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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건빵 May 11. 2018

너와 나의 스파이란 연결고리

[고요한 밤의 눈]을 읽고 1

요즘 ‘라이브’란 드라마를 재밌게 보고 있다. 취업도 만만치 않고 희망마저 등을 돌려버린 우울한 청춘들이 경찰공무원이 되어 겪는 에피소드를 담고 있는 드라마다.

이 드라마의 2부에 나온 장면이 나의 두 눈을 번쩍 뜨이게 했고 가슴을 먹먹하게 했다. 중앙경찰학교에서 실습을 받던 그들의 마지막 테스트는 분쟁의 현장에 투입되어 그동안 갈고 닦은 실력으로 진압하는 것이다. 그런데 하필 그들은 대학 총장의 비리에 분개한 학생들이 총장실을 점거하여 총장사퇴를 외치는 현장에 투입되었다. 지금은 진압을 해야 하는 경찰 신분이지만, 실상 그들도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저 학생들과 별반 다를 게 없이 앞날이 불투명한 채 하루하루 버티어가던 소시민이었을 뿐이다. 그러니 진압해야 함에도 발이 수이 떨어지지 않는다. 다들 갈등하는 빛이 역력했지만 애써 바늘구멍 같은 시험을 통과하여 여기까지 왔고 이제 경찰이 되기 위한 마지막 관문만을 남겨두고 있는 상황이니 눈 질끈 감고 임무를 수행한다.



▲ 문제를 일으킨 당사자는 사라지고,  소시민들만 남아 대립해야 한다.



이 장면은 슬로우 모션에 가슴 절절한 배경음악까지 깔리며 편집되어 있다. 마지못해 진압을 해야 하는 이들의 서글픈 심정이 그런 장면효과와 음악만으로도 처절하게 전해진다. 이때 한 장면이 오버랩되며 나도 모르게 눈시울이 붉어졌다. 명령권자는 사라지고, 경찰특공대가 사지로 내몰린 철거민들을 과잉 진압하는 용산참사의 장면 말이다. 경찰특공대나 철거민이나 별반 다르지 않은 사람들임에도 ‘그저 살기 위해’ 서로가 서로의 적이 되어야만 했던 공통점이 있기 때문이다.                       



▲ 2009년의 용산참사는  우리 사회의 민낯을 보여줬다.




스파이들이 판을 친다

     

스파이. 『고요한 밤의 눈』을 읽다 보면 자주 등장하는 단어다. 처음에 이 단어를 읽었을 땐 ‘뭔 지금이 냉전시대도 아니고?’라는 생각 때문에 피식 웃음이 났다. 스파이를 다른 말로 하면 ‘프락치’ 내지 ‘간첩’일 텐데, 사회 곳곳에서 암약하고 있다는 근거 없는 소문만 들었을 뿐, 실제로 마주친 적도 뉴스에서 본 적도 없기 때문이다. 이렇듯이 과거의 유물처럼 딱딱하게 굳어져 더 이상 우리에게 어떤 감흥도 일으키지 못하는 단어를 이 책에선 버젓이 쓰고 있다. 하지만 책을 끝까지 읽고 덮었을 땐, 그런 편견에 사로잡힌 나의 저렴한 편견에 절로 썩소가 지어지더라.

이 책에선 ‘의뢰인의 이익만 보호하고 그 명령만 지키기 때문이다. 비록 전체, 혹은 미래를 볼 수 있다고 해도 그렇게 하지 않는다. 특정 순간에 진실을 위장하는 것. 그것이 스파이의 기본’이라며 스파이의 속성을 얘기해주고, ‘자신의 손에 피를 묻히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가 지나간 자리에 더 많은 죽음이 존재한다(129쪽).’라 스파이의 본질을 강조하며 그들을 ‘킬러’라고 서슴없이 표현하고 있다.



▲ 스파이란 단어를 듣는  순간 국정원이 떠올랐다. 댓글사건이나 서울시 공무원 간첩조작사건 등이 모두 스파이짓이니 말이다.



