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영림이 보고 있는 건 다름 아닌 해수의 그림이었다. 그 말에 흩어져있던 미술부원들이 하나둘씩 영림 가까이 모여들었다. 그럼에도 영림은 성에 차지 않은 양 목소리를 키웠다.
“여기 이 부분 말이야. 끝처리며 선을 쓰는 방식이 묘하게 닮았어.“
”어? 듣고 보니 정말 그런 것 같기도 하다.“
주변 아이들은 말을 얹거나 고개를 끄덕이며 영림의 의견에 동조했다.
에녹은 당장이라도 반박하고 싶었지만 처음 의견을 제시한 건 다른 이도 아닌 영림이었다. 그리고 영림은 에녹의 가장 열렬한 추종자였다. 에녹 본인 만큼이나 그녀의 작품에 관심이 많아 에녹 특유의 표현 기법이나 숨겨진 의미를 찾아내는 등 해석 능력이 뛰어났다.
따라서 에녹은 섣부른 행동을 억누르고 우선 해수의 그림으로 다가갔다. 영림이 반색하며 냉큼 에녹의 팔짱을 꼈다. 그리곤 그림 이곳저곳을 가리키기 시작했다.
“이것 봐. 에녹아. 네 그림 갈라진 땅의 질감이 이렇잖아. 그리고 이 무늬들...... 꼭 네가 그린 나비처럼 보이지 않아? 또 이 부분은 어떻고.......”
에녹은 점점 귀가 먹먹해 호흡까지 달리는 기분이었다. 영림의 말은 투명한 메아리가 되어갔다. 대신 머릿속에 맴도는 목소리가 에녹의 귓가를 세게 때렸다.
그러니까 너희들이 말하고자 하는 게 뭔데. 설마 내가 이 그림을....... 에녹의 고개가 자연스레 해수를 향했다. 언제부터 저를 보고 있었을까. 기다렸다는 듯 해수와 눈이 마주쳤다.
“몰래 보고 따라 한 것 아냐? 왜, 최근에 그림을 계속 미술실에 보관하고 있었잖아.”
이후 미연의 제지로 혼란은 일단락되었다.
하지만 에녹의 어질러진 심정까지 정리할 수는 없었다. 결국 에녹은 방과 후 모두의 눈을 피해 미술실에 들렀다. 걸음이 멈춘 곳은 제 그림이 아닌 해수의 것이었다. 에녹은 혼자 남은 지금에야 차근차근 그림을 짚어보기 시작했다.
그럴수록 심장은 빠르게 널을 뛰었다. 둥둥 울리는 맥박 소리 사이로 제 목소리를 한 누군가가 속삭였다. 만약 영림의 생각만이 아니라면. 다른 아이들도 모두 같은 생각이면 어떡하지? 졸업작품 전시회는 전교생이 보게 될 텐데. 어떡하면 좋지? 어떡해?
어떻게 나와 비교를...... 감히.
에녹은 가방에서 보온병을 꺼내 들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후 에녹의 어떤 행동도 해수에게 깊은 인상을 남기지 못했다.
자신의 졸업작품이 망가진 걸 알게 된 해수는 단 한 번 그림을 가까이 들여다보더니 미련 없이 쓰레기통에 던져넣었다. 제 그림까지도 무시하는 거만한 태도에 에녹은 이를 갈았다.
이어 가을 체육대회에도 일이 생겼다. 체육대회에 참여하지 않는 3학년 학생들에게 운동이란 점심시간을 맞아 운동장 주변을 산책하는 것뿐이었다.
그때 피구를 연습하던 1학년 학생들의 공이 새어나가 에녹의 발치까지 굴러갔다. 에녹은 다시 돌려주려 공을 들었지만, 그 사이를 지나는 해수가 먼저 눈에 들어왔다.
눈 깜짝할 사이에 일어난 일이었다. 에녹이 던진 공은 해수의 어깨에 명중했고 귀에 꽂은 이어폰이 빠질 정도의 충격을 주었다.
정작 공을 던진 에녹은 당황하며 어쩔 줄 몰랐다. 의도했지만 이성이 돌아오자, 제 철없는 행동에 놀란 것이었다. 에녹은 “괜찮아?”라고 외치며 달려갔다.
하지만 해수의 행동이 더 빨랐다. 1학년 아이들에게 공을 굴려준 해수는 분명 에녹의 목소리를 들었음에도 다시 이어폰은 꽂고 유유히 자리를 떴다.
이후로도 에녹은 점심시간에 일부러 발을 헛디뎌 해수의 교복에 국을 쏟는다던가, 교실 청소 후 쓰레받기의 먼지를 해수의 가방에 몰래 쏟아버리기도 했다. 하지만 해수는 ― 에녹이 한 짓임을 분명히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따져 묻지 않은 채 그저 닦아내고 털어냈다.
