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강상중 강연
강상중쌤에 대해 그렇게 잘 알지는 못한다. 언젠가 『고민하는 힘』이란 책을 읽었었는데, 그다지 감흥을 받지 못한 기억만이 난다. 그러다 우연하게 페이스북에서 강상중쌤의 강의가 있다는 걸 알게 됐고, ‘막상 현장에서 들어보면 어떨까?’하는 궁금증이 생겨났다. 아무래도 육성으로 듣는 거라면 충분히 다를 수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강의의 제목이 ‘나를 지키며 일하는 법’이라지 않은가(물론 이번에 나온 책의 제목일 뿐이지만). 지난번에 썼던 ‘민들레 후기’에서 “일이 성취감을 주고 자존감을 높여주기도 하지만, 그게 너무 과하면 ‘내가 일만 하기 위해 태어난 것인가?’ 헛갈리기도 한다.”라고 썼듯이, 일은 더 이상 ‘자아실현’이 아닌 ‘자기 파괴’에까지 이르게 된지도 오래됐다. 이런 현실에서 과연 강상중쌤은 어떤 말씀을 하실까?
강단에 선 강상중쌤은 재일교포 2세라며 자신을 소개했고 “저는 반쪽바리입니다”라는 말로 좌중에 웃음을 유발했다. 참고로 이 책은 NHK에서 했던 강연 내용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책이라고 한다.
사회자는 “『오리엔탈리즘을 넘어서』가 번역된 지 20주년이 됐고, 『고민하는 힘』을 통해 선생님이 알려진 지도 벌써 10년이 되었습니다. 우린 자본주의라는 풍요로운 시대를 살아가고 있지만, 삶은 풍요에 비해 고통스럽고 늘 고민에 가득 차 있습니다. 그러니 선생님의 책을 통해 그런 현실에서 깊은 성찰할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라는 말로 강상중쌤에 대한 소개와 함께 이번 강연회가 갖는 의미에 대해 설명을 했다.
강의는 사회가 질문을 던지면 강상중쌤이 거기에 대해 답변을 하는 형식으로 진행됐다. 아래부턴 그때의 강의를 듣고 정리한 내용으로 나의 사담은 붙이지 않는다. 만약 나중에 시간이 난다면 후기를 쓰며 나의 이야기로 풀어보도록 하겠다.
질문
‘일’이 책의 제목으로 등장했을 때 마침내 올 게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동화가 육체노동에 문제점으로 떠올랐지만, ‘알파고’와 같은 최첨단 기술이 등장하며 육체노동뿐만 아니라, 이미 정신노동에까지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이 책에서 학력사회가 붕괴되고 경력사회가 등장한다는 말을 했는데, 그렇다면 일에 대해 고민하게 된 계기는 무엇인지 알고 싶다.
답변
현재 일본은 한국처럼 일자리 문제가 그리 심각하지 않다. 그래서 요즘은 한국 젊은이들이 일본으로 취직을 하러 온다는 말을 자주 듣게 된다. 그건 뒤집어 생각해보면 한국사회에서 젊은이들이 분투를 하고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병역, 고용조건까지 일본에 비해 한국이 안 좋은 상황이기에 한국에선 ‘취직하는 게 바늘구멍에 들어가는 것’이란 말까지 나오고 있는 상황이다.
그런데 일본에서 취업 상황이 좋다곤 하지만, 일본에선 블랙기업 등이 문제로 떠오르고 있다. 대기업이나 서비스업에서 혹사당하다가 자살하는 사례도 많이 볼 수 있다(2016년 10월엔 도쿄대를 졸업하고 최대 광고회사 덴쓰에 들어간 신입사원이 105시간 초과근무를 하며 자살한 사건이 있었음). 한국의 취업 환경은 어떤가? 취업을 할 때 개인의 능력이나 발전가능성을 보기보다, ‘어떤 환경에서 태어났는가?’, ‘부모는 어떤 직업을 가지고 있는가?’와 같은 걸을 더욱 중시한다. 단순히 취업이 힘들다는 정도를 넘어서 가정환경까지 저주로 여겨야 하는 상황이 된 것이다.
