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렌 켈러의 성장 이야기
안녕하세요, 영감을 나누는 공간 <치즈(Cheese)>의 아티스트 건킴입니다.
눈이 안보이고 귀가 안 들리지만 누구보다 지식을 갈구하고 삶의 의미를 찾기를 바라는 ‘헬렌 켈러’가 쓴 책 [사흘만 볼 수 있다면]입니다.
볼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름다움을 느끼지 못하고, 들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들으려 하지 않는 익숙함이라는 늪에 빠져 있는 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자신에게 없는 것을 쫓는 현대인들에게 한번 더 자신을 돌아보게 하는 책이었다.
“들을 수 있다는게 얼마나 고마운지 아는 사람은 귀머거리뿐입니다.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다채로운 축복을 누릴 수 있는지는 소경밖에 모릅니다.”
우리는 이미 갖고있는것에 충분히 감사하면서 살고 있지 않다. 하지만 그러한 감정은 크게 비판할 게 못되는 이유는 너무 자연스러운 본능이기 때문이다. 어디 시각 뿐이겠는가, 우리는 영원히 떠나가지 않을 것 같은 인간 관계에 대해서도 감사함을 못느낀다.
살면서 가장 많이 싸우게 되는건 가족이고 그 다음은 현재 사랑하는 자신의 애인일 것이다. 자신이 애정하는 관계를 유지하고자 할 때 ‘중용’이라는 개념이 필요하듯, 자신이 이미 가진 것들에 대하여 감사하기 위해서 또한 ‘중용’이 있어야 된다고 생각한다.
하루하루 살아있다는 것 자체만으로 감사하는게 과연 가능한 일일까? 볼 수 있다는 사실, 들을 수 있는 귀가 있다는 사실을 매일같이 행복하하는게 과연 진정한 삶의 가치이고 행복하게 하는 길일까?
생존을 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만으로 행복함에 안주하고 더 많은 것들을 챙기지 않는건 결코 좋은 삶이라고 할 수 없는 것 같다. 좋은 삶이란 자신이 갖고있는 것에 충분히 감사함을 느끼고 갖지 못한 것을 갈구하되 자신이 갖고있는 혹은 갈구하는 것들이 나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도 긍정적인 영향을 끼칠 때야 말로 좋은 삶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이 책은 단순히 내가 볼 수 있다는 사실 혹은 살아있다는 사실에 감사하게끔 한 책이 아니라. 내가 얼마나 볼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눈 앞에 있는 것들을 대충 보고 있는가 라는 개념을 심어주었다. 책을 읽을 때 마다 눈 앞에 있는 것들을 깊게 관찰하게 되었는데, 식물들이 이렇게 디테일이 많았나 싶을 정도로 흥미롭게 관찰하게 되었고, 그로인해 다양한 작품의 형태들이 도출된 것 같다.
볼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들을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지식을 갈구하고 더 가치있는 삶을 살기 위해 나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용기와 노력을 쏟아낸 핼렌 켈러야 말로 우리 인간이 본받아야되는 사람의 상이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해본다.
“얼마 전, 친한 친구를 만났는데 그 친구는 마침 숲속을 오랫동안 산책하고 돌아온 참이었습니다. 나는 무엇을 보았느냐고 물었습니다. “별거 없어”. 내가 그런 대답에 익숙해지지 않았다면 절대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했지만, 나는 이미 오래 전부터 눈이 멀쩡한 사람들도 실제로는 보는 게 별로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답니다.
어떻게 한 시간 동안이나 숲속을 거닐면서도 눈에 띄는 것을 하나도 보지 못할 수가 있을까요? 나는 앞을 볼 수 없기에 다만 촉감만으로 흥미로운 일들을 수백 가지나 찾아낼 수 있는데 말입니다.”
-22쪽
그저 만져보는 것만으로도 이렇게나 큰 기쁨응 얻을 수 있는데, 눈으로 직접 보면 얼마나 더 아름다울까! 그런데도 볼 수 있는 눈을 가진 사람들은 그 아름다움을 거의 보지 못하더군요. 세상을 가득 채운 색채와 율동의 파노라마를 그저 당연한 것으로 여기면서 자신이 가진 것에 감사할 줄 모르고 갖지 못한 것만 갈망하는 그런 존재가 아마 인간일 겁니다. 이 빛의 세계에서 ‘시각’이란 선물이 삶을 풍성하게 하는 수단이 아닌, 단지 편리한 도구로만 사용되고 있다는 건 너무나 유감스러운 일입니다.
