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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건빵 Jan 13. 2017

낯선 천장 그리고 낯선 세계

2009년 국토종단 5 -  4월 21일(화)

어제 비를 맞으며 왔기 때문인지, 아니면 도보여행 첫날의 고단함 때문인지 밖에서 밥을 사먹고 들어오자마자 거의 실신하듯이 잠에 들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푹 잤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몸은 피곤한데, 그래서 정신은 흐리멍덩한데도 잠을 설쳤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여관이란 낯선 곳에서 잠을 잔다는 게 무의식 속에선 꽤나 나를 짓누르고 있었던가 보다.                



▲ 국토종단 2일차 여정이 시작되었다. 어젠 빗길 여행이었다면, 오늘은 어떤 여행일까?




에반게리온에 나온 낯선 천장의 속뜻 

    

아침에 눈을 떴을 땐 문뜩 쓸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눈을 뜨니 전혀 낯선 천장이 보였고 순간적으로 ‘내가 왜 여기에 있는 거지?’라고 생각했다. 

『에반게리온』이란 애니메이션에서 신지는 낯선 곳에서 눈을 뜰 때면 “낯선 천장”이라 혼잣말을 하곤 했다. 그 당시에 그런 대사를 들을 때면 그냥 상황을 묘사하는 것이라고만 생각했기에, 별다른 감흥이 없었다. 그런데 오늘 아침에 막상 일어나보니, 신지가 되뇌던 “낯선 천장”이란 말이 꽤나 의미심장하면서도 절실한 말로 느껴지더라. 꿈속에선 여태껏 간절히 바라왔던 이상이 현실이 되기도 하고, 간절히 보고 싶던 사람을 만날 수 있기도 한다. 막상 꿈을 꿀 땐 그게 꿈인 줄 모르기에, 그저 일상처럼, 그저 현실처럼 담담하게 받아들이고 덤덤하게 스쳐 지낼 뿐이다. 그러다 막상 꿈에서 깨는 이카루스가 태양을 향한 열정으로 태양 가까이에 갔다가 일순간에 떨어진 것처럼, 그 모든 게 일순간에 사라지며 비루한 현실로 눈앞에 펼쳐져 있다. 그때 느껴지는 착잡함과 아쉬움이야말로 쓸쓸하다고 느껴지는 정체이며, 신지가 “낯선 천장”이라 말한 본질이 아닐까. 더욱이 늘 있던 자리가 아닌 완전히 새로운 자리에서 느껴지는 생소함까지 곁들어지니 그런 감정은 더욱 극대화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 신지는 자신의 생각과 다른 현실이 펼쳐질 때마다, 같은 말을 되뇐다.



그런 느낌 때문에 어렸을 적엔 낮잠을 한참 자고 난 후에 일어나면 울곤 했었다. 그 넓은 방에 혼자만 덩그러니 남아 있다는 게 두려웠고, 말론 할 수 없는 쓸쓸함이 사무쳐와 괴로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은 더 이상 울진 않는다. 익숙해졌기 때문인지 아니면 미란 누나 말처럼 ‘인생은 어차피 혼자’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인지는 알 수 없다. 그럼에도 순간순간 이렇게 고개를 치켜드는 외로움은 어떻게 할 수가 없다. 이건 이성의 문제가 아닌 감성의 문제이며, 누구나 느껴야 하는 정감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럴 땐 한참동안 천장을 응시하며 멍하니 있다가 정신이 돌아올 때쯤 서서히 일어나면 된다. 고독은 잠시, 방황은 길게~ ‘낯선 천장’이라는 표현은 ‘현실에 대한 재인식’과 ‘자신에 대한 재인식’을 담고 있는 말이었던 셈이다.                



▲ 어슴푸레한 새벽녘 길을 거닐 때, 안개 낀 거릴 지날 때 난 상념에 빠져든다. 이 날 아침도 그랬다.




비 오는 날 즐겁게 도보여행을 할 수 있는 방법

     

6시 반에 일어났다. 방에 널어놓았던 짐들을 부랴부랴 챙긴다. 다행히도 방이 따뜻했기 때문인지 젖은 짐들은 거의 다 말랐더라. 그럼에도 배낭은 아직 덜 말라 여전히 눅눅한 상태였다. 어제 저녁에 신문지를 여기저기에 끼워놓고 습기 제거를 했음에도 역부족이었다. 