곁다리로 예전에 취업할 때의 상황을 설명하자면, 나는 재일동포로 차별로 인해 그 당시에 취업이 어려웠다. 그러니 재일동포의 경우 자영업(파칭코, 폐품회수)을 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나는 무작정 소니에 지원을 한 것이다. 그런데 역시나 아무런 연락도 없었고 생무시를 당해야 했다. 그런데 몇 년 전에 소니 간부들을 대상으로 강연회를 했을 때 재밌는 일을 겪게 됐다. 그때 나를 소개하며 “소니에 지원했다가 떨어진 강상중이라고 합니다”라고 하니, 간부들은 일제히 “소니에 떨어진 건 행운입니다. 들어왔으면 지금은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이 힘들었을 거예요”라고 말하며 “럭키(행운아)”라고 말해주더군요. 물론 지금은 우스갯소리로 할 수 있는 얘기지만, 대학생 때엔 엄청 낙담했던 일화이긴 하죠.
그래도 그 당시에 일본사회엔 대학생이 1/4 정도 밖에 없었다. 1960년대엔 학생혁명이 있었는데, 그땐 엘리트만이 대학에 들어가는 시대였다. 하지만 지금은 절반 이상이 대학을 나오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유명 기업에 취직하려면 엄청나게 힘들 수밖에 없는 거다. 그렇게 힘들게 공부를 하고 취직까지 했는데, 과로를 하며 일해야 한다고 하니 ‘나를 지키며 일하는 법’이란 말이 제법 무겁게 느껴진다.
그렇다면 일이란 무엇인가? 보통 ‘일=급여를 받는 노동’만을 떠올린다. 어제 재일한인 1세를 모아놓고 심포지엄을 했었는데, 거기서 얼마나 재일한인 1세 여성들의 “강도와 매춘 외엔 다 해봤다”는 말을 통해 얼마나 많은 일을 하며 살아왔는지를 알 수 있었다. 할머니들이 그 일을 하지 않았다면 가족은 유지될 수 없었을 것이다. 그 할머니에게 일이란 ‘대가를 받는 일’이 아닌, ‘가사, 아이들 키우기, 가족을 지키기’와 같은 것이다.
이와 비슷한 경험을 2011년에도 했었다. 2011년에 동일본 대지진이 일어났는데 아무리 돈이 많아도 물 한 병을 살 수 없는 지경이었다. 즉, ‘돈이면 다 된다’는 상식이 있지만, 그 상식은 위기 상황에선 전혀 통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런 경험을 통해 사회관계를 어떻게 맺고 사느냐가 중요하단 걸 통감하게 됐다. 그건 곧 ‘상품경제’와 같이 돈으로 가치가 증명되는 것 외에도 다른 수많은 것들이 있다는 것이다. 사회관계를 얼마나 풍요롭게 유지하며 사는가라는 점이 그것인데, 그렇게 살 때 삶은 더욱 더 의미 있게 되는 거다.
질문
선생님은 이미 예전부터 ‘나를 지키며 살고 싶으면 인문학을 공부하라’는 말을 했었다. 그런데 애석하게도 한국사회에선 그 말과는 전혀 반대로 가고 있다. 그래서 취업과 관련 없는 학과들은 통폐합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런 시대에 인문학은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는가?
답변
흔히 ‘인문학=엘리트 교육주의’로 알고 있지만, 그보단 ‘인문학=휴먼 사이언스’라 보아야 맞다. 아까 전에 소개를 할 때 ‘인공지능이 사람들의 일자리를 뺏어갈 거다’는 흐름에 대해 얘기했었다. 한국은 IT 분야에서 세계 최고의 길을 가고 있기에 그런 변화는 더욱 급격하게 다가올 거다. 그와 동시에 ‘그렇다면 과연 인간이란 무언가?’라는 질문을 해야만 하고 바로 그게 ‘인문학’이라 할 수 있다.
