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국토종단 7 - 4월 22일(수)
밤새 뒤척였다. 어제 무리하며 걸은 탓에 몸도 쑤시고 발바닥도 욱신거렸다. 몸이 고되니 누우면 바로 잠이 올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잠은 오지 않고 정신만 더 멀쩡해져서 억지로 자려고 뒤척일 수밖에 없었다. 이것 또한 하나의 좋은 경험이다. 이제부턴 아무리 피곤하다고 해도 족욕도 하고 스트레칭도 충분히 한 후에 자야한다는 사실을 알았으니 말이다. 맛난 잠을 자기 위해서도 준비가 필요한 법이다.
오늘은 고창까지 걸어간다. 전주에서 초중고를 모두 나오고 대학까지도 다녔던 나에게 고창은 미지의 세계,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그런데 2006년에 교생실습을 하면서 한층 가까워진 곳이 됐다.
교생실습을 나갈 학교는 대학교에서 정해주는 게 아니라, 자신이 직접 정해야 한다. 직접 전화를 학교에 걸어 교생실습이 가능한지를 묻고, 그곳에 나가면 되는 것이다. 그러니 보통은 자기가 사는 곳 근처의 학교를 정하려 하게 마련이다. 그래서 가장 쉬운 방법은 모교에 전화를 하는 것이다. 아무래도 자신이 졸업한 학교이기 때문에 편하게 말해볼 수 있고, 그럴 때 특별한 사정이 아니면 모두 받아들여주기 때문이다.
하지만 난 그러고 싶지 않았었다. 전주에서만 26년간 살아왔고, 고작 군대에 있던 2년 동안만 벗어나 봤으니 말이다. 군대에 가기 전에 혜경이 누나에게 “군대는 웬만하면 전방으로 가고 싶어요”라고 말했던 이유도, 한곳에서만 징하게 살아왔기 때문에 그런 이유로라도 떠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운 좋게도(?) 군대는 정말 전방으로 배정을 받아 전주를 잠시 떠나 있을 수 있었다.
어찌 보면 내 안엔 ‘좀 더 많은 곳을 다녀보고 싶다’는 욕망이 늘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그런 욕망은 늘 두려움과 용기 때문에 묻힐 수밖에 없었다. 늘 있던 자리를 떠날 때엔 용기가 필요한 법이고, 미지의 세계를 긍정할 수 있는 마음이 필요한 법인데, 난 그러지 못했다. 그래서 늘 그 자리에 우두커니 있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막상 도보여행을 떠난 지금 생각해보면 대학교마저 전주로 정한 것이 가장 후회가 된다. 물론 전주대 한문교육과에 와서 수많은 인연들을 만났고 다양한 삶의 가능성을 엿볼 수 있었지만, 다른 학교에 갔다고 해도 새로운 인연들이 엮이게 되었을 테니 말이다. 그런데 그땐 대학교에 들어가는 것도 무리였고, 당연히 돈이 없단 생각에 자취는 꿈조차 꾸지 못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만약 내가 의지가 있어서 전주를 벗어났다면, 그에 방법도 생기지 않았을까.
만약 지금 다시 19살의 그 때로 돌아갈 수 있다면, 원광대 한문교육과나 공주대 한문교육과를 지원할 것이다. 그리고 될 수 있다면 원광대보단 공주대로 가고 싶다. 익산은 전주에서 가깝기에 버스로 통학해야 할 상황이지만, 공주는 어떻게든 자취를 해야 하니 말이다. 그렇게 됐다면 조금 더 삶의 방향이 넓어졌을 것이고, 지금과는 약간이라도 다른 삶을 살게 됐을 것이다.
