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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이목 Nov 04. 2024

따뜻한 로즈메리 향(2)

소설

 “거기가 어디라고 찾아와?”


 해수와 오래 마주할수록 외피는 한 꺼풀, 한 꺼풀씩 탈락하여 결국 발가벗겨지게 될 것이라는 걸 에녹은 잘 알고 있었다. 따라서 거추장스러운 인사말 따윈 생략하고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하지만 해수는 에녹의 뜻을 따라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한껏 여유를 부리며 커피를 한 모금 마신 해수는 후에도 커피잔을 들여다보기만 할뿐 조용했다.

 커피 표면의 일렁임이 잦아들수록 에녹의 인내심은 반대로 극에 달했다.

 불같은 심정이 재차 불꽃을 튀기기 직전, “교회는 모든 어린 양들에게 열려있는 곳이라고 들었는데...... 아니었나봐?” 해수는 마치 그 지점을 알고 있는 사람처럼 때마침 답했다.

 그래도 비아냥거릴 목적은 아니었는지 격양된 에녹을 어루더듬듯 말을 이었다.


 “네가 메일을 보냈잖아. 그래서 내 나름대로 성의껏 답장을 한 거야.”


 하지만 해수의 변명은 에녹의 분노에 기름만 끼얹는 꼴이었다. 에녹은 한동안 담아 보지도, 담아 볼일도 없었던 큰 소리는 냈다.


 “헛소리 마! 날 곤란하게 만들려는 수작인 걸 내가 모를 것 같아? 뭐? 답장? 하, 기가 막혀서. 무슨 생각인지 바른대로 말해! 어서!”


 격양된 목소리가 카페 내부를 진동시켰다.

 놀란 직원이 계산대 밖으로 고개를 빼꼼 내비쳤다. 그러나 정작 목소리의 당사자는 감정을 절제 못 한 저 스스로에 놀라 주변을 살피고, 그 분노를 온몸으로 떠안은 상대방은 마치 아무것도 듣지 못했다는 양 커피를 들이켜는 기이한 광경을 보게 됐다. 두 사람 외엔 다른 손님도 없었거니와 다소 흥미까지 생긴 직원은 어깨만 으쓱할 뿐 제지하지 않았다.


 “사실 궁금했어.”


 해수의 낮고 차분한 목소리가 들썩거리던 주변의 공기를 다시 잠재웠다.

 그러나 에녹의 심정만은 공간 내에서 유일하게 이질적인 성질을 띠었다. 궁금하다니? 그 대상이 무엇일지 생각하는 에녹의 낯빛은 어두워졌다 붉어지기를 반복했다.


 “네가 메일로 그랬잖아. ‘네가 뭔데 나를 폄하해? 아직도 비웃을 게 남았어? 그동안 서로 연락 한번 한 적 없었잖아. 근데 왜 이제 와서 날 전부 아는 척하는 건데?’라고.”


 저가 보낸 메일의 일부를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음성으로 전달받은 에녹은 왜인지 낯간지러운 기분이 들었다. 그걸 달달 외우고 있다니 참 할 일도 없다며 괜히 해수를 비난하다가도 한편으론 이어질 말에 긴장이 곤두섰다.


 “내가 어떻게 하길 바라는 건지, 그게 궁금했어. 또 네가 오해한 부분도 있는 것 같아서 직접 만나 바로 잡아야지 싶기도 했고.”

 “.......”

 “그러니까 네 말은...... 평론을 호의적으로 써달라는 건가?”


 에녹의 얼굴이 단숨에 수치심에 휩싸였다. 붉으락푸르락한 감정은 날카로운 목소리에 여실히 드러났다.


 “뭐? 내가 네게 아부라도 하려 했다는 거야?”

 “비약하지 말고.”

 “너야말로 비약하지 마! 어떻게 내 말을 그렇게 해석하지? 앞으로 나에 대한 평론은 하지 말라는 소리잖아. 아. 그런 수준으로 남을 평가하려니 그 모양이지. 그 따위 헛소리에 널 만나러 나온 내가 어리석었어.”

 “연락은 네 쪽에서 한 걸로 기억하는데.”

 “지금 말장난 하자는 거야? 네 글이 결국 내 귀에 들어갈 거라는 거! 알았잖아!”


 에녹의 고성이 다시금 천장을 울렸다.

 하지만 해수는 여전히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이었다. 반쯤 가라앉아있던 눈꺼풀이 의문을 머금고 떠올랐다.


 “하지만 그게 내 직업인걸.”


 기가 찬 에녹이 얕은 숨을 팩 뱉었다. 답답함이 응축된 분노는 무게가 가중되어 도리어 기세가 한풀 꺾이곤 했다. 말이 통하지 않는 상대와의 오랜 줄다리기에서 에녹은 넘어지기 전에 손을 놓아버리기로 마음먹었다.

 예전부터 해수 앞에서만은 자제력을 잃는 일이 잦았다. 하지만 지금의 에녹은 15년 전 고등학생이 아니었다. 더욱 성숙한 자아가 이성을 다잡았다.


 “미술 평론이 하고 싶으면 다른 화가들도 많잖아.”

 “많지. 그리고 그 대상을 고르는 건 내 영역이고.”