인문학이란 ‘상징, 꿈, 상상’과 같이 화폐화할 수 없는 것을 생각하는 것이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중요한 것들이 바로 인문학의 주제가 된다.
얼마 전에 일본에선 지적장애자들이 생활하고 있는 요양병원에서 일한 적이 있는 26살 청년이 60명 가까이를 사살한 사건이 있었다. 그래서 그 청년이 왜 그런 범죄를 저질렀는지 들어보니, “지적 장애자들은 사회에 부담만을 안겨줄 뿐이고 부모에게도 씻지 못할 아픔만을 줄뿐이다. 그러니 내가 사회와 그 부모들을 위해 대리살인을 한 것이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 말과 생각 자체도 경악스러웠지만, 더 크게 놀랐던 것은 인터넷에 그 청년의 생각에 동조하는 댓글들이 꽤 달렸다는 사실이었다.
이처럼 ‘인간이란 무언가?’라는 질문을 하질 않으니, 일을 하지 못한다, 남이 돌봐주지 않으면 살 수가 없다는 것을 문제 삼고, ‘그러니 살 가치가 없니 죽여도 된다’고 생각한다. 이런 사회는 얼마나 각박할지 누구나 잘 알고 있을 거다.
이와 마찬가지로 최근엔 유전자 게놈 해석이 발달하며 세포 연기배열의 이상을 발견할 수 있게 됐다. 그래서 이상이 발견되는 순간 중절수술을 하는 사례도 늘어나고 있다. 이런 경우 대답하기가 쉽지 않다. 옛날엔 신앙이 이와 같은 판단을 해줬지만, 지금은 그때와는 많은 부분에서 달라졌다.
경제적인 양극화의 문제는 또 어떨 것인가? 사회의 부를 어떻게 재분배해야 할까? 젊은이들에게 ‘어르신에게 많은 지원을 해야 한다’고 말하면, 살 날도 많지 않은데 어르신에게 더 많은 지원을 하는 건 낭비라고 생각할 것이다.
이런 시대를 그냥 받아들이고 머물러선 안 된다. 후쿠시마 원전 사고가 터졌을 때 원전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제기를 할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전력회사는 전혀 문제라 여기지 않았으며, 마침내 재가동을 한데 이어, 인도에 수출까지 한 것이다.
이와 반대로 독일의 메리켈은 구동독에서 원자물리학을 전공한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인데도 일본에서 원전사고가 발생하자 뮌헨에 있는 2기의 원전을 폐로하는 결정을 내렸다. 그 결정이야말로 ‘인문학’에 대한 대답이라 할 수 있다. 원전을 논의하기 위해 2개의 위원회를 꾸렸는데, 하나는 원전 전문가들로 이루어진 위원회였고, 다른 하나는 시민, 철학자, 환경운동가와 같은 비전문가로 이루어진 사회 윤리 위원회였다. 여기서 메르켈은 사회 윤리 위원회의 주장을 거의 받아들였기에 폐로할 수 있었던 것이다.
어느 문인은 ‘비극은 희극보다 위대하다’고 했다. 사랑하는 사람이 죽었거나, 자신이 병마에 빠졌거나, 실업을 했거나 하는 건 비극이다. 그런 일들에 닥쳐서야 지금까진 눈에 보이지 않던 것들이 비로소 보이게 된다. 바로 그와 비슷한 경험을 한국에선 ‘세월호 사건’을 통해 했다고 볼 수 있다. 세월호 사건 이전까진 OECD에서 몇 위인지, 성장률이 몇 퍼센트인지, 얼마나 많은 부를 축적했는지만을 중요하게 생각했는데, 그 사건을 겪으며 사회 실체에 직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세월호와 같은 비극을 통해 한국 사회는 평화적으로 정권교체를 이뤄냈고 지금도 여러 방면에서 사회를 재구성하려는 논의들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바로 이런 점을 높이 평가해야 하는 거다.
