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요한 밤의 눈]을 읽고 2
그런데 이쯤에서 매우 재밌는 주제 하나를 볼 수 있다. 이 책의 X는 어떤 사고로 의식을 잃었고 병원에서 깨어나는 순간 현재 35살임에도 20살 이후의 기억은 통째로 사라졌다. 그래서 기억을 되찾기 위해선 사람과 사건을 쫓아가며 기억을 재구성해야만 한다. 마치 『본 아이덴티티The Bourne Identity』의 제이슨이 된 것만 같은 기분으로 ‘X의 과거 찾기’를 함께 하게 된다. 하지만 여기서 간과해선 안 되는 사실이 그가 만나는 사람들을 통해 그의 과거가 되살아나는 게 아니라, 그 사람들의 기억과 기록으로 현재의 그가 새롭게 형성되어 간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위에서도 ‘기억을 되찾는다’고 표현하지 않고 ‘기억을 재구성해 나간다’고 표현한 것이다. 이건 마치 ‘어린아이가 태어나 어떻게 나라는 상像을 구축해 가는가?’라는 주제와 맞닿아있는 흥미로운 이야기다.
흔히 이런 주제의 경우 ‘원래의 나’ 또는 ‘본연의 나’라는 게 있어서 주변의 환경이 어떠하든, 주변 사람이 어떠하든 이데아적인 내가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니 현재에도 『나다움 어떻게 찾을까』, 『내 안의 참나를 만나다』라는 책들이 나오고 인기를 얻을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 책에선 나라는 이데아적인 인식을 거부한다. ‘언젠가 의사가 자아는 사람이 자신에 대해 일관된 내러티브를 형성하기 위해 선택적으로 받아들인 기억을 축적한 것이라는 말을 한 적이 있다. 내 기억은 축적된 것이 아니라 지워진 후 다시 쓰여졌다. 내 자아는 지워진 것일까, 다시 쓰여진 것일까. 어찌 되었든 둘 다 나의 것이고, 그 팰림프세스트palimpsest(다시 새김, 과거와 현재의 텍스트가 서로 중첩하고 교차하는 다의적 공간을 의미함)가 나의 미래의 자아이다(288쪽).’라는 X의 말을 통해 우리의 상식을 완전히 깨 박살내 버린다.
통쾌하다면 통쾌한 말일 수 있지만, 불쾌하다면 이처럼 불쾌한 말도 없다. ‘나는 ~~한 사람이야’라는 인식은 매우 선명하고 확고해 보이는데도 ‘일관된 내러티브를 형성하기 위해 선택적으로 받아들인 기억의 축적’이라며 폄하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오늘부터 누군가 나에게 새로운 이야기를 계속해준다면, 어느 순간 나는 일새로운 정체성을 가지게 된다는 말인가? 그리고 그건 그만큼 나라는 존재가 모래 위에 지어진 누각과 같이 한 순간에 허물어지고 바뀔 정도로 위태위태하고 불확실하단 말인가? 이럴 땐 “흥칫뿡!”을 백 번 날려도 성이 안 풀린다. 날 동네 호구로 보지 않는 이상, 이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아무 말 대잔치를 할 수는 없는 법이니 말이다.
그런데 실상 이런 문제의식은 이미 ‘인셉션’과 ‘공각기동대’라는 영화에서 심도 있게 다뤘다. ‘내 기억’, ‘나 이런 사람이야’라는 규정들이 얼마나 왜곡된 심리 위에 구축된 상인지, 얼마나 한낱 꿈과 같은 기대 속에 만들어진 상인지를 말이다. ‘인셉션’에선 과거의 기억이 얼마든지 조작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줘 아들의 아버지에 대한 적개심을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으로 치환하는 데 성공했고, ‘공각기동대’에선 사람의 기억이란 게 얼마나 불완전한지를 보여줘 가족도 없는 청소부가 결혼도 했고 딸도 키우고 있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데 성공했다. 그건 그만큼 책에서 말한 것과 같이 자아라는 게 ‘축적된 기억’으로 구축되며, 지워졌다 다시 쓰여진 기억으로 재정립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예 작자는 ‘인간은 기억의 총합(41쪽)’이라 쐐기를 박았다.
그러니 나라는 인식의 가생이엔 만리장성 같은 분명한 벽이나 윤형철조망 같은 완벽한 경계가 있어 나와 너를 확실하게 나누는 ‘나란 이데아’가 있는 게 아니라, 판문점의 군사분계선처럼 얇디얇은 선 하나만 그어져 있어 나와 너가 끊임없이 섞여 과거의 자아는 늘 미래의 자아로 나아가는 ‘나의 흘러감’만이 있을 뿐이다.
그래 나라는 인식이 모래에 쌓은 누각처럼 상황에 따라, 조작에 따라 바뀔 수 있다고 치자. 아무리 그렇다 하더라도 그건 X처럼 15년 동안의 기억을 몽땅 잃어버린 사람에게나 가능한 거지, 정말로 20년 이상을 정신 똑바로 박힌 채 살아온 사람에게도 가능하단 말일까? 아마 그건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태반일 것이고, 그래서 이러한 논의 자체가 매우 못마땅할 것이다. 더욱이 지금처럼 ‘참 나’, ‘나다움’을 TV만 틀면 주구장창 외쳐대는 사회에선 더욱 그럴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유심히 봐야 하는 건 X만이 자신이란 상에 대해 재구성하려 한 게 아니라, 그 외에 인물들도 자신에 대해 고민하거나 회의하고 있다는 것이다. 부조리한 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스파이짓을 회의하고 있는 B나, 그런 체제를 아예 바꾸기 위해 ‘따뜻한 나라의 평화로운 섬’에 헌책방을 차리고 초대장을 보낸 B의 사수나, 딸에게 그런 위험한 일상을 물려주긴 싫다며 조직의 감시망을 벗어날 계획을 세운 Y의 사수나, 자신으로 인해 딸을 위험에 처하게 할 순 없다며 치매환자인 척하는 Y의 엄마가 바로 그들이다. 이들은 모두 능력이 출중한 스파이들로 나름의 성과를 만들어냈고 인정도 받았으며 그에 따라 일반인은 누리지 못할 많은 것들을 누리며 살아왔다. 그러니 이들이야말로 ‘사회를 안정시킨다’는 스파이짓의 당위성을 인정하고 자부하며 계속 그 일을 해나간다면, 얼마든지 보장된 삶을 살 수 있다.
