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박 7일 상해 여행기
늦은 여름휴가를 가게 되었다. 여름휴가보다는 가을 방학이 더 어울릴 것 같은 이번 여행의 목적은 오로지 '회복'이다. 단순히 회복을 위해서라면 고급 호텔에서 여유를 만끽하며 나에게 보상을 줄 수도 있고, 자연과 가까운 곳으로 가 지친 심신을 달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번 여행은 무뎌진 감각을 회복하고 싶었다. 매일 똑같은 풍경, 똑같은 사람들에게서 벗어나 다양한 감각적 자극을 만나는 것을 이번 여행의 목표로 삼았고, 그런 이유로 이번 여행지는 상해가 되었다.
상해로 여행지를 정한 이유는 올해부터 중국 무비자 여행이 가능해져서인지 유독 상해 여행이 알고리즘에 많이 뜬 영향도 있지만, 십 년 전 별 기대 없이 처음 상해에 갔을 때 당시 가장 트렌디하다는 신천지를 가보고 처음으로 어떤 위기감 같은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당시 신천지에서 본 감각적인 매장과 디스플레이는 이미 강남의 고급 백화점 거리보다 더 앞서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십 년이 지난 지금은 상해를 기반으로 하는 로컬 브랜드의 입지도 커졌고, 어느새 상해라는 도시는 감각적이고 트렌디한 브랜드의 거대한 실험실이 되어 있었으니 다시 가볼 만한 이유는 충분했다.
상해는 보통 3박 4일로 많이 가는 여행지이지만 이번 여행은 특별히 6박 7일로 잡았다. 동방명주, 와이탄, 예원, 티엔즈팡, 우캉루 등 꽤 굵직한 관광지를 모두 보면서 맛집 투어까지 하기 위해서는 3박 4일 일정을 꽉꽉 채워 부지런히 다녀야 하기 때문이다. 경험컨대, 이런 경우 높은 확률로 회복을 위한 여행보다는 관광이 되기 쉽다. 20대 때의 여행은 길어야 3박 4일이었기 때문에 분 단위로 촘촘히 짜 놓은 계획표에는 현지의 바이브나 여행지의 여유 같은 것들이 낄 틈이 없었다. 그래서인지 직장인이 된 요즘은 원기옥을 모아 황금 같은 휴가를 한 번에 몰아 쓰더라도 일주일 정도 한 나라에 머무는 여행을 선호하게 되었다.
이번 여행은 감각을 회복하는 여행이 컨셉인만큼 느린 호흡으로 여행을 하기로 했다. 그래서 빼곡한 계획이나 필수 코스 대신 딱 3가지 원칙만 세웠다.
1. 좋았던 순간을 상세하게 기록한다. 눈으로 사진을 찍듯 그 장면을 글로 기록한다.
2. 인증샷에 연연하지 않는다. 한번 보고 말 수천 장의 사진보다는 나에게 울림을 주거나 감각적으로 동요를 일으켰던 장면만 사진을 찍는다.
3. 평소라면 하지 않았을 과감한 도전을 하나 해본다. 튀는 옷 입기, 여행지에서 머리 잘라보기와 같은.
관광객 모드가 아닌 조금 느린 호흡으로 여행을 하다 보면 4일째부터 서서히 도시에 대한 감상이 생기기 시작한다. 더 이상 동방명주를 보고도 감탄사가 나오지 않을 때쯤 이 도시를 구성하는 요소들에 대해 찬찬히 생각해 보게 되는 것이다. 빡빡한 3박 4일 일정이었으면 알지 못했을 것들-이를테면 사람들의 표정과 옷차림, 자주 보이는 카페 체인- 등에 조금씩 눈길이 가기 시작한다. 관찰한 것을 모두 강박적으로 기록할 필요는 없지만 몇 번 비슷한 감상이 겹치면 메모장에 기록해 두고 인상적인 장면은 사진으로 찍어둔다. 아래는 내가 이번 여행 중에 기록한 것들이다.
- 중국 사람들은 빨간색을 좋아한다는 것이 사실인지 유난히 길거리에 빨간 옷을 입은 사람이 많다. 유난인가 싶었는데 한국에서는 튀어서 잘 들지 않았던 빨간 가방을 챙겨 오길 잘했다.
- 카페만큼이나 젤라또를 파는 체인이 유독 많이 보인다. 빵이 나오는 시간이 정해져 있는 건 많이 봤지만 젤라또 나오는 시간이 정해져 있는 것이 신기하다.
- 모든 것이 핸드폰 하나로 가능하다 보니 메뉴판조차 큐알코드로 봐야 하는 곳도 있다. 편리함이 과하면 외지인에게는 불편한 경험이 될 수도 있겠다.
- 기본적인 서비스 수준이 높다. 인건비가 저렴해서 그런지 인기 체인들은 서비스 경쟁이 엄청나다. 한 양꼬치집은 웨이팅 시간 동안 심심하지 말라고 팝콘과 따뜻한 차를 제공하고, 아예 바둑판을 매장 앞에 두었다.
현지의 감각적인 분위기를 느끼고 싶은 사람들을 위해 추천하고 싶은 것은 꼭 숙박을 하지 않더라도 시내에 있는 고급 호텔에 가보는 것이다. 나는 항상 여행 첫날이나 마지막 날에 도시 전경을 볼 수 있는 호텔 바를 방문하여 칵테일을 마신다. 호텔은 도시의 상징과 심상을 가장 현대적이고 럭셔리하게 해석한 곳이므로 전문가들이 이 도시의 심상을 치열하게 고민한 결과물을 볼 수 있다면 2-3만 원의 칵테일 정도는 기꺼이 감상료로 낼 수 있다.
비가 세차게 내렸던 십 년 전과 마찬가지로 상해의 하늘이 해를 쉬이 내어주지 않은 탓에 이번 여행 일정 내내 흐린 날이 지속되었다. 상해의 맑은 날을 보지 못한 것은 아쉽지만 그 덕에 상해에 대한 심상은 오히려 뚜렷해졌다. 형형색색의 동방 명주와 빨간색 옷을 입은 사람들 위로 뿌연 먼지 필터가 한 겹 겹쳐있는 것 같은 묘한 분위기. 전통적이지만 현대적이고, 서구적이지만 지극히 동양적인 세계관의 공존. 이는 아마 상해만이 가진 고유의 심상일 것이다.
그러니 매일 보는 풍경에 질렸다면, 한 번쯤은 감각을 회복하는 여행을 떠나보기 바란다. 세상에는 내가 모르는 곳이 참 많다는 감상과 사람 사는 곳은 어디나 비슷하다는 감상을 동시에 얻는 다소 이상한 결론에 도달하더라도,
일상으로 복귀했을 때 그 감상들이 세상을 더 촘촘하게 감각할 수 있게
한다는 것만큼은 분명할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