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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준 Jun 01. 2020

'후회'라는 감정에 관하여

서른 이후 세 번의 여행을 다녀오고 나서.

2018년 유럽여행 중, 센강 유람선 위에서 찍은 에펠탑



이십 대의 내가 해외여행을 하는 장면을 상상한다.
세상 물정 모르는 갓 소녀티를 벗은 스무 살의 내가 낯선 이국의 도시를 헤매는 장면을, 학점을 따고 스펙을 쌓다 졸업 한 학기를 앞두고 떠난 타지에서 서툰 영어로 눈이 파란 친구들을 사귀며 새로운 넓은 세상에 설레어 하는 모습을, 차곡차곡 모은 연차를 채워 떠난 소중한 여행에서 일상에서 쌓인 숨을 돌리며 환히 웃는 모습을.





서른한 살 때 처음 해외여행을 갔다. 그리고 서른셋에 신혼여행, 서른넷에 또 한 번의 해외여행, 총 세 번의 해외여행을 다녀왔다. 마지막 여행을 다녀온 지 2년이 다 되어 가지만 여전히 여행 생각이 많이 난다.

일상을 살다가도 문득 문득 그때를 떠올리면 묘한 힘이 날만큼 서른 넘어 경험한 여행의 기억들은 다, 너무 좋았다. 하마터면 비행기를 놓칠뻔한 기억도, 방콕의 한 거리에서 휴대폰을 잃어버릴 뻔한 기억까지도, 모두 다.


이상하게 나는 그 즐거웠던 여행을 하는 순간 순간마다 사랑하는 이들 뿐 아니라 다름 아닌 이십대의 내가 눈에 자꾸 밟혔다.


 그때도 막연하게 여행을 동경했고 어디로든 떠나고픈 마음이야 늘 있었지만 당시의 내겐 여행보다 생활이 늘 우선순위가 되곤 했었다. 조금 더 여유와 안정을 찾은 후에 좀 더 온전히 여행에만 집중 할 수 있을 때, 모든 조건들이 거의 완벽하게 합쳐졌을 때, 떠나고 싶었다.


 '영어를 잘하게 되면,(영어는 그 때나 지금이나 비슷하다) 돈을 모으게 되면..(돈이란 건 늘 풍족하지 않다)' 이런 생각들이 컸던 내게 자연스럽게 여행은 우선순위에서 밀리곤 했다.


 이십대의 나는.. 늘 등록금, 생활비 걱정으로 알바하며 대학생활을 보냈고,  졸업 후엔 학자금대출 갚느라 무의식적으로 몇 백만 원씩 드는 해외여행 같은 건 늘 마음 뒤켠에 두고 살았던 것 같다.
 또 어릴 때 다친 불편한 무릎도 멀리 떠나는 여행에 있어 심적인 부담으로 다가오기도 했고, 낯선 걸 경험하기보다는 익숙한 것을 좋아하고 바깥의 세상보다는 내 안의 세계에 더 관심이 많았던 내 20대의 성향도 한몫했을 것이다. 돈과 시간과 언어, 안정 .. 모든 게 갖춰진 상태에서 여행을 가려했던 내 완벽주의 성향 또한.
 결국 난 최소의 조건으로 최대의 효과를 바라는, 여행에 있어서도 가성비를 따지는 사람이었다.



2015년 방콕여행 중, 왓아룬 근처 거리의 풍경



겪어 보지 않은 것들은 때론 미련을, 후회를 남긴다.
 그때는 보이지 않았던 것, 느끼지 못한 것들을 지금은 보고, 느낄 수 있다. '완벽한 상태' 같은 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도 안다.
여유가 없으면 없는 대로 떠났어도 있는 그대로 또 느끼는 것들이  많았을 텐데. 어쩌면 떠난 그 곳에서 새로운 ‘여유’를 만날 수도 있었을 텐데.
 조금이라도 젊을 때 더 많은 경험을 하고 더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낯선 곳에 놓인 내 모습을 조금 더 많이 지켜볼 수 있었더라면. 내 삶이 크게 달라지진 않더라도 경험의 크기만큼 세상을 바라보는, 또 스스로를 바라보는 내 맘도 좀 더 넉넉해졌을 것만 같아서.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갈 수 있다면 조금은 무리를 하더라도 틈이 나는 대로 배낭을 메고 훌쩍 훌쩍 떠나고만 싶다. 돈도, 눈 앞의 생활도 당시엔 커보였고 버거웠다는 걸 모르진 않지만 그럼에도 조금 더 나라는 사람이 덜 무르익었을 때, 마음이 조금 더 말랑말랑할 때, 그 시절 어린 나에게 최대한 새로운 많은 경험들을 선물해주고 싶은 마음 또한 크다. 새로운 곳에서 여러 경험을 하는 것만큼 인생의 좋은 자극제가 드물다는 걸 그때의 나는 알지 못했다.


서투르고 준비가 되지 않았다고 떠나지 않았던 이십대의 나, 서투르고 완벽하지 않기에 그때 떠났어야했다고 생각하는 삼십대 지금의 나. 똑같은 상황을 다르게 보는 나. 참 묘하다.



후회라는 감정은 얄궂기에, 그 감정에 빠져 허우적대기엔 과거의 내게 미안한 맘 밖에 남지 않음을 안다. 그 때의 어린 나는.. 그 나름으로 일상을 최선으로 살았다는 걸 아니까. 하루 하루를 살아내느라 매일 버거워졌던 그 마음들을 누구보다 잘 아니까.


그만큼.. 싫어하는 '후회'라는 단어가 생각날만큼 여행의 경험들이 너무 좋았다는 걸 말하고 싶은건가보다.



눈에 보이는 많은 것들을 채우고, 가지며 살고 싶다가도 결국은 경험하고 느끼는 데에 시간과 돈을 쓰는 것을 더 좋아하는 나를 본다.


유형의 어떠한 남는 것은 없어 보이지만, 마음에 기억에 오래도록 남아 묘한 자국을 남기고 가는, 때로는 생각지도 못한 힘을 나게 하기도 하는,
나는 이 '여행'을 남은 삶 동안이나마 자주 떠나며 살아가려 한다.

과거의 내가 못했던 것들을 후회하는 대신 앞으로의 내가 대신 많이 많이, 경험해주고 싶다.




2018년 여행에서,  황홀했던 이탈리아 베네치아의 야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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