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푸른 빛이 어스름한 시각, 고상한 멜로디가 새벽의 쌀쌀함을 깨웠다. 찬송가 550장 ‘시온의 영광이 빛나는 아침’에 맞춰 눈을 뜬 에녹은 머리맡을 더듬어가며 휴대전화를 찾았다. 새벽 5시 40분이었다.
제법 이른 시간임에도 에녹은 불평 하나 없이, 되레 반가워 보이는 낯빛으로 몸을 일으켰다. 밤새 잠을 설쳤다고 믿기 힘들 정도로 최상의 컨디션이었다.
그 명료한 정신을 붙들고 잠시 지나온 인생을 되짚어보던 에녹은 크게 감탄했다.
행복한 가정 환경, 타고난 재능, 부와 명성을 전부 갖춘 성공적인 삶....... 완벽한 캔버스 위를 완벽한 색의 물감으로 덧칠해 온 시간이었다.
그리고 오늘은 그 완벽의 정점, 서양화가 김에녹으로서의 첫 개인전이 있는 날이었다. 오픈 행사에 맞춰 오랜 연인과의 결혼 발표까지 예정되어 있었다.
날 때부터 에녹의 손에 쥐어진 금수저를 두고 혹자는 제 처지를 변명하기 위한 기준으로 삼기도 했다.
그러나 비겁한 자들이 애써 외면하는 한 가지가 있었으니 이는 에녹의 지독한 열의였다. 보통의 사람이라면 진작 질식하고도 남았을 기대의 바다에서 에녹은 제 능력을 부표 삼아 여유롭게 유영했다. 그렇게 지금의 자신을 완성했다.
목욕을 마친 에녹이 개운한 얼굴로 욕실을 벗어나는 동시에 휴대전화에서 찬송가가 한 번 더 울려 퍼졌다. 찬송가 305장 ‘나 같은 죄인 살리신’이었다. 이는 기상 알림이 아니었다. 화면 속 발신인을 확인한 에녹은 조금 놀란 눈치였지만 이내 미소를 지으며 전화를 받았다.
“네. 아버지.”
“일어났니, 아가?”
여전히 따뜻했지만, 오늘따라 그 온기에 세월이 묻어나와 에녹은 코끝이 살짝 시큰거렸다. 젖은 머리칼을 털어내던 수건으로 괜스레 얼굴을 쓱 훔쳐냈다. 혹여나 목소리의 떨림이 제 아버지, 형곤에게까지 전달될까 염려되어 에녹은 부러 목청을 높여 답했다.
“물론이죠. 벌써 씻고 나왔어요.”
“역시 우리 딸.” 그 어설픈 연극이 효과가 있었는지 형곤은 제 딸아이의 속울음을 눈치채지 못했다. “혹시 벌써 ‘그곳’에 들른 거니?” 애초 전화를 건 목적만 해결할 뿐이었다.
“아뇨. 이제 곧...... 무슨 일 있으세요?“
“오늘은 우리도 너와 함께하려고 그런다.”
불쑥 튀어나온 어머니 신례의 목소리에 에녹은 영문을 몰라 눈만 끔벅거렸다. “어머니도 옆에 계셨어요? 그런데 같이 어떤.......” 그러다 의중을 알아챈 에녹이 입을 작게 벌렸다. 미처 잇지 못한 말은 신례의 입으로 대신 전해졌다.
“기쁨은 나누면 배가 되어 돌아온다지 않니? 게다가 오늘 같은 기쁨은 네 것만이 아니기도 하고 말이다.”
자식의 기쁨이 곧 부모의 기쁨이리라. 보통의 격언이 담긴 말 한마디일 뿐이었다.
하지만 신례의 대답이 끝나기가 무섭게 뜨거운 눈물방울이 에녹의 두 뺨을 갈랐다. 이 흔하디흔한 대화의 당사자가 자신이기 때문일까. 아니면 평소 무뚝뚝한 제 어머니에게서 나온 말이어서일까. 그 음성 속에 듣는 이의 눈물샘을 자극하는 무언의 힘이라도 숨어있다는 말인가. 그것도 아니라면 오래전부터 앞만 보고 달려온 그간의 노고가 어머니가 지칭한 그 ‘오늘’에서야 비로소 결실을 보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이 모든 추측이 사실일지라도 에녹은 도통 멈추지 않는 눈물의 정확한 경위를 알아내지 못했다. 투명한 유리컵으로 떨어지던 물이 입구에 봉곳이 솟을 만큼 채워지다 결국, 표면을 따라 흐르듯 불쑥 흐느낌이 터져 나왔다. 억누르지 못한 감정은 뒤늦게 신례와 형곤의 귓가로 전해졌다. 에녹이 말을 잇지 못하는 동안 그들은 잠자코 기다려주었다.
어느새 감정을 추스른 에녹은 목덜미가 홧홧했다. 제 부모 앞임에도 불구하고 삼십 대 중반의 나이에 어린아이처럼 눈물을 보였다는 사실이 내심 창피했기 때문이었다. 혹여나 수화기 너머로 신례가 혀를 끌끌 차는 소리라던가, 형곤의 낮은 한숨 소리가 들려올까 싶어 에녹은 귀를 바짝 기울였다.
"우리 아가가 그동안 고생이 많았구나.“
다행히도 형곤의 위로 속엔 먼지만 한 불순물도 끼어있지 않았다. 완벽한 순도로 이루어진 진심에 에녹은 재차 울컥했지만 깊이 숨을 들이켜 가까스로 참아냈다. "고생은요.” 재빨리 본연의 차분함을 되찾고 스스로에게 몰래 환호했다.
"그러면 이제 들어갈게요.“
자리를 옮기기 위해 에녹은 휴대전화를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