 “너 혹시 아직도.......”


 에녹은 말을 고르며 해수의 표정을 살폈다. 일말의 의문도 묻어나지 않는 깨끗한 감정이 엿보였다. 저가 꺼낼 말을 미리 알고 있기라도 하다는 듯이.


 “아직도 화가 난 거야?”

 “.......”


 처음으로 해수의 말문이 막혔다. 커피를 마시며 시간을 벌어 볼 심산도 아닌지 잔에 손도 대지 않는다. 그저 에녹을 또렷이 바라볼 뿐이었다.

 숨 막히는 침묵 속에 에녹은 소리가 새어 나갈까 침도 삼킬 수 없었다.

 그때 카페 앞 골목으로 고등학생으로 보이는 여자아이 두 명이 지나갔다. 휴일을 맞아 재미있는 일이라도 계획한 건지 깔깔거리는 소리가 스며들어왔다.

 그 기척을 핑계 삼아 에녹이 먼저 시선을 돌렸다.

 해수는 여전히 부동상태다. 그러다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입매를 비스듬히 올리며 좀처럼 보기 힘든 능청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아직도? 글쎄...... 네게 화가 난 적이 있었던가.”

 “너 자꾸만 아까부터 말을.......”

 ”억울한 거면 몰라도.“

 “.......”


 해수의 얼굴에서 장난기가 말끔히 지워졌다.


 “왜 거짓말을 한 거야?”

 “거짓말이라니? 내가 무슨 거짓말을 했다는 거야?”

 “난 너를 폄하한 적이 없는걸.”


 이제 뻔뻔하기까지 한 해수의 태도에 에녹의 미간이 삽시간에 일그러졌다.


 “너 머리가 어떻게 된 거 아니니? 기억력이 영 안 좋네. 글을 써 지르기만 하고 한 번도 들여다보지 않는 모양이지?”

 “그건 네 작품에 대한 얘기잖아. 엄연히 다른 문제 아닌가?”

 “말장난 좀 제발 그만해!”


 에녹의 이성이 다시 한번 휘청였다. 오른 열에 머리까지 지끈거렸다.


 “나를 담아낸 작품이야! 작품이 곧 나라고! 그것에 대해 네가 뭘 안다고 지껄이는 거야?”

 “오히려 그 반대지. 나만이 알아주지 않았어?”


 점점 날이 서는 비난에도 해수는 마치 흠집 하나 낼 수 없는 호수처럼 잔잔했다.


 “전에도 말했잖아. 네 작품 속엔 진짜 네가 없다고. 그저 주워 입은 껍데기를 그려냈을 뿐이라고.”

 “.......”

 “그런데...... 여전하더라.”

 “너....... 넌 전시회가 시작도 하기 전에 평론을 마쳤어. 정작 작품을 보지도 않은 네가 무슨 근거로 그런 말을 해?”

 “선 하나.”


 첫발을 뗀 해수의 대답은 에녹을 다소 모호하게 만들었다. 한편으로 알 수 없는 기시감이 올라와 에녹은 잠자코 숨을 죽였다.


 “칠 하나에 단 한 순간도 진심을 담지 않은 적이 없었다며 작가는 말한다.”


 한 문장이 끝을 맺고 나서야 에녹은 그 기시감의 정체를 눈치챘다. 조금 전 해수가 읊어 내려간 건 이번 제 개인전 소개 글의 마지막 구절이었다.

 그렇다는 건 아마도 주해수의 저의는.......


 “난 이것만 봐도 알 수 있겠던데. 네 작품이 눈에 훤해. 하얀 뿌리며 곧은줄기, 어디 하나 썩지 않고 푸릇한 이파리, 화려하고 진귀한 꽃과 벌레 하나 먹지 않은 열매까지. 아니야?”

 “.......”

 “그런데 있잖아. 정말 그렇게 생각해?”

 “잘난 척하지 마! 넌 아직도 세상이 15년 전에 머물러있는 줄 알아? 정신 차려. 주해수. 하, 이쯤 되니 불쌍하다. 별것도 아닌 일에 갇혀 여전히 과거에 머물러있는 네 모습...... 진짜 불쌍해.”


 에녹은 날것의 분노를 잇새로 짓씹으며 선명하게 내뱉었다. 날아오는 화살을 피하지 않고 온몸으로 받아낸 해수는 입을 다문 채 되받아치지 않았다. 침묵이 이어지는 사이, “음료 나왔습니다.” 격정적인 분위기에 제동이 걸리기만을 기다리던 직원이 서둘러 차를 에녹 앞에 놓아두고는 달아나듯 자리를 피했다.

 주문한 적 없는 메뉴에 직원을 불러세우려 에녹이 반사적으로 손을 뻗었다. 하지만 따뜻한 로즈메리 향이 코끝을 스치는 순간 그대로 얼어붙고 말았다.


 “네가 즐겨 마시던 차, 맞지?”

 “.......”

 “아...... 이제 15년 전의 네가 아니니 입맛도 달라졌으려나?”


 에녹은 문양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찻잔을 오롯이 감싸 쥐었다. 온기는 금세 손끝을 타고 몸을 덥혔지만, 이상하게도 어깨가 떨려왔다.

 자황색 찻물 표면에 파문이 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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