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커다란 폭풍우가 휩쓸고 지나간 뒤 찾아오는 평화는 평소보다 달콤한 법이었다. 해수애게 내줄 한 조각의 의식조차 수능 준비로 뒤덮인 에녹은 전에 없던 잔잔함 속에서 순조로이 나아갔다. 3학년 복도에 두껍게 내려앉은 적막이 평화를 더욱 선명하게 했다.
해수는 대체로 일찍 등교하는 학생 무리 중 하나였고, 에녹은 교실에 아이들이 3분의 2쯤 차오른 후 주인공처럼 등장하는 축에 속했다. 게다가 두 사람의 자리는 교실 내에서 끝과 끝으로 떨어져 있었기에 마주칠 일이 가장 적었다.
수능이 끝났다.
이는 미술대학 지원생들에겐 또 다른 시작을 의미했다. 1월 초에 있을 실기 준비에 돌입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그 전, 이샘여자고등학교 미술부 3학년 학생들은 수능이 끝났다는 해방감의 겉이라도 핥을 겸 패스트푸드 점에서 모임을 가졌다.
해수는 없었다. 어김없이 마지막 주자의 무게를 짊어지고 등장한 에녹은 해수가 없음을 인지하고는 안도했다. 어느 하나 해수의 부재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 부른 이가 없으니 당연한 결과이기도 했다.
하지만 누군가의 부재는 간혹 존재감을 부각하는 요소로 작용한다. 화제의 중심이 자리에 없을 때 그에 대해 말을 얹는 것처럼 쉬운 일도 없었다.
시작은 유일무이 소식통 영림의 입을 통해서였다.
“너희 그거 들었어? 주해수 말이야. 미대에 지원한 게 아니라던데?”
에녹은 매우 놀랐다. 그 속엔 영림이 전한 소식에 무덤덤한 반응을 보이는 아이들에 대한 동요도 담겨있었다. 에녹은 그 이면에서 해수에 대한 반감과 멸시를 보았다.
”그럼?“
전혀 관심 없을 거로 생각했던 에녹에게서 반응이 오자 영림은 의아했지만, 반대편에서 밀려오는 희열에 정신을 내주고는 제가 아는 정보를 모두 터놓았다.
”2반 부반장 정해미말로는 서진대에 새로 신설된 미학과라고 하던데?“
”미학?“
”응. 그렇다더라고. 뭐, 주해수 걔가 그림 실력도 안 되는 것에 비해 보는 눈은 좀 있었잖아? 나도 그건 인정해. 우리들 그림 중에서 딱 에녹이 네 그림의 진가를 알아보고 모방하려던 것만 봐도 그래.”
“그건.......” “잠깐만. 따지고 보면 네 덕 아니야, 에녹아?“
”응?“
”네 그림을 보고 나서야 주해수는 숨어있던 재능을 발견한 거잖아. 아름다움에 눈을 뜬 거지! 그렇지 않아?“
영림의 아부 섞인 열변이 끝남과 동시에 에녹은 코웃음이 터졌다. 옅은 불쾌감이 느껴지는 이 웃음이 영림을 포함한 아이들은 자신들의 것과 같은 결을 지녔다고 생각했다. 주해수를 향한 적대감. 그림 기법까지 모방당한 에녹의 입장이라면 저희보다 감정의 골이 배는 더 깊으리라.
그러나 에녹의 진심은 달랐다. 그녀의 비소는 해수가 아닌 이 지금 이 공간에 모인 아이들을 향한 것이었다. ‘그림 실력도 안 되는 것’들에게로.
아이들의 생각처럼 주해수의 그림 실력은 결코 뛰어나지 않았다. 이는 아이러니하게도 에녹을 해수 앞에서 더 초라한 존재로 각인시키는 요소로 작용했다.
해수의 어설픈 붓질은 에녹의 가슴께를 간질이며 점차 파고들다 급기야 그 심연까지 건드리고 말았다.
만일 주해수가 저와 같은 환경에서 같은 지원아래 성장했다면? 아마 지금 이 자리에서 선망의 눈빛을 온몸으로 받아내는 이는 자신이 아닌 주해수일 것이라 에녹은 확신했다.
자연히 의문이 들었다. 주해수가 그림으로 외치는 목소리는 제게만 국한되어서 들리는 것일까. 다른 아이들의 눈엔 정녕 그 의도가 보이지 않는가.
결국 에녹은 해수의 그림에 치이고 밟힌 과거가 저만의 착각일지도 모른다는 결론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네가 주해수를 싫어하는 건 당연해. 우리가 증인인걸. 에녹이 너처럼 속이 깊은 애가 등을 돌린 거면 말 다했지 뭐.”
“내가 주해수를 싫어한다고?”
에녹의 의아하단 반응은 오히려 영림을 포함한 부원들에게 물음표를 던졌다. “아니었어? 우린 모두 그런 줄 알았는데. 그래서.......” 우리도 주해수가 미웠던 건데. 영림의 미처 내뱉지 못하고 말끝을 흐렸지만, 그 생각은 모두에게 선연히 전해졌다.
에녹은 혼란스러웠다. 자신에게서 복제된 증오가 아이들의 눈을 가려버린 것일 수도 있었다. 그래서 아이들은 해수의 그림 속에서 아무 것도 보지 못했는지도 몰랐다.
그보다 아이들이 저에게서 때어간 감정이 증오가 맞는 지도 에녹은 확신할 수 없었다.
겨울을 맞아 성초읍 거리는 다시 한산해졌다. 강한 한파로 인해 대부분의 사람은 여가 시간을 실내에서 보내곤 했다.
에녹에게도 한겨울 추위는 매서웠다. 그래도 한동안은 실기 준비를 위해 옷깃을 여며서라도 외출해야 했다. 대부분 출근하는 부모의 차를 이용했지만, 상황이 여의찮은 날엔 택시를 타고 미술학원에 가야 했다. 유독 택시가 잘 잡히지 않는 날이면 학원에 도착하여 붓을 쥐는 순간까지 손이 얼어있었다.
그 때문에 에녹은 실기가 끝난 후 ― 대학 합격 발표 소식이 있은 날 부모와의 외식과 졸업식, 그리고 주일마다 교회에 다니는 것을 제외하고 ― 최대한 외출을 삼갔다.
대학 입학 전까지 2월 한 달은 꽤 무료한 시간이었다. 그러던 에녹이 오랜만에 거울 앞에 서서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성년이 된 기념으로 구입한 상아색 스웨터에 갈색 코트를 걸치니 교복이 아닌 것만으로도 제법 어른스러운 태가 났다.
하지만 에녹은 제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왜인지 모를 아쉬움에 입매가 비쭉 틀어졌다. 백자의 표면처럼 매끄러운 피부와 부드럽게 물보라 치는 머리칼, 단정한 어깨는 평소와 다를 바가 없었다.
모순되게도 그 점이 에녹을 더욱 불만스럽게 했다. 작년과 다를 바가 없는 자신의 모습. 어른과 아이 사이 어느 애매한 지점에서 길을 잃은 것만 같았다. 입시가 끝나면 아이의 탈을 벗어 던지고 홀가분한 마음으로 어른의 길에 접어들 줄 알았다. 실감 나지 않아 오는 괴리감 속에서 허우적대는 상황을 에녹은 미처 예상치 못했다. 지금의 에녹에겐 어른스러운 옷가지도 교복도 어느 하나 어울리지 않았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나신만이 오롯이 제게 속한 듯 느껴졌다.
하지만 오늘은 흡족하지 않은 모습으로도 가야 할 목적지가 있었다. 시계를 확인한 에녹은 집을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