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하늘에 풀어놓은 감색 물감의 농도가 제법 짙어진 새벽 1시. 오늘도 어김없이 에녹의 개인 화실에선 환한 불빛이 새어 나왔다.
집 뒤뜰 한편에 놓인 창고를 개조해서 만든 이 화실은 에녹이 그림에 본격적으로 관심을 가지게 된 10살 무렵 완성된 것이었다. 따뜻한 나무색의 공간임에도 초기엔 달랑 8절 스케치북, 가짓수가 12개뿐인 크레파스와 물감이 전부였던지라 서늘한 느낌이 강했다.
하지만 에녹이 자라는 만큼 그림에 대한 욕심도 점점 몸집을 불려 갔고 19살이 된 지금, 화실은 제법 전문가다운 구성을 갖췄다.
초가을로 접어드는 시기였지만 밤공기는 여전히 끈적한 계절의 여운을 머금었다. 그건 달리 에어컨을 설치하지 않은 화실 내부도 마찬가지였다. 거기에 더해 온기를 품은 로즈메리 향까지 공간을 옅게 메웠다.
에녹은 이마에 땀방울이 맺힌 와중에도 뜨거운 김을 가르며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주변 공기에만 떠돌던 로즈메리 향이 혈관을 타고 손끝까지 퍼져갔다. 이럴 때면 오랜 시간 작업에 매진하던 에녹도 잠시 눈을 감고 차향을 음미할 수밖에 없었다. 짧은 순간임에도 상시 저를 옥죄던 기대 가득한 눈빛과 숨 막히는 경쟁에서 해방될 수 있었다.
“큰일이네.”
하지만 오늘만큼은 그 어떤 것에서도 에녹은 벗어날 수 없었다. 아니, 오늘만이 아니었다. 그때부터였다.
해수의 전학 첫날 그녀의 그림을 보고 난 뒤, 투박한 연습장을 가득 메운 그림의 잔상은 여태껏 달라붙어 에녹을 괴롭히는 중이었다. 기억하고 싶지 않아도 바위에 못을 박는 듯 세차게 밀려 들어왔다. 애써 빼낸다 한들 낱낱이 패인 자국은 평생 사라지지 않고 에녹을 괴롭힐 것만 같았다.
처음엔 평범했다. 사실 지금에 와서 든 생각이지만 에녹은 그조차 평범하지 않다고 여겼다. 다양한 굵기의 선이 서로 얽히고설켜 만들어낸 기이한 무늬의 연속. 감정을 실로 뽑아내어 새로이 짜낸 듯 각각의 무늬마다 보는 이의 감정을 동화시켰다. 절망과 자유, 탐닉의 물결이 차례차례 에녹을 덮쳤다.
후반부 그림들에 비하면 인상이 약소하다 뿐이지 절대 평범한 축에 속하지 않았다.
주해수는 무슨 심정으로 그 선들을 연결했을까.
두꺼운 해무처럼 숨이 막히기도, 때론 부서지는 파도처럼 위태롭기도 한 그 그림으로 해수는 대체 무엇을 말하고 싶었을까. 그리고.......
처음 그은 선의 시작은 어디일까.
“하.......”
오늘만해도 몇 번째 떠오르는지 모를 잡념에 에녹은 한숨이 절로 새어 나왔다. 하지만 의지와 달리 머릿속은 계속해서 해수의 연습장을 넘겼다.
새카맣게 칠한 배경과 대비되어 하얗게 떠다니는 덩어리들의 향연이 시작됐다. 그것은 둥근 언덕 모양이었다가 장이 넘어가며 깊은 협곡의 모습으로 변하기도 했다.
그리고 이어지는 나체, 나체, 나체....... 정확히는 여성의 나체가 하나둘 모습을 드러냈다. 초기엔 윤곽만 단순하게 표현되었던 그림들은 뒤로 갈수록 세세해지더니 이내 노골적으로 드러났다.
분명 기술적으로 잘 그린 그림은 아니었다. 만일 해수의 그림이 매우 사실적이었거나 생동감이 넘쳤다면 그림의 주제를 떠나 실력 면에서 만이라도 미술부원들의 호응을 얻어냈을 것이다.
하지만 해수의 그림에는 기술로만 설명할 수 없는 무언의 특색이 담겨있었다.
그날 미술부 활동이 끝난 후, 해수의 그림을 조롱하며 수군대는 무리가 다수 보인 거로 봐서 에녹은 이를 자신만의 생각이라 단정 지었다. 아이들 틈에 끼어 동조의 표를 던질까도 했지만 그러지 못했다.
대체 주해수의 그림 속 무엇이 저를 이리 갈구하게 만드는 것일까. 제 그림에는 없는 그 무언가가 어떻게 주해수의 그림에 담길 수 있는 건지. 재능과 노력의 산물인 제 그림이 형편없는 실력으로 겨우 연습장에 그려낸 그림보다 초라해 보이는 게 가당키나 한 일인가.
꼬리에 꼬리를 물던 의구심은 결국 오늘처럼 에녹을 화실에 묶어놓는 족쇄가 되어버렸다. 에녹은 그리고 또 그렸다. 정말 닥치는 대로 붓을 들었다.
그 이후 몇 번째 작품쯤 되었을까. 한 주 동안 공들인 그림이 막 완성되어 에녹의 눈앞에 놓여있었다. 에녹은 잠자코 그림을 들여다보았다. 다정한 눈길로 붓질 하나하나를 쓸어 내려갔다.