-23쪽
인간의 역사를 보면 예술적 표현에 대한 인간의 욕구는 음식과 주거, 종족번식의 욕구만큼이나 강렬한 것이었습니다.
-30쪽
어쩌다 화가 치밀기라도 하면 기분을 가라앉히려고 차가운 나뭇잎과 잔디 속에다 뜨겁게 달아오른 얼굴을 파묻곤 했는데 그러면 감쪽같이 진정이 되었다.
-48쪽
내가 다른 사람들과 다르다는 것을 언제 처음 알게 되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 나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어서 화가 났다. 입술을 움직여봤지만 아무 소용이 없자 미친 듯이 손짓발짓을 해댔다. 이것이 때론 나를 더욱 화나게 했으며 그러면 나는 지칠 때까지 발길질을 하고 괴성을 질러댔다.
-55쪽
이맘때쯤 나는 열쇠 사용법을 익혔는데 어느 날 아침 나는 어머니를 식품 저장실에 가두고 말았다. 어머니는 그 안에서 꼼짝없이 세 시간을 갇혀 있어야 했다. 어머니는 계속문을 두드리셨고 나는 그 동안 어머니가 만들어내는 바로 그 진동 때문에 환호성을 내지르며 현관 가까이서 웃고 있었다.
-60쪽
그 무렵 내게는 늘 끌어안고 어루만지다가도 마구 때려대며 화풀이를 해대곤 하는 낸시라는 이름의 인형이 하나 있었다. 어처구니 없게도 낸시는 도움의 손길이라고는 기대할 수도 없는 처지에 놓인 내 애증의 희생양이나 마찬가지 신세였다.
-63쪽
그날 아침 우리는 벌써 ‘컵Mug’과 ‘물Water’을 놓고 한바탕 격전을 벌인 터였다. 선생님은 ‘m-u-g’는 물을 담는 그릇을 가리키고 ‘w-a-t-e-r’은 그릇에 담긴 물을 뜻한다는 걸 내가 깨우치도록 애를 쓰셨지만 나는 알게 뭐냐는 듯 이 둘을 섞어 썼던 것이다. ㅋㅋㅋㅋㅋ
-74쪽
언어의 신비가 그 베일을 벗는 순간이였다. 나는 그제야 지금 내 손 위로 세차게 내리 꽃히는 이 차가운 물줄기가 ‘물’이라는 것의 정체임을 알았다. 살아 숨쉬는 낱말의 입맞춤을 받은 내 영혼은 긴 잠에서 깨어나 그가 가져다준 빛과 희망과 기쁨을 맛보았을 뿐만 아니라 비로소 자유를 찾았다.
-75쪽
올챙이가 내 손가락 사이를 돌아다니며 장난치는것이 느껴졌다. 그게 얼마나 재미있었는지 모른다. 어느 날 그 가운데 꽤 용감무쌍한 녀석 하나가 어항 밖으로 탈출을 시도했던 모양이다. 살았다고 보기 어려운 몰골로 마룻바닥에 누워 있는 한 녀석을 발견했다. 꼬리를 꿈틀거리는 것으로 제가 아직 살아 있다는 유일한 신호를 보내오고 있었다. 그러나 물 속에 집어넣자마자 웬걸, 바닥에 닿기가 무섭게 튀어오르더니 활개를 치며 헤엄을 쳐대는 것이었다. 이제 녀석은 알았을 것이다. 어쭙잖은 용기 한 번 부려 넓은 세상도 봤고 죽다 살아났으니 개구리로 성장 하기까지는 이 작은 유리 집, 키 큰 푹샤나무 아래서 얌전히 지내는 것에 만족해야 한다는 것을. 후에 녀석은 정원 구석에 있는 수풀 우거진 연못으로 이사해 사랑의 세레나데를 부르며 여름밤을 보내게 되었다.
-96쪽
한 시간 또 한 시간 저 높은 허공 어디에선가 소리도 없이 부드럽게 눈송이는 나리고 땅 위에 떨어진 눈은 점점 쌓여 높낮이를 알 수 없는 눈세상을 만들었다.
길이란 길은 죄다 눈 속에 파묻히고 이곳이 어디인지를 알리는 표지판 하나도 보이지 않는, 다만 나무에서 떨어진 눈만이 제 키를 계속 키울 뿐이었다. 저녁에는 북동쪽으로부터 세찬 바람이 불어와 눈송이들이 여기저기서 심한 난투극을 벌였다.
