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올해로 8살이 된 에녹은 여름방학이 끝나고 2주도 채 지나지 않아 극심한 피로에 시달리는 중이었다. 먹고 싶을 때 먹고 자고 싶을 때 잘 수 있었던 꿈같은 생활은 에녹이 태어난 후 단 7년만 허락되었다.
저에게 매사 너그러운 아버지가 그 사실을 미리 일러주었더라면, 꼼꼼하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운 어머니에게 일찍이 귀띔을 받았더라면 조금 더 본능에 충실한 시간을 보낼 수 있었을 텐데. 뒤늦은 아쉬움이 밀려와 에녹은 입맛을 쩍 다셨다.
미취학아동에 있어 초등학교 생활은 살인적인 일정의 연속이었다. 여름방학은 겨우 숨 돌릴 틈 정도만 제공할 뿐 ― 그마저도 방학 숙제라는 파도에 휩쓸려 대체로 표류하며 시간을 보내게 된다 ― 개학과 동시에 피로가 도로 쌓이는 건 매한가지였다.
게다가 에녹은 일요일에도 마음대로 쉬지 못했다. 부모님을 따라 매주 예배에 참석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런 입장과는 별개로 녹림 교회 신도들에게 에녹은 제법 인기가 많은 편이었다. 기억에는 존재하지 않지만, 제가 모친의 뱃속에 있을 적부터 함께 했다는 사실이 신도들에게 특별히 작용했는지도 몰랐다. 그런 아이를 모태...... 뭐라고 불렀던 것 같은데. 에녹은 여전히 그 단어가 어려웠다.
아무튼 당장 중요한 문제는 오늘도 어김없이 제 정수리가 닳고 있단 사실이었다.
물론 어린아이에 불과했던 작년까지는 신도들의 귀여움을 독차지하는 건 이득에 더 가까웠다. 달란트 시장에서 깨끗한 곰 인형을 값싸게 살 수 있었으며, 부활절 달걀을 하나 더 받을 수 있기도 했으니 말이다. 녹림 교회 내 가장 어린아이로서 에녹은 나름의 의무감을 가지기도 했었다.
하지만 올해부터는 상황이 달라졌다. 에녹은 이제 어엿한 초등학생이 되어 스스로 교과서를 챙겼으며 숙제를 밀리는 법도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 신도들은 여전히 에녹이 귀엽다는 양 볼 때마다 머리를 쓰다듬었다. 요즘 에녹의 새로운 걱정거리는 이러다 키가 자라지 못하면 어쩌나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싫은 내색을 하며 어른들을 실망시키고 싶지는 않았다.
결국 다가온 일요일, 에녹은 서로 인사를 나누는 어른들을 피해 예배가 시작되기 전까지 교회 뒤뜰에 숨어있기로 했다. 해가 중천에 뜨려면 서넛 시간은 남았는데도 기온이 높았다. 에녹은 그늘을 찾아 뒤뜰 가장자리에 선 아름드리나무 아래 몸을 숨겼다. 나무의 두터운 줄기는 아이의 몸을 숨기고도 지름이 다섯 뼘이나 남았다.
이는 에녹으로 하여금 자연히 나무의 나이를 가늠해 보게끔 했다. 원로 목사님에게 듣기론 교회가 세워지기 전부터 나무는 이곳에 있었다고 한다. 교회가 생긴 지 대략 50년은 흘렀다고 했으니, 나무의 나이는 그보다 많이 먹었음이 분명했다.
그래서일까. 에녹은 오늘따라 나무의 광대한 그늘이 두렵게 느껴졌다. 나이도 생김새도 저와 어느 하나 공통점이라곤 없는 이 커다란 존재가 내려다보는 것이 불쾌했고 갑자기 숨이 막혀왔다. 이름도 알지 못하는 나무의 뾰족한 이파리가 후드득 떨어져 자신을 아프게 할 것만 같았다. 작은 돌풍이 일었지만 바람은 에녹의 땀을 식혀주기는커녕 이파리의 스산한 마찰음을 불러내 등골을 더욱 축축하게 만들었다.
지금쯤이면 어른들이 전부 예배당에 들었을 거란 생각에 미치자, 에녹은 급히 걸음을 뗐다.
“김에녹!”
그때 나무 뒤에서 불쑥 튀어나온 형체에 놀라 에녹은 그늘을 벗어나기도 전에 주저앉고 말았다. 눈을 질끈 감은 채 무릎에 얼굴을 묻고 있으려니 등 뒤로 다가오는 발소리가 더욱 선명하게 느껴졌다. 이어 조심스러운 손길이 에녹의 어깨를 두 번 두드렸다.
여전히 공포에 휩싸여있던 에녹은 삐그덕거리며 고개를 돌렸다. 그러고는 의문의 상대를 발견하자마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놀랐잖아!”