아마도 그런 마음이 있었기 때문에 교생실습을 나갈 학교를 알아볼 때에도 작용했던 것이다. 그래서 2005년에 합창동아리 때문에 인연을 맺은 고창 신림교회 목사님에게 다짜고짜 전화를 걸어 “목사님 제가 이번에 고창으로 교생실습을 나가게 될 수도 있는데, 그럴 때 교회에서 자고 먹는 게 가능할까요?”라는 맹랑한 질문을 던질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자 목사님은 “그건 교회의 일이니 성도님들과 상의한 후에 알려드릴게요”라고 답해줬고, 머지않아 그렇게 해도 된다는 것을 알려줬다. 우선 자는 문제가 해결되고 난 후에, 고창 신림중학교에 전화를 걸어 교생실습이 가능한지 물어보니, 거긴 도덕 교사가 한문을 가르치기에 좀 문제는 있지만, 그럼에도 실습은 괜찮다고 하더라. 생각 이상으로 일사천리로 해결되어 나는 고창에서 교생실습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교생실습을 하는 3주간은 정말 눈 깜빡할 새에 지나갔고 그 시간을 통해 ‘꼭 교사가 되고 싶다’는 마음을 다잡을 수 있었다. 누군가는 교생실습을 하면서 막상 현장에서 느끼고 나면 교사가 되고 싶다는 생각이 사라진다는 말도 하던데, 난 정확히 그 반대였다. 『죽은 시인의 사회』에 나오는 키팅 선생과 같이 학생들이 모두 존경하고 따르려 하는 이상은 결코 이루어질 수 없지만, 그럼에도 아이들과 부딪히고 무언가를 함께 해나가는 그 느낌이 좋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시간에 교회 사람들과도 훨씬 더 많이 친해질 수 있었다. 웬만하면 새벽기도에 빠지지 않으려 했고, 수요예배나 금요 기도회에도 함께 하려 하며 사람들과 더 많은 얘기를 나눌 수 있었으니 말이다.
그렇기에 3주라는 이 시기는 나에겐 인간관계를 넓히고 배움에 대해 좀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시기였던 셈이다. 그래서 고창은 어느새 제2의 고향이 되었고, 왠지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푸근한 곳이 되었다.
그런 곳을 3년 만에 다시 찾아가려 한다. 그땐 그래도 예비교사라는 신분으로 있었다면, 지금은 그저 도보여행자로 찾아가는 것이다. 더욱이 오늘은 수요일이라 예배가 있는 날이기도 하다. 시간에 맞춰 갈 수 있다면 맘 편안하게 예배를 드리며 오랜만에 교회 사람들과도 어울릴 수 있을 것이다. 지금은 그때와는 다르게 기독교인이 아니다 보니, 예배를 드리고 싶다기보다 반가운 얼굴들을 보고 싶다고 하는 게 맞을 것이다. 그러려면 오늘 정말 맹렬하게 걸어야만 한다.
그래서 영광을 떠날 때 교생실습 때 만난 아이들에게 고창에 간다고 문자를 보냈다. 그땐 중학교 1학년이었던 아이들이 그새 시간이 흘러 고등학생이 되었다. 나만 봐서는 그렇게 시간이 빠른지 느끼지 못하다가도 아이들을 보면 느껴진다. 아이들은 한 살 한 살 먹을 때마다 달라지며, 특히 왕성하게 변하는 청소년 시기엔 어제 다르고 오늘 다르기 때문이다. 그런 아이들을 볼 때 나의 시간도 그만큼 흘렀다는 것이 비로소 인지되는 거다. 그래도 교생실습을 마친 3년 동안 꾸준히 서로 소식을 전하고 있었기에 이런 문자를 보내는 것도 가능했던 것이다.
아이들은 평일에 오는 것에 대해 많이 아쉬워했다. 야간자율학습 때문에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 때도 있었던 말만 좋은 자율학습은 여전히 아이들에게도 강제사항으로 남아 있었나 보다. 고창에 간 김에 얼굴이라도 잠시 볼 수 있었으면 했는데, 상황이 그렇게 되니 많이 아쉽더라. 그래도 막상 이런 문자를 주고받으니 설렘도 커졌고, 그리움도 자랐다. 3년 전엔 교사와 학생이란 전혀 다른 신분으로 만났지만, 지금은 어느새 인생을 함께 살아가는 동지로 만나게 된 것이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