바로 이와 같이 윤리나 도덕, 사회와 정치문제까지 고려할 수 있으려면 눈에는 보이지 않던 것들을 시야에 넣어 생각하게 하는 인문학이 강조되어야 한다.
질문
인문의 힘을 키우려면 책을 읽어야 한다고 했는데, 요즘 사람들은 책을 거의 읽지 않는다. 얼마 전에 만난 전문가는 “미래의 아이들은 유튜브를 통해 세상을 알게 될 거다. 즉 인류가 역사를 돌아보면 오감을 통해 세상을 익혔지, 지금처럼 책을 통해 익힌 건 극히 일시적인 현상이란 걸 알 수 있다”고 말을 했었다. 이런 시대에 독서는 어떤 의미를 가진다고 생각하나?
답변
전통적인 종이 매체 외에 지금은 전자매체가 많이 나오고 있다. 그러나 문자와 인간의 관계는 계속 이어질 거라고 본다.
60대를 넘으며 여태까지 많은 사람들을 만나왔다. 여러분도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을 만나왔고 앞으로도 많은 사람들을 만나게 될 것이다. 최근에 어떤 언론인에게 책을 받았는데, 그 책엔 ‘나라는 것은 지금까지 만난 것들의 일부이다’라는 말이 쓰여 있었다. 지금까지 나라는 걸 알기 위해서는 안쪽으로만 파고들어 생각해야만 하는 줄 알았는데, 그 글로 인해 ‘만난 것들의 일부’가 곧 나라는 걸 알게 됐다. 인간의 인생은 유한한 것이기에 인생에 대해 모르는 체로 살아가게 된다. 그때 분명한 건 끝이 있다는 것이고, 그때마다 수많은 사람들과 만나게 된다는 것이다. 부모를 만나고, 선생을 만나고, 친구들을 만나는데 그런 만남들을 빼고 얘기하라면 아무 것도 얘기할 게 없어진다는 사실이다.
그때 빼놓을 수 없는 게 책을 통한 만남이다. 책을 통해 만난다는 것은 이미 죽어버린 사람들을 만나는 것인데, 이런 만남은 살아있는 사람들을 만나는 것 이상으로 엄청난 영향을 준다(이 말은 맹자가 ‘옛 사람을 벗하다’라고 했던 말과 같다). 이와 마찬가지로 여러분 중엔 가끔씩 ‘미술관에 가서 작품을 보고 싶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누군가는 그런 사람을 보고 바빠 죽겠는데 시간 낭비하고 그러냐고 볼멘소리를 하기도 한다.
미술관에서 그림을 보면 그림이 직접 가르쳐 주는 건 아니지만, 그걸 보는 것만으로 여러 감정이 촉발된다. 그걸 바로 ‘재귀능력(자기를 돌아볼 수 있게 함)’이라 사회학적 언어로 표현된다. 책을 읽을 때 자기를 반성하며 ‘나는 뭔가?’라는 생각을 하게 되는 셈이다. 『블레이드 러너』라는 영화에서 인간과 로봇의 구별은 ‘기억을 떠올리는 것’이라 정의했었던 것처럼 말이다.
이쯤에서 누군가는 ‘굳이 책을 읽지 않아도 인터넷 정보를 읽어도 충분해요’라고 말할지 모른다. 그런데 인터넷 정보는 하나의 흐름을 보는 것뿐이다. 그러니 순간적으론 알게 됐을지라도 곧 잃어버리고 어떤 것도 감흥을 주진 않는다. 그에 반해 책을 읽는다는 건 자기 안에 질문들과 의문들이 쌓이게 된다. 단순히 읽는 행위를 넘어 적극적으로 대화하는 거라 할 수 있다. 그런 이유로 인터넷 정보와 책의 정보는 본질적으로 다르다고 할 수 있다.
질문
나쓰메 소세키의 『산시로』, 다니엘 디포 『로빈슨 크루소』, 피터 드러커 『매니지먼트』와 같은 책을 추천해주셨다. 그런데 의아스러운 점은 피터 드러커는 효율, 인간자원과 같이 선생님이 말하는 것과는 완전히 반대 성향을 지니고 있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드러커를 잘못 알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회사를 경영하는 사람들이 드러커를 오해하여 잘못 경영하고 있는 것인지 궁금하다.