영화 ‘1987’에서 박종철을 죽음에 이르도록 고문한 박처장의 부하경찰이 치사혐의로 구속수사를 받게 되자, 박처장은 그 현장에 찾아가 자신의 부하를 심문하던 경찰을 때려눕힌다. 그러고 나서 부하에게 “너래 애국자야! 고개 빳빳이 들고 살라우~”라고 천지가 쩌렁쩌렁 울릴 정도로 확신에 찬 어투로 말한다. 이처럼 합리화는 어느새 신념이 되고 신념은 어느새 무서운 광기를 된다는 걸 영화 내내 보여준다. 하지만 그건 멀찍이 떨어져 있는 사람에게나 보이는 것이지, 그 속에 살고 있는 사람에겐 전혀 보이지 않는다. 마치 공기처럼 말이다. 이처럼 B나, B의 사수나, Y의 사수나, Y의 엄마 네 사람 모두 다 ‘나는 애국자야. 다 나라를 위해 한 거지 내 개인의 이익을 위해 한 건 아니야’라는 신념으로 살며 스파이짓을 한다 해도 전혀 문제될 게 없다.
그런데도 그들은 자기에게 덧씌워진 자기규정을 부정하기에 이른다.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었는지 B의 독백을 통해 그 가능성을 엿보도록 하자. 이 부분이야말로 나라는 인식이 어떻게 깨질 수 있고 뒤바뀔 수 있는지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부분이기에 인용문으로 제시하도록 하겠다.
가끔 이 일에 회의가 들 때면 아내와 아이를 생각한다. 내 아이가 아직 받지 않은 상처, 그러나 미래에 받을 수밖에 없는 상처, 그 상처를 최소화시켜주고 싶다. 가장 상처받지 않으며 살 수 있는 일 퍼센트에서 영원히 머물게 해주고 싶다. 그리고 구십구 퍼센트를 함께 생각하고 그들에게 상처를 주지 않는 방법을 고민하는 일 퍼센트가 되길 바란다. 상처를 주지도 받지도 않는다고 믿는 아내처럼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계속 꿈을 꾸게 해주고 싶다. 하지만 그것은 그저 꿈일 뿐이다. 나에게는 화나고 아내에게는 슬픈....
『고요한 밤의 눈』, 박주영, 다산책방, 2016년, 78쪽
자신이 계획한 대로 삶이 이루어지고, 주변의 가족들이 무탈하게 살아간다면 사람은 자신에 대해 생각할 필요가 없다. 아니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그런 생각 자체를 아예 못한다. 내가 하기 싫은 일은 안 할 것이고, 내가 원하지 않으면 안 만날 것이며, 설령 큰 문제가 생긴다 해도 주위에서 신속히 처리해줄 테니, 나라는 상에 흠집이 갈 리도 없고 기존의 관념이 틀렸다는 생각이 들 리도 없다. 그러니 B의 아내처럼 ‘상처를 주지도 받지도 않는다고 믿’으며 나다움, 참나를 유지한 채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B가 말했듯이 이것이야말로 ‘그저 꿈일 뿐’이다. 그건 ‘매트릭스’라는 영화에 나오듯 가상세계를 살아가되 현실은 끈적한 용액에 담겨 아이처럼 손만 빨고 있는 인생에 다름 아니고, ‘설국열차’라는 영화에 나오듯 더 너른 세상이 있음에도 열차라는 비좁고 착취가 자행되는 공간에 생각과 몸이 가두고 아등바등 살아야하는 인생에 다름 아니다.
그러니 B처럼 현실이 뭔가 잘못됐다는 게 느껴질 때, 자신의 삶이 뭔가 어긋났다는 게 느껴질 때, 비로소 여태껏 지녀왔던 자기상을 허물고 재구축할 수 있게 된다. 바로 위에서 얘기했던 네 사람은 이런 어긋나는 상황 속에 있었기 때문에 나라는 상을 완전히 지우고 새롭게 그릴 수 있었고, 그에 따라 죽을지 모른다는 공포가 있었음에도 거기서 뛰쳐나올 용기를 낼 수 있었던 거다. 그런 의미에서 “나 하나로 세상은 바뀌지 않는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 생각으로 그 자리에서 멈출까. 나 하나 이런다고 세상은 변하지 않고 나 혼자만 죽게 될 뿐이다.... 억울하지만 더 억울해지기는 싫다.... 어떤 방법으로도 세상이 변하지 않을 거라고 심지어 목숨을 걸어도 세상이 변하지 않는다고 믿게 되면 세상은 절대 변하지 않는다. 악의 악순환을 바꾸어야 한다(263쪽).”라고 말하는 B의 결단이야말로 세상이 규정한 나의 상, 누군가가 정해준지도 모르는 나의 상을 깨부수고 나라는 상을 직접 만들겠다는 결기 어린 독백이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