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에녹이 감정을 추스른 건 정규 수업이 모두 끝난 후 마지막 교시인 CA 시간을 앞둔 때였다.
고등학교 3학년의 개학이란 하루 정도는 수업 소개나 하며 대강 흘러가지 않을까 하는 안일한 마음 따윈 허락되지 않았다. 미술적 재능이 출중한 에녹이라 할지라도 내신이 기본으로 받쳐주지 않는다면 원하는 대학의 문턱도 쳐다볼 수 없었다. 고로 수업 시간을 빼곡히 채운 에녹은 여타 아이들처럼 정신이 피로하긴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단지 그 피로만으로 전학생 주해수에 대한 반감을 전부 몰아낸 건 아니었다. 에녹은 반장이었고 현재 향하는 미술부의 부장이기도 했다. 자고로 한 구성원을 이끌어갈 자리에 앉은 이는 남다른 포용력을 지님이 마땅하다는 데에 에녹은 이견이 없었다. 또한 첫인상만으로 구성원을 배제하는 건 에녹이 추구하는 완벽한 리더십에 어긋나는 행보였다. 첫인상만 별로인 게 아닐지라도...... 곧 졸업이니까. 생각을 환기한 에녹은 미간을 한풀 누그러뜨린 채 나란히 걷고 있는 해수를 돌아보았다.
“주해수라고 했지? 어쩌다가 지금 시기에 전학을.......”
어렵게 열린 에녹의 입이 서둘러 닫혔다. 개인 사정이 있을 수 있으니 추궁 말라는 담임선생의 충고가 뒤늦게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에녹은 남다른 순발력을 발휘해 냉큼 말을 덧붙였다.
“이곳으로 오게 된 거야? 그러니까 내 말은 요 옆에 성초고는 생긴 지 얼마 안 돼서 시설도 최신식이고 교복도 예쁘거든. 게다가 남녀공학이기도 하고 말이야.”
어색함을 무마하기 위해 건넨 물음이었음에도 해수는 제법 진지하게 골몰하는 듯 보였다. 할애한 시간에 비해 내놓은 대답은 제법 단순했지만 말이다.
“미술부 때문에.”
“무엇 때문이라고?”
“미술부. 성초고에는 미술부가 없다더라고.”
에녹의 눈꺼풀이 한층 솟았다. 미술부 때문이라니. 사고는 자연히 해수의 그림 실력을 가늠하는 방향으로 흘렀다. 미술을 얼마나 한 것인지, 혹시 저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던 이유가 미술대회에서 본 적이 있어서인지 탐구심이 들었다.
하지만 만약 해수가 대회에서 수상한 적이 있다면 에녹이 모를 리 없었다.
역시 이 애만 나를 봤던 걸까?
“혹시 해수 너, 예전에 나 본 적 있니?”
“없는데.”
단칼에 나오는 대답에 에녹의 궁금증은 더욱 미궁에 빠졌다. 그렇다면 대체 왜 사람을 그리 빤히 쳐다본 건지, 너 그거 굉장히 안 좋은 습관이라며 핀잔을 주고 싶었다.
그러면서도 그림은 잘 그리는 편인지, 수상한 적은 있는지, 주로 어떤 화풍을 선호하는지 등의 걷잡을 수 없이 쏟아지는 물음표가 쌓여 점점 무게를 늘려갔다. 결국 에녹의 자존심까지 짓누르기 시작했다.
그것만큼은 참을 수 없었던 에녹은 숨을 짧게 끊어 내쉬며 모든 궁금증을 갈무리했다. 대신 ”넌 나한테 뭐 궁금한 것 없니?”라며 뒤늦은 자존심 회복에 나서는 것이었다.
해수는 이번에도 잠자코 고민하기에 이르렀다. 그 모습만으로도 에녹은 작은 성취를 얻었다.
하지만 모든 기대가 그에 걸맞은 결과를 불러오는 건 아니었다. 허공을 배회하던 해수의 시선은 에녹의 얼굴에 내려앉았다가 잠시 가슴께를 배회했다. 그러다 이내 시선을 거두며 또 한 번 ‘없어’라며 짧게 답했다.
에녹의 얼굴은 패배감으로 얼룩졌다. 다행히 미술부 문패를 발견한 해수가 앞서 들어간 덕에 표정을 들킬 염려는 덜었다. 에녹은 잠시간 숨을 고른 후에야 한발 늦게 미술실에 입성할 수 있었다.
