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위가 그리워지는 순간
2월 중순의 한국은 겨울이다. 입춘이 지났지만 기온이 영하로 내려가는 날이 잦고, 오늘만 해도 강릉엔 엄청난 폭설이 내렸다. 카페에 오는 길에 롱패딩을 입은 사람들을 많이 마주쳤다. 아직은 기모가 들어간 내의를 입어야 하고, 찬바람에 쉽게 차가워지는 청바지도 피해야 한다. 아직은 겨울이다.
그래서일까? 겨울이 길다고 느껴지니 몇 발자국만 걸어도 땀이 흐르는 발리가 그리워졌다. 구름 한 점 없는 발리 하늘 아래에는 땅부터 사람들의 몸까지 뜨거운 것 투성이었지만 그곳이 그리워졌다. 사실 난 발리에 있을 때에도 추운 것보다 더운 게 낫다고 말했었다. "왜?"냐고 묻기에 심플하게 대답했다. "추우면 손이 얼어서 폰을 못 만지잖아." 제법 스마트폰 중독자다운 대답이었다고 생각한다.
기억이 미화되면 추억이 된다고 한다. 그럼 나는 발리를 미화시키는 걸까? 발리 여행을 후회한 적은 없다. 기대가 컸을 뿐이다. 그래서 분명 다음 휴가는 '발리를 제외한 곳'으로 정했는데, 이러다가 '발리도 괜찮지 않을까?' 하고 생각할 것 같다. 물가 차이가 별로 안 났을 뿐이지 수영장 딸린 숙소치고는 저렴했으니까. 말이 좀 안 통했을 뿐이지 '뜨리마까시(감사합니다)'로 통했으니까. 걷지 않고 바이크를 타고 다니면 다닐만했으니까.... 응?
여행지는 두 가지로 나뉘는 것 같다. 또 가고 싶은 곳과 두 번 다시 가지 않을 곳. 발리는 후자에 가까웠다. 애초에 휴양지를 좋아하는 편이 아닌 게 컸고, 발리 외에도 휴양지가 많고, 비행편이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직 태국이나 베트남 같은 대표적인 휴양지에 가보지 않아서 이왕 갈 거면 다른 곳에 가는 게 낫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리고 비행편은, 발리를 직항으로 갈 경우 7시간이 걸린다. 직항으로 운행하는 항공사도 많지 않기 때문에(아마 대한항공과 가루다 두 곳뿐이지 않을까) 선택지가 별로 없다. 그래서 스케줄이 안 맞는 사람들은 직항을 포기하고 경유로 다른 나라에 하루 들렀다 가기도 한다.
그런데 이런 단점치고 발리를 인생 여행지로 꼽는 사람이 많다. 또 가고 싶은 여행지에 발리가 꼭 있다. 있는 정도가 아니라 여러 번 들어간다. 나랑 같은 곳에 간 게 맞나? 내가 발리에 있을 땐 한국사람들이 별로 없었는데? 발리에서 사람을 풀어 여론을 조작한 건가? 이렇게까지 부정할 필요는 없는데 발리가 날 이렇게 만들었다. 이건 분명히 나를 발리로 또 보내려는 어떤 조직의 힘이다. 그래서 내 눈엔 지금 발리에 대한 미화렌즈가 들어와 있는 것이다.
발리 여행 미화로 한국에서 빈땅을 구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발리에서 돌아오기 전에 지인 기념품 겸 날 위한 선물로 빈땅 래들러를 사오려고 했다. 빈땅 마켓에서 병으로 된 빈땅을 저렴하게 팔아서 사려고 했는데, 여행 마지막날에 정신이 없던 탓에 공항에 갈 때까지 내 손에 빈땅이 없었다. 급하게 면세점과 출국장 편의점에서 캔 빈땅을 구했지만 만족하지 못했다. 한국에 오자마자 빈땅을 검색했지만 몇 년 전 편의점에서 팔았었다는 것 말고는 소식이 없었다. 나는 이때 포기했는데, 친구는 아니었다. 한국인의 의지로 친구가 거래하는 주류회사 포함 몇 개의 주류회사에 전화를 돌렸고, 결국 받긴 했지만... 아쉽게도 래들러는 없었다. 기본 빈땅만 두 박스 받았다고 한다.
솔직히 우리나라에 있는 레몬맛 맥주랑 빈땅 래들러와 큰 차이점은 없을 것이다. 차이점은 분위기지. 여행가서 마셨던 맥주와 그냥 살고 있는 이곳에서 마시는 맥주 맛이 같을 리가. 비록 기본 맛이지만 발리의 추억을 떠오르게 해주는 빈땅을 받게 될 생각에 심장이 뛴다(심장은 원래 뛰지만). 친구한테 일단은 아껴 마시라고 했다. 내가 한 박스, 친구 한 박스씩 나눌 예정이지만 이렇게 추운 날 마시기엔 아쉽다. 날씨가 더워질 즈음에 함께 캠핑에 가서 발리 여행기도 풀고, 빈땅을 마시며 기분도 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