-121쪽
→ 보이지 않기 때문일까 기억을 감각에 기반하여 이야기를 하고 은유적인 표현을 통해 현상을 설명하기에 아름답게 느껴진다.
나는 무엇 하나 그냥 지나치는 적이 없었으며 잠시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마치 살 날이 얼마 되지 않아 자신의 모든 존재를 한 날에 모두 쓸어담으려는 조그만 하루살이 벌레처럼 그렇게 스물네 시간조차 부족하다 싶을만큼 바쁘게 살았다.
-112쪽
파도는 한판 놀아보자는 듯 나를 거칠게 몰아붙이며 시시덕거렸다. 무서웠다! 견고한 땅에서 잠시 벗어났다고 해서 이처럼 일순간 생명도 공기도 온기도 사랑도 사라지고 이렇듯 낯설어지고 마는 것인가. 그러나 바다도 결국은 새 장난감에 싫증이 났던지 나를 해변에 내동댕이쳤고 나는 선생님의 품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누가 물에 소금을 탄거지?”
→ 이 생각이 너무 어리고 순수한 생각인 것 같아서 인상깊었다.
-109쪽
나는 어디서나 마치 외국인처럼 통영을 세우고 말하는 이방인 신세일 수밖에 없었다.
→ 장애인들이 이방인처럼 느끼지 않게 하는게 중요한데 너무나도 힘들고 아쉬운 부분인 것 같다…
앞으로 낸시 이야기를 다시 꺼낼 기회가 없을 것 같아 잠시 보스턴에 도착한 후 그녀에게 일어난 슬픈 사건에 대해 말하려 한다. 사실 낸시는 평소보다 좀 지저분했었다. 왜냐하면 내가 진흙 파이를 먹였기 때문이다. 물론 낸시가 한번도 그게 맛있다고 칭찬한 적이 없었던 걸로 보아 그날 또한 낸시가 먹고 싶어해서 먹인 건 아니었을 게 뻔하다.
→ 정말 골때리는 사람이다 어찌 생각하는게 이리 순수하고 웃긴지
나는 열심히 공부했다. 아름다움과 빛을 향해 활짝 열린 신세계가 내 앞에 있었다. 내게 이 모든 것을 받아들일 능력이 있음을 나는 확신했다. 인간 정신의 놀라운 왕국 안에서 나 역시 누구 못지않은 자유인이요. 이 나라의 사람들, 경치, 풍습, 기쁜 일 슬픈 일 모두가 실제 세계를 알리는 살아 숨쉬는 통역자들인 것이다. 강의실은 위인과 현자들의 정신으로 충만했으며 교수남들은 하나같이 지혜의 화신이였다. 사실이 그렇지 않았다면 결코 이런 말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184쪽
가장 절실한 것은 예나 지금이나 시간이 부족하다는 것이었다. 내 속으로 침잠해서 또 다른 나와 더불어 생각하고 반성하곤 하던 시간이 대학에 와선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하루를 마감하는 저녁이면 그렇게 영혼이 들려주는 내면의 소리를 듣곤 했는데 따로 시간을 내지 않고서야 어찌 사랑하는 시인의 노래가 이제껏 침묵으로 일관해온 영혼에 울리는 깊고 달콤한 선율을 들을 수 있겠는가.
-185쪽
한마디로 말해서 문학은 나의 유토피아요. 나는 그 나라의 당당한 국민의 한 사람이다. 내가 나의 유토피아인 책의 나라에서 내 친구들과 친교를 나누는데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는 내 육체적 장애는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다. 내 친구들 또한 내게 말을 거는 일에 조금도 거북해하거나 당황해하지 않는다. 내가 배우고 깨달은 것이 무엇이든 그들의 큰 사랑과 자비에 견준다면 하등 중요치 않은 것들일 뿐이다.
→ 마더 테레사, 설리번 선생, 신애라 등등 내가 아는 사람들 속에서만 이름을 나열 한 것이지만, 그 외에 정말 수도 없이 많은 위대한 여성들이 있다. 그들은 사랑과 따뜻함으로 부족하고 소외된 자들을 자기 품에 들여 대지의 여신 가이아와 같이 포근함을 전한다.
이러한 여성들을 누군가는 이기적인 자기만족의 이유에서 자선을 행한다고 하고 누구는 Nobless Oblige 와 같이 가진자만이 할 수 있다는 말을 하며 그들의 위대함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흙을 묻힌다.
그런 악플러 혹은 헤이터들은 그 위대하고 거대한 가이아 앞에 대치한 자신의 생존에 급급해하는 곱등이와 같은 존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