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이곳 말이야.”
남우가 안내판의 다리와 액틀의 이음새를 가리켰다. 쇠로 만든 구조물 일부에 정말 녹이 슬어있었다.
“아무리 잘 안 보인다지만 관람의 시작을 알리는 곳인데...... 선오름도 이제 예전 같지 않네.”
기어이 다음 전시는 다른 곳을 알아보자는 말까지 내뱉으며 남우는 불만을 노골적으로 표현했다.
마치 제 일처럼 여겨주는 남우에 대한 고마움도 잠시, 뇌리에 총알처럼 강렬하게 스치는 기억에 에녹은 얼어버렸다.
생각보다 오랜 시간 녹이 슨 부위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에녹이 남우는 의아했다. 혹시 기분이 많이 상했을까. 심히 완벽주의적 성향의 에녹이라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았다.
”에녹아.“
조심스레 부르는 소리에 에녹이 깜짝놀라 어깨를 흠칫 떨더니 남우를 올려보았다. 마치 저 혼자 다른 공간에 떨어졌다가 속히 건져 올려진 듯 얼떨떨한 얼굴이다.
뒤늦게 평정심을 찾으려 에녹은 미소 지었지만, 입매가 어색하게 떨렸다. 단순 화가 난 사람의 반응이라 보기엔 어려웠다.
”왜 그래? 무슨 생각을 한 거야?“
”아...... 아니야. 아무것도.“
황급히 시선을 거둔 에녹이 먼저 갤러리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남우도 서둘러 뒤를 따랐다.
이후 별일 아니라는 말과는 달리 에녹은 도통 작품 감상에 집중하지 못하는 듯 보였다. 에녹과 그림 사이사이마다 불투명한 창이 가로막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초점이 흐렸다. 남우가 그림에 대한 설명을 요구하면 저가 그린 그림임에도 한참 생각을 고르다 입을 열곤 했다.
조금 전 입구에서 있었던 상황에 대해 남우는 한 번 더 물어보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행여 지난번처럼 에녹을 달아나게 할 무언가일까 조심스러웠기 때문이다.
어느덧 관람은 막바지에 다다르고 있었다. 여전히 집중력이 흐트러진 채 허공으로 시선을 던지는 에녹을 이끌고 남우는 마지막 그림 앞에 섰다.
거대한 캔버스가 전시회장 한 면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피날레를 장식하는 한 폭의 그림은 그에 걸맞게 지나온 어느 작품보다 화려했다. 그림에 담긴 울창한 숲은 누구라도 탄성을 터트릴만한 자태였다. 눈이 시리도록 선명한 초록 잎은 어느 하나 그 모양이 일정하지 않았다. 세상 모든 나무의 이파리를 하나씩 따다 엮어놓은 것만 같았다. 그 사이로 강렬하게 대비되는 붉은 열매가 알알이 맺혀있다. 열매 또한 크기며 모양이 각기 달랐다.
이는 흔히 알려진 숲이라기보단 어느 전능한 이가 빚어낸 신비롭고 풍요로운 가상의 공간으로 보였다. 특히 붉은 열매를 하나하나 감싸고 있는 무수한 손은 너무도 새하얗고 찬란하여 몽환적인 느낌을 짙게 했다.
그림을 본 관람객의 일부는 풍성한 이파리가 그간 작가의 노고를 쌓아 올린 형상으로 보인다 해석하며 ‘노력’에 초점을 맞추었고, 다른 몇몇은 탐스러운 열매가 피가 섞인 땀방울과 같다 하여 ‘결실’에 중점을 두기도 했다.
그리고 남우가 내린 해답은 ‘수확’이었다. 그는 가녀리고 섬세한 손끝에서 열매를 향한 집요함을 보았다. 잘린 손목의 단면에서 우악스러운 힘줄을 보았다.
에녹은 이제야 정신을 차렸는지 그림에 집중하는 모양새였다. 마침, 그녀의 눈동자가 그림 속의 손 하나하나를 따라 움직이고 있었다. 남우에게 이보다 더 확실한 기회는 없었다. 에녹이 창조한 세상을 배경 삼아 함께 마침표를 찍는 그림 같은 순간. 그 무엇보다도 두 사람에게 가장 어울리는 수확이 되리라.
