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집엔 어떻게 도착한 건지, 차는 무슨 정신으로 몰고 온 건지 에녹은 도통 기억나지 않았다. 눈이 메말라 뻑뻑해진 걸 보면 꽤 오랜 시간 잠에 들었던 건 확실했다.
어느새 노을 진 하늘빛이 커튼을 투과하여 방을 남홍색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몸을 일으키려니 기운이 없어서 천근만근이다. 자는 새 누군가 저의 모든 근육과 뼈를 발라내고 혈액과 림프, 고약하게도 손발톱까지 죄다 뽑아간 느낌이었다. 흐물흐물한 겉가죽만으로 간신히 몸을 지탱한 듯한.......
“껍데기.......”
지금 상황이 마치 해수의 의견을 뒷받침해 주는 것 같아 에녹은 남은 힘이라도 끌어모아 이불을 움켜쥐었다. 도드라진 손마디와 희미하게나마 솟은 힘줄을 보니 그게 뭐라고 위안이 됐다.
제 모습은 외출복 차림 그대로였다. 처음 있는 일이다. 에녹은 언제나 집에 돌아오면 가장 먼저 손과 발을 씻고 옷을 갈아입은 후 다음 할 일을 했다. 게다가 침대에 오르는 건 취침 전 세안을 마친 후에나 가능한 일이었다. 흐트러진 모습에 에녹 자신도 놀랐다.
이 사실을 주해수가 알면 또 그 역겨운 표정으로 비웃으려나. 깨어남과 동시에 생각의 모든 부분이 주해수로 귀결됐다. 하지만 지금만큼은 에녹에게도 그럴만한 사정이 있었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카페를 뛰쳐나오게 했던 해수의 마지막 말이 귀에 대고 종을 울린 듯 선명하게 밀려 들어왔다.
//“알았어. 네 말대로 할게. 대신...... 그림 좀 그려줬으면 하는데.“//
길고 긴 말장난 끝에 해수는 결국 에녹에 대한 평론을 멈추겠다고 약속했다. 대신 그에 대한 대가로 그림을 그려달라 요구했다. 원하는 바를 얻었음에도 에녹은 기가 찰 수밖에 없었다.
”대체 나를 뭐로 보고.......“
내가 그렇게 한가한 사람인 줄 알아? 저를 마치 자신의 개인 화가인 양 대하는 뻔뻔한 요구에 에녹은 뒷말 따위 듣지 않고 자리를 뜬 것이다.
혹여나 해수가 달리 값을 치르겠다 했더라도, 설사 그 액수가 억만금일지라도 에녹의 거절 의사는 확고했다.
“그래. 계속 지껄여보라지 내 쪽에서 무시하면 그만이야.”
평론하지 말아 달라는 부탁 속엔 해수와의 단절을 바라는 의지가 깊이 새겨져 있었다. 만약 해수의 제안대로 그녀를 위한 그림을 남기게 된다면 반드시 끊어야만 하는 인연의 끈을 더욱 공고히 할 뿐이다.
이젠 정말 끝이었다.
제가 아는 주해수라면 한번 거절한 부탁에 구질구질하니 목을 메지는 않을 것이다. 자신을 열받게 할 목적으로 평론을 이어 나갈 수는 있겠지만 이번 사태를 지켜본 남우에게서 또 한 번 소식을 전해 들을 일은 없었다.
에녹은 해방감을 온몸으로 만끽하며 기지개를 켰다. 본래 제 것이었던 일상을 맞이하러 욕실로 향했다. 여느 때와 같이 손과 발을 닦고 옷을 갈아입으려던 에녹은 욕조에 물을 받기 시작했다. 어차피 아침이 되면 기도실에 들리기 전 목욕을 해야 할 텐데도 당장 전신을 씻어내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욕조에 걸터앉아 목욕물이 충분히 받아지기를 기다리며 휴대전화 전원을 켰다. 예배 시간에 꺼놓았던 것이 여태 같은 상태였다.
예상대로 남우에게서 온 연락이 가장 많았다. 6통의 부재 전화. 그리고 3통의 메시지. 첫 메시지에는 에녹을 향한 원망이 가득했다. 이후 감정이 차츰 수그러들었는지 다음 메시지에선 안쓰러움이 묻어났다가 진심어린 걱정으로 끝을 맺었다.
이외 아버지 형곤에게서도 부재중 전화 두 통이 도착해있었는데, 이쯤 그친 걸 보니 남우가 상황을 잘 해명한 모양이었다. 에녹은 남우에게 사과와 함께 목욕 후 전화 주겠다는 답신을 보냈다.
받은 메일함은 비어 있었다.
