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휴대전화에서 평소보다 무게감이 느껴졌다. 평생 뒤에 서서 저가 힘들 때마다 등을 밀어준 부모의 묵직한 사랑 때문일 것이리라. 답은 이 결에 무게를 두었다.
침실의 한쪽 벽면 중앙, 성인 한 사람씩 드나들 수 있는 너비의 문 앞에서 에녹은 멈춰 섰다. 화장실과 드레스룸을 제외하고도 침실에 딸린 작은 공간은 건물을 설계할 때 특별히 주문했을 거란 추측을 불러일으켰다.
대체로 흰 계열의 가구들과 현대적인 감각이 묻어나는 전등, 액자, 조각품이 들어찬 공간에서 거친 질감이 느껴지는 진흙 색의 나무문은 그 이질감이 대단했다. 그건 마치 다른 세계로 ― 필히 먼 과거로 ― 통하는 입구처럼 보이기도 했고, 지금처럼 음습한 새벽빛 아래에선 처형당한 중죄인의 관을 박아 넣어 괘씸한 그의 영혼까지도 치욕을 주겠단 결의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문의 중앙을 세로로 가르는 양각의 직선을 따라 올라가다 보면 에녹의 시선보다 한 뼘 높은, 문의 1/3 지점에 또 다른 양각의 직선이 가로로 지나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 교차점 중앙엔 옷걸이의 머리 부분을 떼다 거꾸로 놓은 듯한 쇠고리가 붙어있었다.
눈에 보이는 쓰임 그대로 에녹은 하얀 가운을 벗어 고리에 걸었다. 채 마르지 않은 낙엽색 머리칼이 가운의 뒷덜미와 앞섶을 적셔 순간 샴푸 향이 공기 중에 퍼졌다. 가운의 흐느적거리는 원단, 소매와 깃을 두른 은사에 밀도 높은 흰 백합 향이 더해지니 가운은 마치 천사의 의전인 양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이는 에녹의 천사 같은 자태도 큰 몫을 했다.
에녹은 아름다웠다. 사실 단 한 순간도 아름답지 않은 적이 없었다. 이 또한 완벽한 삶의 한 조각으로 작용했다. 아직 아침볕이 닿지 못한 그늘 속 에녹의 흰 살결과 연갈색의 눈동자만이 불을 켠 듯 환히 빛났다. 왼쪽 눈 밑과 오른뺨에 새겨진 작은 점은 에녹의 아름다움을 기리는 별자리처럼 보였다. 유연하고 다정한 선들이 쇄골과 윗가슴, 배꼽과 허벅지 사이를 타고 내려와 아킬레스건으로 한데 모이니 자칫 날개가 돋아 하늘로 날아갈까 육신이 그이를 소중히 감싼 모양새였다.
비단 물리적인 요소뿐만이 아니었다. 날 적부터 고아한 눈빛은 해가 거듭될수록 무게를 더해 마주 보는 이로 하여금 그 중압감에 숨이 멎게 했고, 잇새로 내뱉는 음성은 그 자체만으로도 설득력이 있어 가진 것을 전부 내어주고 싶게 했다. 에녹의 주변엔 달큼한 체취에 이끌린 추종자들로 항상 북적였다. 촘촘한 머리통으로 이루어진 파도 속 홀로 선 고고한 바위와 같다고, 이따금 그녀의 연인은 농담을 던지기도 했었다.
고귀한 손길이 문고리에 닿았다. 작은 마찰음이 일며 문이 열렸다. 밤새 고여있던 찬 공기가 가장 먼저 에녹을 맞이했다. 뒷덜미를 장악한 소름은 금세 전신으로 퍼져나가 전완과 정강이를 조였다. 센서 등이 켜졌다. 하지만 따뜻한 전구색의 조명도 어깨로 이는 작은 경련은 막지 못했다.
에녹의 발이 떨어졌다. 편안한 보폭으로 네 걸음 나아간 에녹은 딱딱히 식은 바닥에 허벅지를 세운 채 무릎을 꿇었다. 언젠가부터 침묵이 감도는 휴대전화는 왼 무릎 옆에 놓였다. 전면의 단상은 팔꿈치를 괴어놓기에 알맞은 높이였다. 이 또한 에녹의 신장에 맞춰 제작된 것임을 알 수 있었다.