”에녹 선배!“
한 미술부원이 에녹을 가장 먼저 발견하곤 외쳤다. 이후 제 학급과 다름없는 수준의 환대가 동기, 후배 할 것 없이 미술실 이곳저곳에서 터져 나왔다.
해수가 구긴 에녹의 자존심은 미술부원들의 도움으로 금세 풍선 같은 본래의 모습을 회복했다. 그에 걸맞은 가벼운 발걸음으로 에녹은 미술실의 중앙으로 걸어 들어갔다. 제 자리에 도착해 머리칼을 귀 뒤에 꽂으니 미술실 누구나 에녹의 표정을 볼 수 있었다. 여유 가득한 미소가 얼굴에 만연했다.
에녹은 한동안 미술부원들과 회포를 이어갔다. 가장 구석에 앉은 해수를 제외한 모두와 눈길을 주고받고, 몇몇을 골라 다정하게 어깨를 쓰다듬었다. 한바탕 오른 열기는 곧 도착한 미술 선생에 의해 금세 식혀야 했지만, 에녹은 충분히 배가 불렀다.
“자. 여름방학 바쁘게 잘 보냈겠지?”
단순 안부의 의미만을 담지 않은 미술 선생 미연의 첫인사에 ‘네’ 하며 대답하는 학생들의 목소리가 늘어졌다. 그리곤 하나같이 화구통을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다.
“고삼 목소리가 이렇게 힘이 없어서야 되겠어? 공부도 체력이지만 그림 또한 체력이야. 그러니 너흰 체력이 두 배는 필요하겠지?”
농담과 진담이 반반 섞인 잔소리를 하던 미연은 분필을 들어 칠판에 글자를 적어 내려갔다.
진정한 나에 대한 고찰
“너희가 이 주제에 대해 깊이 생각했다면 중점을 ‘나’가 아닌 ‘진정한’에 두어야 한다는 것을 알아냈겠지. 그에 대한 해답을 한 장의 도화지에 담아내는 과정에서 많은 감정을 느꼈으리라 믿는다. 입시 미술은 잠깐이지만 진정한 나, 진짜 내가 원하는 것을 생각하는 연습은 평생을 좌우하는 법이거든. 어쩌면 지금이 자신의 내면을 돌아볼 가장 중요한 순간일 수도 있지. 저마다 학원에서 특강이다 뭐다 바빴겠지만, 난 고삼에게도 방학은 방학이라 생각해. 그러니 잠시 숨 돌린다 생각하고 너무 부담 갖지는 않았길 바란다.”
긴 서론을 끝낸 미연의 시선이 가장 앞자리에 앉은 영림을 향했다.
“자. 그럼 영림이부터 순서대로 발표해 볼까?”
미연이 교탁 옆의 이젤을 눈짓하자 영림이 쭈뼛대며 앞으로 나갔다. 곧 손에 들린 2절 도화지가 펼쳐지며 시골 풍경이 담긴 한 폭의 수채화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림 속 알알이 피어난 꽃처럼 영림의 뺨도 다홍빛으로 물들어 갔다. 아이들 사이에서 목소리를 내는 것과 그들 앞에 나와 발표하는 것엔 필요로 하는 용기의 질량에서 큰 차이가 있었다. 제게 화살처럼 집중된 시선을 차마 견디지 못한 영림은 올곧이 그림만 바라본 채로 입을 열었다.
“어...... 발표를 시작하겠습니다. 흐흠. 우선 저는 이번 여름방학을 맞아 시골 외할머니댁을 방문했습니다. 이 그림은 저희 외할머니께서 가꾸시는 상추밭 옆 배롱나무와 평상을 그린 것입니다.”
영림의 설명에 아이들은 고개를 작게 끄덕이면서도 반면 얼굴에는 의문이 피어났다. 그래서 평상이 뭐 어떻다는 건지, 배롱나무와 ‘진정한 나’가 무슨 연관성이 있느냐는 물음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외할머니댁에 머무르는 3일 동안 저는 틈만 나면 배롱나무 그늘을 지붕 삼아 평상에서 시간을 보냈습니다. 대낮엔 시원한 수박을 먹고 저녁이 되면 노을을 그리다 밤이 오면 누워 별을 세었습니다. 저는...... 정말 오랜만에 행복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저뿐만이 아니겠지만 고등학생, 특히 3학년이 되어서 행복한 순간을 경험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저는 올해 들어 더욱 매사에 예민했고 사소한 일로 불만을 품었으며 한숨 쉬는 버릇도 생겼습니다. 하지만 배롱나무 아래서 저는 예전 장난기 많았던, 낙천적이고 여유를 즐길 줄 알았던 진정한 저 오영림의 모습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그림에 제 모습을 그려 넣지 않은 이유는 꼭 저곳에만 국한된 것이 아닌 집과 학교에서도 다시 예전의 저로 돌아가기 위해 노력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언젠가부터 목이 메어오던 영림은 끝내 목소리를 떨었다.