결국 에녹은 해수에게 자신은 눈앞에 거슬리는 날벌레 딱 그 정도의 존재임을 부정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 고통은 길어봤자 올해까지였다. 그 사실을 떠올린 에녹은 곧 성인이 될 자신을 위해서라도 성숙하게 행동하기로 마음먹었다. 이후 두 사람은 같은 반에 동아리까지 같았지만, 서로가 보이지 않는 것처럼 철저히 외면했다.
날카로운 평화는 한동안 이어지는 듯 보였다.
완연한 가을 날씨에 아침저녁으로 찬 공기가 더해질 즈음이었다. 에녹은 제 불찰을 크게 후회했다. 미술실에 두고 온 화구통을 하필 오늘 기억해 낸 것이 문제의 요지였다.
방과 후 미술실에 들른 에녹은 화구통을 챙기다 옆에 나란히 놓인 제 그림을 보았다. 졸업작품전시회에 출품할 그림들은 모두 액자에 담겨있었고 에녹의 그림 또한 새하얀 액자 틀 사이에서 여전히 빛을 발하고 있었다.
그간 갈고닦은 노력을 갈무리하는 한 폭의 그림. 제법 예술성까지 겸비한 유종의 미 앞에서 에녹은 가슴이 벅차오름을 느꼈다.
“가짜잖아.”
그때 귓가를 할퀴는 뜨거운 입김에 에녹은 깜짝 놀라 한걸음 크게 물러났다. 해수였다. 그림에 너무 심취한 나머지 에녹은 해수가 다가오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하지만 그보다 더 에녹을 놀라게 만든 건 조금 전 해수의 발언이었다.
“그게 무슨 뜻이야? 가짜라니?“
”말 그대로야. 네 그림은 가짜라고.“
”네 말은 지금 내가 다른 사람을 손을 빌려 출품이라도 했다는 거야?”
한동안 잠잠하다 겨우 건다는 말이 저를 향한 모함이라니, 에녹은 해수가 어이없기도 이젠 섬뜩하기도 해 뒷덜미가 쭈뼛 섰다.
이를 아는지 모르는지 해수는 그림에 눈을 떼지 않은 채 어깨만 으쓱대는 것이었다.
“네가 그렸다는 거 알아. 그런데.......” 잠시 뜸을 들이던 해수는 신중함에 비해 짧은 결론을 지었다. “그림 속에 네가 없잖아. 그러니까 가짜지.”
도돌이표 같은 해수의 답은 에녹의 혼란만 더 가중할 뿐이었다. 내 그림 속에 내가 없다니. 혹시 주해수가 제게 복수하려 근거 없는 헛소리로 훼방을 놓는 걸까. 그림을 망치는 바람에 졸업작품전시회에 출품도 못 하게 되었으니, 동기는 충분했다. 주해수 정도의 통찰력이라면 범인이 저임을 일찍이 눈치챘을 것이었다.
그러나 뒤늦게 들여다본 해수의 두 눈동자엔 검은 바위처럼 단단한 확신이 자리하고 있었다. 에녹은 일찍이 반박할 말을 수십 가지는 찾아냈음에도 입조차 떼지 못했다.
“아름다운 건 인정해. 네 그림 말이야. 그런데 가죽뿐인 사슴이 호랑이에게서 달아날 수 있을까. 아마 한 걸음도 떼기 전에 잡아먹히고 말걸.”
해수가 피식 한쪽 입꼬리를 비틀며 웃었다. 에녹이 가장 혐오하는 그 입매로 잘도 말을 이었다.
“네 그림...... 진심을 담은 것 맞아? 내 눈엔 아무것도 안 보여서 말이지.”
화구통을 쥔 에녹의 손이 모멸과 수치로 덜덜 떨렸다. 터져 나오려는 분노를 애써 참아내는 중이었다. 네까짓 게 뭘 안다고 지껄여? 그림을 제대로 배워본 적이나 있긴 해? 나보다 잘난 것 하나 없는 주제에...... 너 따위가! 어느새 목구멍까지 차오른 비난은 에녹의 숨통을 옥죄어왔다.
그때 미술실 한편 쓰레기통에서 비쭉 튀어나온 무언가가 에녹의 눈에 들어왔다. 로즈메리 차를 흠뻑 뒤집어쓴, 결국 갈가리 찢겨 버려지는 결말을 맞이한 해수의 그림이었다.
에녹은 붉게 충혈된 눈을 하고도 단 한 번 깜빡이지 못한 채 그림을 응시했다. 짧은 새 판단력이 희석되어 시선을 빼앗겼다. 제 앞에 해수가 서 있다는 사실도 까맣게 잊은 채 에녹은 상념의 늪으로 가라앉았다.
가죽, 그림자......, 발자국.
검은 이슬, 푸른 못, 잡아먹힌다.
모든 걸 가졌다는 착각, 가지지 못한 무언가.
내겐 없지만 네겐 있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