답변
일본에선 『만약에 드러커가 살아 있다면』이란 책이 유행한 적이 있다. 경영학이나 이런 곳에서 드러커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오는 편이다. 그렇기에 때문에 ‘돈으로 환원되지 않는 일’과 같이 반효율을 얘기하는 나의 생각과는 반대된다고 일반적으로 생각하기에, 그의 책을 추천했다는 사실이 의아스러울 것이다.
하지만 ‘지금 이 세계를 움직이는 근본적인 아이디어는 뭘까?’라고 생각해볼 때, 그런 아이디어를 처음 말한 사람들이 동유럽의 유대인이었다는 사실이다. 사실 지금 미국발 글로벌화의 물결의 근간은 동유럽 지식인들의 영향이 크다는 점이다. 프리드리히 하이에크, 밀턴 프리드만, 슘 페터, 칼 포퍼와 같은 유대인들이 영국과 미국에 영향을 끼쳤고 그게 세계에 어마어마한 흐름을 만들어온 것이다. 그런 흐름에 피터 드러커도 자리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드러커는 스탈린식의 전체주의에 반감을 가지고서 사상을 구축했다. 그렇기에 ‘더 열려 있고, 더 개방적인 사회’를 맘속으로 그리며 구상했던 것이다. 드러커의 『매니지먼트』를 보면 기업이 사적이익만을 극대화하는 것을 강도 높게 비판하고 있는 걸 볼 수 있다. 모든 조직이 ‘기업의 이윤 극대화를 위해 일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사회가 필요로 하는 수요를 충당하기 위해 일하는 것’이라 보고 있다. 그러니 드러커의 입장에서 보면, 기업이 이윤을 사내에 축적하는 것은 커다란 실패로 보일 것은 자명하다. 그는 ‘사회 속에서 기업이 어떤 도움을 주는가?’를 생각했을 뿐, ‘기업만 잘 되면 된다’고 생각하는 건 거부했다. 그건 드러커의 입장을 심각하게 오해한 것일 뿐이다.
지금의 사회는 대단히 위험한 상황에 처해 있다. 트럼프는 왜 집권할 수 있었는가? 프랑스와 일본에선 왜 극우세력들이 득세하게 되었나? 이런 여러 사태의 근간엔 ‘사회가 열화되었다’는 현상이 있다. 사회가 열화되면 될수록 개인은 죽거나 살거나 상관없이 전체만 잘 되면 된다는 생각이 강해진다. 그러면 반드시 ‘파시즘’에 이르게 된다. 드러커가 가장 두려워한 것도 이런 식의 파시즘으로 치닫는 사회였기에 그걸 거부했던 것이다.
한국사회도 분명히 지난 10년 간 사회가 열화되었다. ‘너의 불행은 나의 행복, 나의 불행은 너의 행복’이란 생각이 개인에게 강해져 갔다. 그러나 사회의 양극화가 심화되고, 세월호 사건을 거치며 사회가 얼마나 열화되었는지 사람들은 실감하게 됐다. 그런 비극을 보며 사회적인 연대를 고민하게 됐으니 말이다. 바로 그런 식의 고민들이 사회를 좀 더 강하게 만든다. 사실 정치를 통한 변화는 그런 변화를 담는 작은 부분일 뿐이다.
그런 한국의 변화를 보면서 나 또한 한국 사람인 걸 자랑스럽게 생각하게 됐다. 아시아에서 자기 힘으로 민주화를 이루어내고, 이처럼 열화를 극복하기 위해 고군분투하기 때문이다. 앞으로 5년이란 시간은 한국사회가 어디로 나아갈지 결정하는 기로라 생각한다. 그 시간을 어떻게 보내느냐에 따라 열화가 더욱 진행될 것인지, 그걸 끝내고 공동체가 더욱 강해질지가 결정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