남우는 에녹이 눈치채지 못하게 왼쪽 안주머니로 손을 넣었다. 작은 상자에서 부드러운 융의 촉감이 느껴졌다. 다른 한 손으론 에녹의 오른손을 잡았다. 그림에 집중되어 있던 시선이 그제야 남우를 향했다. 그와 동시에 남우는 반지를 꺼내며 한쪽 무릎을...... 꿇었어야 했다.
“에녹아?”
관람하며 평온을 되찾았다고 생각했던 에녹의 표정이 또다시 무너지고 있었다. 붉게 물든 흰자위엔 당장이라도 흐를 듯 눈물까지 가득 고였다. 매사에 이성적이었던 에녹에게 감정을 주체 못할 일이란 무엇인지 남우는 도저히 파악할 수 없었다. 설마 지금 저의 계획을 알아챈 에녹의 답변일까. 불안한 생각이 남우의 몸을 굳혀 그는 더 이상 계획을 진행하지 못했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에녹은 안주머니에 손을 넣은 남우의 자세에서 어떠한 의도도 읽지 못했다. 사실 현재 남우의 모습이 어떠한지 인식조차 못 하고 있다는 편이 정확했다.
“다 봤으니 이제 갈까?”
“지금 그게 할 말이야?” 남우는 목을 조이는 답답함을 참지 못하고 목소리를 높였다. “너 울고 있잖아!”
다그치는 소리에 쫓겨 에녹이 황급히 눈가를 훔쳤다. 그리고 언제 그랬냐는 듯 혼란스러운 감정을 지우고는 웃었다.
“오빠도 참...... 당연히 눈물이 나지. 내 첫 개인전인걸.”
“.......”
“이제 갈까? 근데 나 속이 좀 안 좋아서 점심 약속은 다음으로 미뤄야 할 것 같아. 괜찮지?“
남우에게 잡힌 손을 이번엔 에녹이 반대로 이끌었다.
눈앞에 펼쳐진 어설픈 연극은 지적할 점이 한둘이 아녔기에 남우는 헛웃음까지 나올 뻔했다. 하지만 그는 순순히 에녹의 뒤를 따랐다. 자신에게도 시간이 필요해졌기 때문이다.
대체 무엇이 에녹을 이토록 괴롭게 만드는 것인지 알아내야 했다. 그것이 에녹의 비전이나 믿음에 관련된 개인적인 것일지라도, 어느 평론가에 의한 타의적인 것일지라도 그 영향이 에녹을 넘어 둘 사이에까지 미친다면 남우는 기필코 알아내 해결하리라 결심했다.
집에 도착한 에녹은 휴식을 취하겠다던 의사와 달리 침실로 향하지 않았다. 욕실도 아니다. 현관을 지나 에녹은 곧장 서재에 들렀다.
노트북을 앞에 두고 의자에 앉은 에녹은 포털사이트를 실행시킨 후 메일함을 찾았다. 심호흡은 계속되었지만, 머리끝까지 울리는 두근거림은 좀처럼 진정이 되지 않았다. 떨리는 손으로 힘겹게 마우스를 조작하며 보낸 메일함에서 해수의 이메일 주소를 확인했다. 그리고 해수에게 새로 보낼 메일을 작성하기 시작했다.
그리 길지 않은 내용이었기에 메일은 금세 전송됐다. 하지만 손쉬운 일련의 과정에 비해 에녹이 내린 결정의 무게는 물먹은 솜처럼 가슴을 짓눌렀다. 한 치의 오차도 허용할 수 없었기에 에녹은 보낸 메일함에서 발신 상태를 재차 확인했다. 작성한 내용도 한 번 더 훑어보았다.
네 제안대로 하자. 그릴게. 그림.
얼마 안 가 이메일 한 귀퉁이에 ‘수신확인’이란 글자가 붉게 새겨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