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요한 밤의 눈]을 읽고 3
그런데 이렇게 자기의 상을 다시 그릴 수 있게 되었다고 해서 희망이 생기는 걸까? ‘나 하나 이런다고 세상은 변하지 않고 나 혼자만 죽게 될 뿐이다’라는 B의 생각처럼 나만 나섰다가 괜히 ‘이상주의자’라는 소리만 듣거나 ‘배신자’라고 매장되는 건 아닐까? 내부 고발자들이 어떤 대우를 받았는지, 혁명을 꿈꾼 이들이 어떻게 되었는지 너무나 잘 알기에 결코 쉽게 말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이와 같은 고민을 대변하는 인물이 바로 소설가 Z다. 그는 한때 편집자와 함께 좋은 책을 만들어간다고 느끼던 영향력 있는 소설가였지만 이젠 편집자에게 바짝 엎드려야만 하는 변변찮은 소설가가 되었다. 그러니 좀 잘나가기 시작한 후배 작가에게 “평론을 의식하고 쓰세요. 아님, 독자라도 의식하던가. 언제까지 자기 자신을 위해서 쓰실 건가요? 이제 달라지셔야죠(102쪽).”라는 자존심을 완전히 뭉개뜨리는 핀잔을 듣기도 했고, 초대장을 보내준 B의 사수에겐 “나는 사람들이 주목하는 그런 작가가 아닙니다. 내 소설은 아무 영향력도 없습니다(280쪽).”라고 자조적인 말을 내뱉기도 했다. 그만큼 녹록치 않은 현실에 한껏 주눅 들었고, 소설가임에도 소설의 한계에 몸서리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Z만 모르고 있었지 B나 B의 사수는 소설의 가치를 알고 있었다. ‘소설을 읽는 것은 무엇보다 재밌어. 그런데 그 재미는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말하는 재미하고는 좀 달라. 너무 재밌어서 아무 생각이 안 나는 것이 아니라 자꾸만 뭔가를 생각하게 만드는 재미가 있어. 어떤 작가들은 언제나 어떤 방식으로든 우리에게 지금 여기의 문제를 고민하고 현실을 직시하라고 말하고 있어. 그런 작가들은 본능적으로 문학이 어떻게 세상에 기여할 것인가를 알아. 게다가 작가와 독자는 스파이들의 암호보다 더 복잡한 코드로 소통하지(148쪽).’라는 B의 말을 통해 Z가 왜 감시대상이 되어야 했는지, 그리고 소설의 가치란 무엇인지 확실히 알 수 있다. 아마도 B의 이런 생각은 그의 사수에게 일정부분 영향을 받은 걸 거다. 그래서 B의 사수는 초대장을 받고 온 Z에게 “그래요, 작가님 밥벌이조차 되지 않을 겁니다. 아무도 읽지 않고 그래서 다시는 쓸 수 없고, 쓰지 않으니 읽을 수 없고, 그런 악순환을 누군가가 만들어내고 있습니다(281쪽).”라며 소설가들을 주눅 들게 하여 아예 소설을 쓰지 못하게 만드는 거대한 흐름을 폭로하며 “승자들이 인멸한 증거를 상상력으로 극복하고, 이야기로 전달하고 유포시키겠죠. 최고의 이야기에는 진실이 담겨 있는 법입니다. 멈추지 마십시오(284쪽).”라고 Z에게 계속해서 소설을 쓸 수 있도록 힘을 실어준다.