임남우였다. 녹림 교회에는 초등학생이 둘 있었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남우였다.
에녹의 조막만 한 주먹이 남우의 왼쪽 어깨를 때렸다. 하지만 두 살의 나이 터울이 헛되지는 않았는지 남우는 아픈 줄도 몰랐다. 그저 두 눈만 끔벅거리며 에녹이 놀란 이유에 대해 곱씹었다.
“너희 부모님께서 널 찾아오라셔. 그보다 뭘 하고 있었길래 그렇게나 깜짝 놀라는 거야?”
“하긴 뭘 해. 그냥...... 그냥 쉬고 있었지.”
“쉬었다고?” 남우는 커다란 고목을 제외하면 별다를 게 없는 뒤뜰을 둘러보았다. “여기에서 말이야? 왜?”
에녹은 입을 꾹 닫았다. 어른들이 아직도 자신을 어린아이 취급하는 게 싫어서 이곳에 숨었다는 말은 절대 할 수 없었다. 특히 남우에게는 더더욱 그랬다.
본디 사람은 터울이 적을수록 그 작은 차이에 집착하여 위계질서를 확실히 하려는 경향이 있다. 증거로 에녹이 초등학교에 입학한 후 어른들은 ― 머리를 쓰다듬는 행동과는 별개로 ― “우리 에녹이가 벌써 다 컸네!”라며 추켜세워 주었다. 반대로 남우에게선 “네가 학교를 갔다고? 에녹이 네가?“하는 다소 무시하는 듯한 발언을 접한 것이었다. 이후로 에녹은 어른들에게 머리 쓰다듬을 ‘당하는’ 모습을 남우에게 들킬 때마다 자존심이 과히 상했다.
이런 에녹의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남우는 대답을 기다리며 그저 생글생글 웃고 있었다. 이미 비뚤어진 에녹의 시선엔 그 천진난만한 얼굴조차 비소를 머금은 악당으로 보였지만 말이다.
저가 나무에 겁먹은 사실 또한 알려지기 전에 에녹은 빨리 이곳을 벗어나야 했다.
“예배 시작했겠다. 어서 가자.”
“잠깐만.”
이미 돌아선 에녹의 손목을 남우가 급히 낚아챘다. 오늘은 여러모로 남우에게서 놀랄 일이 많았다. 경직된 에녹의 어깨 너머로 의외의 제안이 들려왔다.
”가지 말자.“
”가지 말자고? 예배에 참석하지 않겠다는 거야?“
”응.“ 에녹이 설마 하며 던진 물음에도 남우의 대답은 단호했다.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양 으쓱하는 어깨가 뻔뻔해 보였다. “내가 얼마 전에 재미있는 걸 발견했거든. 어때? 같이 보러 갈래?” 도리어 더 흥미로운 미끼를 던지며 에녹의 궁금증을 자극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에녹은 걱정이 먼저 앞섰다. 아버지는 몰라도 필히 어머니께 호되게 야단을 맞을 것이었다.
남우의 경우는 또 어떠한가. 무려 현 녹림 교회 담당 목사의 아들이었다. 교회를 설립한 원로 목사가 지병으로 일찍 은퇴한 후 외아들이었던 남우의 아버지가 목사직을 이어받았다. 현 목사 임요셉은 슬하에 딸과 아들을 각각 하나씩 두었는데, 둘째임에도 불구하고 신도들은 더 어린 남우가 차기 목사님이 될 거라며 벌써 대놓고 기대를 드러냈다.
그런 남우가, 신도들의 기대를 한 몸에 받는 차기 목사님께서 주일을 신성하게 여기라는 주님의 말씀을 이리 쉬이 어겨도 되는 걸까.
“걱정하지 마.” 차기 목사님에겐 초능력이라도 주어지는지 남우는 에녹의 고민을 금세 눈치채곤 안심시키려 했다. “에녹이 너를 찾아다니다 뒷동산에서 길을 잃은 걸 발견했다고 할게. 그리고 우린 돌아가다가 함께 길을 잃은 거야. 괜찮은 계획이지?“
괜찮은 계획이라기보단 괜찮은 거짓말에 더 가까웠지만 에녹은 지적하지 못했다. 남우의 눈이 무언가에 대한 호기심으로 인해 별처럼 반짝거렸기 때문이다. 남우가 보았다는 재미있는 광경은 미지의 세계가 되어 에녹에게도 점점 녹아들었다.
마침, 교회 뒤뜰은 뒷동산으로 연결되는 통로였고 남우의 계획(거짓말)은 제법 일리가 있었다.
“그래. 가보지 뭐.”
에녹의 경쾌한 대답 뒤엔 남우의 어린아이 같은 행동을 지켜볼 수도 있으리란 묘한 승리욕도 내재되어 있었다.
대답이 끝나기가 무섭게 남우는 에녹의 손을 잡아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