어제의 빗길 도보여행은 여태껏 한 번도 누려보지 못한 묘한 해방감을 안겨줬다. 초반엔 옷이나 배낭이 젖지나 않을까 긴장하며 누리지 못하다가 1시간 정도 걸어본 후에 젖지 않는 것을 알게 되자 맘껏 누릴 수 있었다. 

하지만 배낭 안에 들어있던 짐들은 달랐다. 배낭에 방수커버를 씌웠다는 것만 믿고 그냥 갔더니, 배낭 안으로 빗물이 제법 들어갔기 때문이다. 그래도 다행인 점은 여행기를 적을 노트나, 책이 그렇게 많이 젖진 않았다는 점이다. 이런 경험을 통해 알게 된 사실은 비가 올 땐 배낭에 방수커버도 씌우지만, 이와는 별도로 짐들도 비닐로 싸둬야 한다는 사실이다. 큰 비닐을 준비하여 모든 짐들을 한 번에 넣는 것도 좋지만, 그보다는 비닐봉투 여러 개를 준비하여 옷은 옷대로, 책은 책대로 분류하여 싸서 다니면 짐 관리하기도 편하고 비가 오더라도 전혀 걱정할 게 없다. 어제 경험을 통해 이런 깨달음을 얻었으니, 이젠 더 이상 비가 온다고 해도 하나도 겁나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비가 오는 날이 은근히 기다려진다. 그런 날엔 비와 한껏 어우러져 맘껏 즐기며 걸어야지.                



▲ 이날 경험으로 비닐봉투에 넣어 가지고 다니게 됐고, 저녁에 잘 땐 빼놓게 됐다. 그래야 다들 말라간다.




날씨의 변덕스러움보다 더 큰 마음의 간사함

     

일기예보 상으론 오늘까지 비가 온다고 되어 있었다. 그러니 걱정이 될 수밖에 없었다. 신발이나 배낭도 어느 정도 간신히 말렸는데, 오늘까지 비가 많이 내리면 어제보다 더 금방 젖을 테니 말이다. 

그런데 막상 출발하려 밖에 나와서 날씨를 보니 비는 오지 않고 하늘에 구름만 낀 채 바람만 선선히 불고 있었다. 바로 이런 날씨가 어제 아침에 기대했던 날씨다. 해는 구름에 가려져 약간 어둑어둑하고 선선한 바람이 불어 기분을 상쾌하게 해주는 날씨 말이다. 어젠 기대했다가 퇴짜를 맞았고, 오늘은 전혀 기대도 하지 않았는데 이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이루어졌다. 그러니 전혀 생각도 못한 선물을 갑작스레 받은 마냥 기분이 매우 좋더라. 아무래도 이런 상황에선 날씨의 변덕스러움(?)보다 내 마음의 간사함에 더 눈이 간다. 어찌 보면 어제 실망했던 탓에 오늘은 더 기뻐할 수 있는 것이니 말이다. 날씨에 따라 변덕스럽게 바뀌는 내 마음을 느끼며 짐을 챙겨 여관을 나선다. 



▲ 구름은 껴있지만, 더 이상 비는 오지 않을 것 같은 날씨다. 또 새로운 기분으로 여행할 수 있는 날이 밝은 거다.



김밥 두 줄을 사고 무작정 걷기 시작했다. 오늘 목표는 영광(40.61km)까지다. 애초에 함평까지만 가려 했는데 12.76km로 4시간 정도 걸으면 충분히 갈 수 있는 거리로 매우 짧은 편이어서 좀 더 무리를 하기로 했다. 더욱이 내일은 수요일이다. 시간에 맞춰 신림에 도착할 수 있다면 오랜만에 교인들도 만나고 예배도 드리며 편하게 잠도 잘 수 있다. 그러니 서두를 수 있을 때 서둘러야 한다. 과연 이게 만용인지, 여행을 시작하는 사람의 의욕인지는 오늘 내일을 경험해봐야만 안다. 

갈 길이 먼 데도 아직까지도 지도 보는 게 매우 서툴다. 지도상으로는 꽤 멀다고만 느껴졌는데 그게 현실에선 어떤지 전혀 감이 안 오니 말이다. 거리감뿐만 아니라 방향감도 없다. 그래서 지도를 보며 현실이 제대로 인식될 때까지는 어쩔 수 없이 국도를 따라 걷기로 했다. 선지식이 아닌, 직접 몸으로 부딪히고 경험하며 지식을 쌓을 차례다. 



▲  일반적으로 한 시간에 4km를 걷는다고 한다. 그렇다면 단순 계산으로도 10시간을 걸어야 한다. 과연 가능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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