이렇게 듣고 보니 스파이는 결코 이 시대와는 동떨어진 존재가 아니라는 걸 알 수 있다. 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몸짓과 언행, 소를 위해 그것도 매우 극소인 10%를 위해 90%를 희생시키는 경제논리, 거대권력의 이익을 위해 뭇 사람들을 철저히 짓밟는 신자유주의의 정책, 자연을 살린다는 미명 하에 거침없이 자연을 헤집는 토건 마인드, 이 모든 걸 유지하고 더욱 극대화시키는 것이 ‘보이는 스파이’의 주된 역할인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어떤 세력, 어떤 특정한 직업만을 가리켜 스파이라고 했다면 이 책의 몰입도는 급격하게 떨어졌을 것이다. ‘신과 함께’를 봤을 때가 정말 그랬다. CG는 화려했고 상황들은 꽤나 흥미진진했음에도 가족애와 신파라는 두 이야기의 중심축이 공감되질 않으니 전혀 몰입이 안 되더라. 그래서 그저 그런 영화라 느껴졌듯이 이 책의 ‘스파이’도 특정계층, 특정인을 지칭했다면 그들만의 이야기로 느껴져 금세 흥미를 잃었을 것이다. 그러나 작가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가 ‘보이지 않는 스파이’에 대해 언급한다. “보이지 않는 스파이는, 그러니까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만약 그가 경찰이라면 그는 경찰로 일하는 동시에 우리 일을 하는 거야. 그 가운데 선택해야 하는 게 아니라는 얘기지. 우리 일을 위해 자신의 경찰 일을 배신한다거나 하는 일은 없는 거지(153쪽).”라는 Y의 말을 통해 드러낸다. 그건 달리 말하면 지금과 같은 부조리한 사회체제가 유지되길 원하고 그 사회체제 외에 다른 체제에 대한 상상을 불온하다고 여겨 누군가에게 “사회에 불만 갖지 말고 열심히나 해!”라고 윽박지르는 것이야말로 ‘보이지 않는 스파이’의 행위라는 것이고, 그건 나도 언제든 ‘보이지 않는 스파이’가 될 수 있고 이미 ‘보이지 않는 스파이’일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 내 안에 도사리고 있는  물질만능의 욕구. 그게 바로 이 사회를 지탱하는 힘이다.




오늘의 스파이는 나야 나!

     

2007년 대통령 선거에선 매우 재미있는 현상이 일어났다. 보통 대리자를 선출할 땐 좀 더 높은 도덕성을 요구하기 마련이다. 자신은 한낱 현실을 뒹굴다 오물을 뒤집어쓰며 살지라도 적어도 나를 대리할 사람은 나보단 나은 사람을 찾는 게 인지상정이니 말이다. 그러나 그 당시 대선에선 그런 도덕성을 전혀 요구하지 않았다. 아마도 그 전 정권이 도덕성으로 어필한 정권이었는데 그럼에도 사람들의 삶은 전혀 나아지지 않았기 때문에, ‘도덕성 따윈 개나 주고 잘 살게만 해주면 돼’라는 반감 때문이었으리라. 그 결과 우린 뭔가 뒤가 구린 사람을, 엄연히 투자자문회사를 설립했다고 직접 언급하는 영상이 있음에도 “새빨간 거짓말입니다”라고 아무렇지 않게 자신의 말을 뒤집는 사람을 대통령으로 선출하게 됐다.

과연 그를 뽑은 48.7%의 국민들만 탓해야 하나? 그런 책임전가야말로 이런 사태가 일어나도록 만든 원인은 아닐까? 우린 누구 할 것 없이 성공신화를 부러워했고, 부동산 부자를 추앙했으며, 너를 짓밟더라도 내가 더 잘 살기를 바랐고, 돈만이 최고라 여기지 않았던가. 바로 그런 욕망들이 모이고 모여 그러한 대선 결과를 만든 것일 텐데 말이다. 



▲ 도덕적이지 않아도  된다며 그를 뽑아줬다. 결국 우리의 욕망이 만든 악이 탄생하던 순간.



바로 이와 비슷한 맥락을 ‘기억을 잃기 전까지 당신은 스파이가 아니었다는 말이야. 그러면서도 스파이였겠지. 이 조직에 기여하고 복무하는. 당신이 뭔가를 바꾸려고 해서 그들이 당신의 기억을 지우고 당신의 정체성을 조정한 거야. 다른 길을 가게 하도록, 아니 그러니까 가던 길을 계속 가게 하도록(154쪽).’이라고 했던 Y의 말을 통해 여실히 알 수 있다. 그저 우린 각자의 길을 계속 갔을 뿐인데, 사회적인 욕망에 따라 살았을 뿐인데, 그저 살아남기 위해 살았을 뿐인데, 그런 삶 자체가 우릴 ‘보이지 않는 스파이’로 만들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 그런 그가 18년 3월  23일에 구속됐다. 국정원 댓글 공작, 다스 의혹, 해외자원사업을 통해 치부한 혐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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