그러다 돌연 따뜻했던 눈빛이 잘 벼린 칼처럼 날카롭게 번뜩였다. 페인팅 나이프를 쥔 에녹의 왼손에 힘줄이 불거졌다. 당장이라도 그림을 찢어발길 듯한 기세로 에녹은 페인팅 나이프를 어깨 위로 들어 올렸다.
그대로 굳은 채 한참 동안 그림을 노려보던 에녹은 결국 손을 거두어들였다.
둥그렇게 놓인 이젤 주위를 돌며 미술부원들은 서로의 마지막 작품을 감상하는 중이었다. 경탄의 연발이었다. 이들의 발목을 잡은 건 단연 에녹의 그림 앞이었다.
“이게 우리 나이에 그릴 수 있는 그림이 맞아?”
“에녹아. 너 손목 괜찮니? 단기간에 이렇게나 실력이 늘 수 있는 거야?”
“난 사실 에녹이가 더 올라갈 데가 있나 했는데...... 있었구나.”
이러한 반응에는 그만한 근거가 있었다.
이전 에녹의 그림은 기술적인 면에서 보다 뛰어났다. 그리고 지금은 그 기반 위에 에녹만의 독보적인 철학까지 덧발렸다. 설익은 아이들의 눈으로도 느낄 수 있는 예술성을 또렷하게 내비치고 있었다.
에녹의 그림 속엔 가뭄이 들어 갈라진 땅이 널리 뻗어있었다. 그리고 검게 칠해진 사람의 형상이 그림의 중앙을 가로질러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는데, 때마다 마른 땅에 발자국이 선명히 찍혔다. 발자국 위엔 풀꽃이 가득했다. 날개가 찢어져 너덜거리는 노랑나비 떼가 풀꽃을 따라 모여들었다. 발자국의 주인은 묵묵히 걸었다.
캔버스의 오른쪽 아래 제목이 적혀있었다.
빼앗긴 나비의 춤을 위하여
저마다의 해석을 내놓는 아이들 사이에 섞여 미술 선생 미연까지도 에녹의 그림 앞에 가장 오래 머물렀다. 그만큼 에녹의 그림은 사람의 이목을 묶어놓는 힘이 있었다.
“정말 수고 많았다. 에녹아. 이번 졸업 작품 전시회에서 많이들 놀라겠는걸?”
미연의 칭찬에 에녹의 입꼬리가 수줍게 솟았다. 하지만 두 눈은 다른 어느 한 지점을 힐끔대곤 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해수는 제게 쏘아지는 시선도 모른 채 다른 아이의 그림을 감상하는 중이었다. 에녹의 그림은 지나친 지 오래였다.
에녹은 그 순간을 똑똑히 기억했다. 이젤을 따라 돌다 어느덧 제 그림 앞에 멈춰 선 해수의 반응을 말이다. 아니, 반응이랄게 있었던가? 해수는 일절 주춤하지 않고 에녹의 그림을 지나쳤다.
차라리 지난번처럼 비웃기라도 했다면 에녹은 그를 빌미로 따져 물었을 것이다. 하지만 제 취향이 아닌 양 무덤덤하게 떠나간 사람을 붙잡고 무엇이 불만인지 캐물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이쯤 되니 에녹은 합리적인 의심에 이를 수밖에 없었다. 해수가 제 재능을 질투하는 걸까. 그러니 자존심을 부리는 것이라고. 분명 너도 나와 같은 감정이리라.
그 때문에 유치하다 여기면서도 해수의 그림 앞에서 에녹은 같은 태도를 취했다. 무심한 시선으로 한번 훑은 후 서둘러, 어쩌면 다른 아이들의 그림보다 조금 더 빨리 지나쳤을지도 몰랐다.
다른 아이들의 반응도 차갑긴 마찬가지였다. 낮고 짧은 호흡을 터트리며 감정을 애써 숨기지 않는 아이들도 더러 있었다. 대체로 의문과 불쾌함이 공존하는 감정이었다. 물론 해수는 그조차도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았다.
에녹은 이러한 현상이 단지 전학 첫날 모두를 경악케했던 그 ‘사건’의 여파만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만큼 해수의 그림은 오늘 또한 그 짧은 순간만으로도 에녹의 뇌리에 선명이 각인되었다.
거친 질감과 상반된 부드러운 선, 그리고 빈틈은 푸른 계열의 수채물감으로 채웠다. 명암도 채도도 단조로운 그 그림에서 표면적으로 느낄 수 있는 거라곤 막연함뿐인 것만 같았다.
하지만 에녹만은 그 납작한 벽에 가려진 이면에서 어룽거리는 그늘을 보았다. 숨겨진 음지의 공간은 사면의 벽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벽에 맺혀 수시로 미끄러져 내리는 이슬은 검게 보였지만 결국 바닥에 고인 물은 푸르렀다. 에녹은 두껍고 음습한 공기를 헤치고 손끝으로 벽을 훔쳐냈다. 새카맣고 투명한 액체는 열 오른 피부를 배경 삼아 검붉게 번들거렸다.
“그런데...... 에녹이 그림이랑 느낌이 조금 비슷하지 않아?”
영림의 말소리에 에녹은 단숨에 상념에서 건져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