“그동안 제 감정 기복을 받아주느라 고생한 친구들과 가족에게 미안하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붉은 눈가를 따라 금방이라도 눈물이 방울져 흐를 것만 같았다.
영림의 진심 어린 사과 후 미술실은 정적에 휩싸였다. 미연의 요구처럼 가벼운 마음으로 시작한 발표였음에도 영림의 눈물은 꽤 무게가 나갔다.
그러다 불현 에녹이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그와 같은 손길이 하나둘 더해지더니 이내 미술실을 가득 메웠다. 아직 수업에 적응하지 못한 해수도 분위기에 휩쓸려 손끝을 어색하게 맞두드렸다.
이후 차례차례 아이들의 발표가 이어졌다. 누군가는 자신의 방을 그려 소개했고 또 어떤 아이는 자신이 오래 키운 강아지의 모습을 그려왔다.
어느덧 에녹의 차례였다.
“저는.”
그림을 펼치기 전 먼저 입을 떼어 이목을 집중시킨 에녹은 곧 그림을 보이고도 설명을 이어갈 수 없었다. 그보다는 동시에 터져 나온 아이들의 감탄에 말할 기회를 놓쳤다고 보는 것이 맞았다.
에녹의 그림 속엔 또 한 명의 에녹이 이젤을 앞에 두고 붓을 든 채 아이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찌 보면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담은 흔한 자화상으로 보일 수 있었다. 하지만 에녹의 것은 감히 ‘흔하다’는 말로 단정 짓기 어려웠다.
유화물감의 뭉툭한 질감을 이용해 이토록 찬란한 빛을 표현할 수 있다는 사실에 아이들은 신선한 충격에 사로잡혔다. 분명 창을 통해 들어오는 햇살에만 특유의 기법이 사용됐음에도 그 빛은 그림 속 에녹에게 흡수된 듯 그녀의 얼굴에도 은은한 광채가 감돌았다.
보는 이의 시선을 자연스럽게 이끄는 빛의 방향과 강도가 입체감을 돋보이게 했는데, 그 덕분인지 그림 속 에녹의 차림새가 꽃무늬 원피스가 아닌 물감이 덕지덕지 묻은 지저분한 앞치마란 사실을 아이들은 뒤늦게 눈치챘다.
에녹의 빛은 단순한 물리적 도구가 아니라 순간을 포착하는 힘이 되어 보는 이들에게 정서적 깊이를 전달하고 있었다.
“우선 이 주제를 과제로 내주신 선생님께 감사드립니다.”
술렁임이 어느 정도 가라앉자, 에녹은 두 손을 모아 미연을 가리키며 말했다. 미연은 흐뭇한 표정으로 팔짱을 낀 채 어깨를 으쓱거렸다.
“저는 이번 여름방학을 보내기 전까지 진정한 저 자신에 대해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다는 것에 매우 놀랐습니다. 하지만 방학 내내 쉴 틈 없는 일정을 소화해야 했기에 한동안 차분히 생각할 시간을 갖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보통의 날처럼 학원에서 그림을 그리는데 우연히 거울 속 제 모습을 마주하게 되었습니다. 피로에 짓눌려 눈 밑엔 그늘이 지고 옷도 머리도 엉망이었지만...... 행복해 보였습니다.”
그날의 감정이 떠오르기라도 하는 듯 에녹의 얼굴에 환희가 물씬 묻어났다.
“그때 선생님께서 내주신 과제가 떠올랐고 저는 그에 대한 답으로 거울 속 제 모습을 그리기로 결심했습니다. 10년 전 그림을 시작했을 때의 제 모습은 행복한 감정에 있어선 지금의 모습과 별반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러니 10년 후에도 같을 거란 확신이 있습니다. 자화상을 그리며 저는 그림 속의 저와 약속했습니다. 지금까지 제 손으로 담아낸 투명하고 솔직한 감정을 계속 그려내겠다고. 진심이 담긴 그림만큼.......”
그때, 어디선가 참지 못한 비웃음이 입술 새로 터져 나와 청산유수처럼 흘러나오던 에녹의 말에 제동을 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