소설에 진실이 담겨 있다는 말과 여기의 문제를 고민하게 한다는 말에 전적으로 공감한다. 그렇기에 소설을 보면 현실이 매우 낯설어지는 경험을 할 수 있다. 「나비의 꿈胡蝶夢」이란 글에서 장주는 나비가 된 꿈을 꾸고, 그 꿈속에서 나비는 장주가 된 꿈을 꿨으니 그저 한 번 깨어난 것으로 현실로 돌아왔다고 착각해선 안 된다. 깨어난 그 현실 자체가 여전히 꿈일 수 있으니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몇 번이고 깨어나야 하고 기어코 현실에 발을 디디고 서야만 한다. 그걸 장자는 ‘허벌나게 인남大覺’이라 표현했다. 그처럼 여러 편의 소설을 읽을 때마다 당연시 해왔던 모든 것들이 낯설어지는 걸 느낄 수 있었고, ‘지금 열심히 공부해야 좋은 대학 가지’라는 생각으로 학생들을 지도하는 교사가 되려 했던 사고패턴이 얼마나 비교육적이며 폭력적인 것인지 느낄 수 있었다. 소설을 읽을 때마다 소설은 매번 나를 허벌나게 인나도록 자꾸 흔들어 재낀다. 그래서 일상이 이상하다는 것을, 당연함이 당혹스러움이라는 것을 알려준다. 이것이야말로 ‘작가와 독자는 스파이들의 암호보다 더 복잡한 코드로 소통’한다는 말의 실제적인 예라 할 수 있고 소설의 진정한 힘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소설만이 체제가 널찍하게 쳐놓은 그물망을 통과할 수 있는 힘을 지닌 건 아닐 거다. 각자가 그저 열심히 살았더니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보이지 않는 스파이’가 되었듯이, ‘속물적인 사회의 기준 자체를 숙고하’고 ‘자신이 원하지 않는 건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무정부적인 일종의 진공상태에서 계속 살아(282쪽)’갈 수 있다면, 그 또한 그물망을 통과하여 ‘반스파이짓’을 하게 되는 것이니 말이다. 그런 행위를 하는 사람을 이 책에선 ‘은둔자’라고 부르며 ‘스파이에 대항하는 스파이 같은 사람’이라 정의한다.
이렇게 말하면 무척 거창해 보이지만, 실상 우린 이미 2016년 10월부터 2017년 3월까지 은둔자의 역할을 충실히 했었다. 매주 토요일마다 눈이 오나, 비가 오나, 바람이 부나, 한파가 밀려오나, 광화문 광장에 나와 촛불을 들고 18회에 걸쳐 1,500만이란 인원이 목청껏 외쳤고 그 결과로 헌정 사상 처음으로 대통령을 탄핵했다. 이와 같은 승리의 경험은 그만큼 값진 것이고 함께 만들어낸 공동의 경험이기에 절대로 잊어서는 안 된다.
하지만 이러한 작은 성취에 만족하고 머물러서도 안 된다. 스파이들은 탄핵 사건으로 인해 약간의 생채기를 입었을지는 몰라도 그게 그들을 와해시키거나 활동을 위축시키진 않았기 때문이다. 오히려 더 심기일전하여 ‘강자는 강자로 태어나고, 약자는 약자로 살아갈 뿐(128쪽).’이라는 관념을, ‘그들이 그들의 세상을 꿈꾸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비관을 심어주기 위해 어떻게든 이 승리의 기억을 왜곡시키고, 그 흐름을 자신들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이끌어가려 할 것이다. 그러니 우린 이 책이 에필로그인 ‘나는 스파이이고, 이 세계는 끝났다’라는 절망의 메시지에서 시작하여 프롤로그인 ‘나는 스파이이고, 이 세계를 위해 다시 태어났다’는 희망의 메시지로 끝맺었듯이, 탄핵과 정권교체가 끝이 아닌 시작이며 지금부턴 우린 우리가 선 바로 이 자리에서 은둔자로 살아가겠다는 결의가 필요하다. 그럴 때 우린 ‘라이브’에서 나온 장면처럼, 용산참사의 그 가슴 시린 순간처럼 점과 점으로 흩어져 서로가 서로를 적대시하는 관계에서 벗어나 점차 선으로 이어지다가 결국 면으로 하나가 되어 이번 촛불집회에서와 같이 공동체가 함께 살아갈 방도를 찾아가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