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서둘러 입을 막는 동작 때문에 해수는 도리어 자신이 그 비웃음의 근원지라 인정하는 꼴이 되고 말았다.
미술실 전원의 시선이 해수에게로 향했다. 에녹은 사과처럼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 위로 씨앗 같은 동공을 잘게 떨었다. 두 번이나 저를 기만한 해수에게만큼은 널뛰는 감정을 숨기고 싶었지만 비웃음의 저의에 대해 공격성이 발동해 고개가 돌아가지 않았다. 대체 뭐가 웃긴 거냐며 당장이라도 달려가 따져 묻고 싶었다.
“참. 3학년에 전학생이 있다고 전해 들었는데 내가 깜빡했네.”
마침, 삭막한 공기를 깨트린 미연 덕분에 에녹은 목에 걸려 당장이라도 튀어나오려던 말을 도로 삼킬 수 있었다. 남몰래 애꿎은 속살만 잘근잘근 씹어댔다.
“이름이 어떻게 되니?”
“...... 주해수입니다.”
“그래. 해수야. 미술부원이 된 걸 환영한다. 소개도 없이 생소한 발표만 계속 듣게 해서 미안하구나.”
미연은 발표 시간이 지루했던 해수가 딴생각을 하다 웃음이 터졌을 거라 잠정 결론 내린 뒤였다. 오늘 전학을 왔으니 친구들 개개인의 성향도 모를 테고, 그만큼 자신을 나타내는 그림 발표에 대해 감흥이 없을 법도 했다.
게다가 에녹의 발표에는 웃음이 터질만한 부분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에녹이 차례가 끝나면 다음으로 해수가 발표하도록 하자. 과제가 있는 건 몰랐겠지만 미술부에 지원했으니 그동안 그려온 그림 정도는 갖고 있겠지? 어떤 그림들을 그려왔는지 소개해 주면 좋을 것 같아.”
표정을 한껏 누그러트리며 웃어 보인 미연은 다시 에녹을 돌아보았다.
하지만 에녹은 남아있던 말이 전부 수치심에 먹혀버려 곧장 발표를 이어가지 못했다. 그러던 중 해수의 책상 위에 놓인 연습장을 발견했다. 일반적인 공책과 달리 커다란 스프링에 꿰어있는 두꺼운 연습장은 단순한 필기 용도로는 보이지 않았다. 저 안에 분명 주해수의 그림이 담겨 있으리라.
이제 에녹의 목표는 발표의 완벽한 마무리가 아니었다.
“저는 이제 그만해도 될 것 같은데...... 해수에게 차례를 넘기고 싶어요.” 에녹은 힘써 입매를 말아 올렸다. “저도 새 친구의 그림이 너무 궁금해서요.”
“그럴까? 그럼 에녹아, 수고했다.”
“감사합니다. 선생님.”
“자. 이제 해수가 앞으로 나와보자.”
그런데 에녹이 제 그림을 다시 말아 쥐는 동안에도 해수는 연습장의 표지만 매만질 뿐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접어 문 입술에서 머뭇거림이 느껴졌다.
에녹이 제자리에 착석할 때까지 망부석을 고수하던 해수는 또다시 저를 향한 수개의 낯에 못 이겨 결국 연습장을 들고 앞으로 나갔다.
“제 이름은 주해수고.......”
미술부원 누구와도 눈을 마주치지 않은 채 창밖만 바라보는 해수의 얼굴에서 약간의 체념이 묻어났다.
“저기 아래 강춘에서 왔습니다. 그리고...... 그림은 사실 배워본 적 없어요. 그냥 연습장에 혼자 끄적인 게 전부라 발표라기엔 거창한 것 같습니다.”
자신 없던 소개말과 달리 해수는 선뜻 연습장을 펼쳤다. 그림에 대해 덧붙이는 설명도 없었다. 그저 한장 한장 시간을 들여 연습장을 넘길 뿐이었다.
해수의 그림을 보던 미술부원들은 자신들도 모르게 점점 미간을 일그러트렸다. 일부 아이들의 입이 작게 벌어졌고, 다른 몇몇은 불편한 시선으로 미연을 흘긋거리며 공감을 구했다.
어느덧 절반 정도 사용한 연습장의 모든 그림이 소진되었을 때, 에녹의 머릿속은 경악에 휩싸인 채 몸부림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