 이상 자신이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본래대로라면 부모와 남우의 예상대로 그림 연습에 매진하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이번엔 경우가 달랐다. 에녹은 평론가 주해수의 글을 다시 한번 읽어보았다. 조금도 덜어지지 않는 패배감. 되풀이하여 읽을수록 늪에 빠진 두 다리에 무거운 쇳덩이가 하나둘 추가되었다. 이대로 완전히 늪 속에 고립되어 다신 하늘을 볼 수 없을 것만 같았다.

 모든 희망을 잃어버린 에녹은 터덜터덜 발을 끌며 침실로 향했다. 며칠째 식사도 제대로 하지 않아 앙상해진 다리는 금방이라도 꺾일 듯 위태로웠다. 아직 꺼지지 않은 가로등 불빛이 어슴푸레 커튼 아래로 스며들었다.

 그리고 에녹의 눈앞에 십자가가 나타났다.

 주홍빛을 머금은 십자가는 모호한 명암을 드러내며 사뭇 근엄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기도실 입구는 분명 다섯 걸음이나 떨어져 있는 데도 에녹은 마치 문에 새겨진 십자가가 뚝 떨어져나와 제게 점점 다가오는 것만 같았다.


 오늘 주일인 건 잊지 않았지?


 남우의 메시지가 머릿속을 스쳤다. 동시에 부끄러운 마음이 정수리까지 치솟아 에녹의 속살을 덥혔다. 십자가를 앞에 둔 시선이 잘게 떨렸다. 분명 방법이 남아있었다. 사실 가장 먼저 찾았어야 했다.

 나의 주님.

 내 기도에 필히 응답하시는 나의 구원자시어.

 네 혼자만의 힘으로 길을 찾으라는 사탄의 꼬임에 넘어가 결국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했다. 요 며칠이 얼마나 지옥 같았던가. 하지만 이 어리석은 양을 주님은 끝내 버리지 않으셨다. 메시지를, 이미지를 통해 저를 일깨워 주셨노라.

 에녹은 급히 채비하고 집을 나섰다. 한적한 도로를 빠르게 내달려 도착한 곳은 녹림 교회였다. 새벽 예배가 시작되기 전이었기에 신도라곤 에녹뿐이었다.

 에녹은 빈 예배당에 자리를 잡고 앉아 고개를 숙였다. 회개가 시작되자 뜨거운 눈물이 두 뺨을 가르며 쉼 없이 떨어졌다. 회개. 회개. 그리고 감사. 기도는 마치 미리 준비된 것처럼 물 흐르듯 흘러나왔다.

 마지막으로 소망을 담은 기도가 입 밖으로 나오기 시작했을 즈음 예배당의 문이 열렸다. 하지만 무아지경에 빠진 에녹은 그 소리를 듣지 못했다.


 “제게 이 고난을 헤쳐 나갈 용기를 주시고.......”


 하나의 발소리는 점점 가까워졌다.


 “앞으로도 오로지 주님만을 바라며 주님의 품 안에서 평생도록.......”


 발소리가 가까이 멈춰 선 후에야 에녹은 상대의 기척을 눈치챘다. 하지만 으레 이 시간이면 신도들이 하나둘 도착할 법도 하여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육신은 썩어 사라지겠으나 영혼만은 주님과 함께 천국에 올라......”


 나무로 된 장의자의 삐걱거리는 소리가 에녹의 바로 등 뒤에서 들렸다.


 “다시는 마귀의 꾐에 넘어가지 않도록.......”

 “오랜만이야.”


 짧은 귓속말에 에녹의 눈이 번쩍 뜨였다. 척추 사이사이 모래가 낀 듯 고개가 힘겹게 돌아갔다. 15년 만에 보는 얼굴엔 여전히 표정이 없었다. 속을 알 수 없는 까만 눈동자도 그대로였다.


 “.......”

 “잘 지냈어?”


 안부 인사를 건네면서도 해수의 얼굴 근육은 어느 하나 호의적으로 움직이지 않았다. 에녹의 속내를 샅샅이 파헤치는 듯한 날카로운 시선은 이미 제 물음에 대한 답을 아는 것도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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