당연한 수순인 양 에녹은 자연스럽게 양손을 깍지 껴 맞잡고는 고개를 들었다. 올려보는 시선 끝에 십자가 하나가 걸려있었다. 대략 신생아 크기의 십자가는 이토록 공들인 신성한 행위의 목적치고는 작은 편이었다. 게다가 출입문과 같은 거친 나무 재질이었기에 그 소박함이 더했다.
하지만 십자가를 바라보는 에녹의 눈동자는 저 혼자 다른 대상을 담고 있는 듯 보였다. 시선은 가히 태어나 가장 진귀한 존재를 대면한 사람처럼 맹목적이었다. 에녹은 취한 듯 몽롱한 눈빛으로 십자가를 절절하게 쓰다듬었다. 어찌 보면 볼품없는 십자가의 가치는 전부 에녹의 시선에서 기인했다고 볼 수 있었다. 센서 등이 꺼졌다.
에녹은 눈을 감았다.
"오늘도 주님의 어린 양 하루 새 더럽혀진 육신을 깨끗이 씻어내고, 당신 앞에 나와 무릎을 꿇습니다. 주님 감사합니다. 죄악으로 가득한 세상에서 주님을 따를 수 있는 두 발을 주심에 감사합니다. 험난한 삶 속에서 길을 잃어 방황할 때마다 기도할 수 있는 두 손을 주심에 감사합니다.“
마른 입술에 가는 미소가 번졌다.
”주님. 기쁜 소식이 있습니다. 제게 내려주신 재능이 주님의 도움으로 말미암아 큰 빛을 보게 되었습니다. 세상 만물 주님의 뜻대로 흘러갈 터인데, 그 위대하신 계획 속 이 미천한 자에게도 자리를 허락하심에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새하얀 이가 에녹의 환한 낯빛에 반사됐다. 심장을 팽팽하게 만드는 충만을 감당키 어려웠는지 목소리에 점차 떨림이 일었다.
”그리고 또 하나 감사드릴 일이 있습니다. 오래전 주님께서 맺어주신 소중한 인연과의 결실을 앞두고 있습니다. 오늘 그 축복을 공표하여 주님께 배운 사랑의 가치가 모든 이들에게 깨달음을 선사하길 원합니다. 주님...... 도와주시옵소서. 주님의 어린 양, 당신 앞에서는 연약하고 보잘것없는 존재에 불과합니다. 주님의 도움 없인 단 한 순간도 살아갈 수 없음을 압니다. 오늘 새로이 맞이하게 될 축복들이 끝맺음이 아닌 주님의 명성을 빛내는 또 다른 시작이 되게 하시고, 만일 이 죄인이 나태하거나 교만할 시 당신의 채찍질로.......“
점점 속도를 올리는 기도만큼 에녹은 무아지경으로 빠져들었다. 벅차오르는 감정을 이기기 힘들어 숨을 헐떡였다. 잠시 숨을 깊게 고른 후 에녹은 기도를 이어갔다.
“이 어린양 주님의 울타리를 절대 벗어나지 못하도록 엄히 다스려주십시오. 사랑의 아버지...... 우리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아멘.” 휴대전화에서 경건한 호응이 들려왔다. 형곤은 신례의 맞잡은 두 손을 제 손으로 포개었다. 이 전부를 주님의 은혜가 아니면 무어라 표현할 수 있을까. 쉴 새 없이 달싹이던 에녹의 작은 입술과 보송보송한 솜털, 그리고 말랑한 뒤꿈치가 아직도 눈에 선했다. 세 번의 유산. 모두가 안 될 거라 했지만 신례와 형곤은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그저 기도했다.
결국 믿음은 승리했고 주님의 응답으로 태어난 아이에게 ‘김에녹’이란 이름이 주어졌다. 에녹. 땅에서도 하늘에서도, 육신으로도 영혼으로도 영생을 주님과 함께할 아이였다. 그러니 전부 잘될 것이다. 오직 주님 품 안에서 제 딸아이는 축복의 길로 인도될 것이다. 지금껏 그래왔던 것처럼.
“어머니, 아버지. 감사해요. 그럼 갤러리에서 뵈어요.“
전화가 끊어졌다.
하지만 에녹의 무릎은 바로 떨어지지 않았다. 장시간 침묵이 이어졌다. 여전히 십자가에 시선을 고정한 에녹은 저만이 들을 수 있는 은밀한 기도를 마친 후 다시 한번 경건하게 읊조렸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