어느새 차오른 물이 욕조를 채워 난간을 잡고 있던 에녹의 손끝에서 찰랑거렸다. 온기가 조금이라도 날아갈까 아쉬워 에녹은 곧바로 욕조에 몸을 맡겼다. 얼굴만 내민 채 수면에서 피어오르는 새하얀 김을 눈으로 좇다 돌연 어깨가 바르르 떨렸다.
결국 에녹은 눈을 감고 완전히 물 속에 잠겼다.
하늘은 더없이 푸르렀다. 구름 한 점, 새 한 마리 보이지 않는 하늘이 에녹은 누군가 마법을 부린 것만 같았다. 하얀 캔버스를 세를리안 블루색의 물감으로 전부 칠해버려도 그림은 <가을 하늘>이란 제목을 같기에 충분해 보였다. 공기에서는 마른 나뭇잎의 깨끗한 향이 느껴졌다.
선오름 갤러리를 향하는 차 안에서 에녹은 콧노래까지 흥얼거렸다.
개인전은 앞으로 2주간 더 이어질 것이다. 무려 자신의 첫 개인전임에도 에녹은 완성된 모습을 제대로 본 적이 없었다. 계획했던 오픈 행사는 물 건너갔지만, 미련을 두지는 않기로 했다. 뒤늦게 다가온 소중한 순간을 미련 따위로 망치고 싶지 않았다.
잘못 채운 단추야말로 예술의 첫걸음 아니던가. 달라진 건 없었다. 여전히 제 작품들은 갤러리에 자리하고 있고, 전시는 성황리에 진행 중이었다.
에녹은 관람객이 되어 보았던 지난번 상상을 현실화시키기로 했다. 갤러리에 도착하면 관계자가 드나드는 후문이 아닌 정문으로 입장 할 계획이었다. 남우의 오른편에 서서 그의 팔에 손을 걸치고 전시의 순서에 맞춰 그림을 감상한다. 관람이 끝나고 나면 이번 일로 재점화된 둘 사이의 불화설도 종식될 터. 관람 중간중간 결혼 발표에 대한 새 계획을 남우와 나눈다면 더욱 안성맞춤일 것이다.
어느덧 주차장에 다다른 에녹은 먼저 도착해 손을 흔드는 남우를 발견했다. 그의 표정엔 문자에 담겼던 원망도 서운함도 남아있지 않았다. 사실 어젯밤 통화로 남우의 감정이 말끔하게 해소되었다는 걸 에녹은 알고 있었지만, 직접 눈으로 보니 마음이 완전히 놓였다.
“언제 왔어? 내가 약속 시간을 착각한 건 아니지?”
에녹이 차에서 내리는 동시에 미안한 기색을 내비치며 물었다. 남우는 그런 에녹이 귀엽다는 양 웃어 보이더니 고개를 저었다.
“전혀. 그보다 에녹이 너도 일찍 온 건데? 우리 약속 시간은 아직 20분이나 더 남았다고.” 남우는 자연스레 에녹의 어깨를 감싸며 못 말리겠다는 듯 가볍게 흔들었다. “서로 너무 보고 싶었나 보다.”
에녹은 그저 미소로 답했다. 15년이란 기간이 무색하게 누가 봐도 다정하고 열정적인 연인의 모습이었다.
적재적소에 놓인 이정표가 친절하게 두 사람을 안내했다. 갤러리 정문에 가까워질수록 같은 방향을 걷는 관광객의 수도 늘어갔다. 남우는 마치 제 일처럼 뿌듯한 표정으로 에녹을 내려보았다.
마침, 관람을 마치고 돌아가는 한 무리가 두 사람을 발견하고 수군대기 시작했다. 기사를 통해 에녹과 남우의 얼굴을 아는 듯했다. 호의적인 그들의 눈빛에 에녹은 얼굴을 붉히며 남우의 허리에 손을 둘렀다. 동시에 작은 돌고래의 것 같은 탄성이 들려와 에녹과 남우는 애써 웃음을 참아냈다.
어느덧 정문에 다다른 두 사람은 먼저 안내판을 확인했다. 에녹의 개인전 포스터는 팸플릿의 표지와 닮아있다. 작품만큼이나 고심했던 표지 디자인이 이젠 지겨울 법한데도 에녹은 마치 이번이 처음인 양 꼼꼼하게 살폈다. 그 모습이 정말 한 사람의 관람객처럼 보였으니 일정 목표는 달성한 셈이었다.
“녹이 슬었네.”
“응?”
포스터의 글자 간격을 유심히 보느라 미처 남우의 말을 듣지 못한 에녹이 되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