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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거니 Feb 04. 2022

있을 때 잘해 후회하지 말고

사람이 귀한 시대를 꿈꾸며

퇴사 이후 남겨진 내 빈자리에 앉은 분을 만났다. 휴직 중에 급히 호출을 받았다고 한다. 일은 어떠냐고 물어보니 한숨을 쉰다. 회사도, 상사도, 미칠 듯이 쏟아지는 업무도 그대로다. 이걸 다 어떻게 쳐냈냐며 혀를 내두른다. 알고보니 아직 일을 다 넘겨받지도 않았다. 처음부터 그대로 줬다가 이 사람마저 나가면 안 된다는 마음이겠지. 다른 팀에 비해 바쁜 데다 상사도 까탈스러워 이전에도 많은 이들이 퇴사를 했다.


위에서는 나름 배려를 한거다. 물론 전체 업무량을 줄여주지는 않는다. 옆팀에서는 하도 팀원이 나가니 신입사원에게 일을 적당히 시키라는 지침이 내려온다. 퇴사를 하겠다고 하면 편한 팀으로 바꿔주겠다, 진급 시 긍정적으로 고려하겠다, 연봉을 올려주겠다... 는 얘기는 안 하지만 (비용절감에는 진심인 회사였다) 어쨌든 살살 구슬린다. 조직에서는 역시 목소리 큰 사람이 떡 하나를 더 받는다.


있을 때나 잘해주지 왜 나가려고 하니까 난리를 치는 걸까. 난 이런 순간을 '잡은 물고기 상황'이라고 부른다. 자기 그물에 들어왔다고 생각하면 사람 취급도 안 하다가, 제 발로 나가겠다고 하면 갑자기 우쭈쭈를 하는 현상을 말한다. 회사나 연인 관계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한 지인은 나가겠다고 하니 부사장이자 사장의 아드님 되시는 분께서 연봉을 올려주고 진급도 시켜주겠다고 했단다. 물론 웃기지도 않는 회사라 뒤도 안 돌아보고 뛰쳐나왔다고 한다. 왜 잡은 물고기에겐 밥을 잘 주지 않는 걸까? 관심을 주는 행위에는 에너지가 들어간다. 에너지를 아끼고자 하는 게 인간의 본성이다. 그게 정신적이든 경제적이든 육체적이든 말이다.


그 결과 잡힌 물고기는 딱 생존할 만큼의 밥만 얻어먹게 된다. 그러다 나가겠다고 하면 그제야 '창고 대방출'을 시작한다. 어떻게 보면 효율적이다. 적재적소에 에너지를 활용할 수 있으니까. 하지만 상대방도 사람이다. 점차 회사나 파트너에 대한 인식이 안 좋아진다. 연봉 인상이나 사랑한다는 말로는 부족한 시점이 온다.


있을 때 잘하라는 말은 비단 부모님이나 연인에게만 적용되는 건 아니다. 조직에서도 조직원을 잘 대우해야 한다. 그렇다고 매번 퇴사를 가지고 협상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처음 한두 번은 통할지 몰라도 남용하다 보면 조직도 알게 된다. 이 사람은 절대 나가지 않을 거라는 걸. 헤어지자는 말을 입에 달고 사는 연인을 생각해보자. 역으로 이별을 통보받는다.


사람은 잘 변하지 않는다. 사람이 모인 조직은 오죽할까. 아무리 경영진의 의욕이 넘쳐도 조직 전체를 바꾸긴 어렵다. 키를 열심히 돌려도 거대한 배는 조금씩 움직인다. 그래서 위에 있을수록 신중해야 한다. 자기 기분이나 일시적인 트렌드에 따라 이리저리 방향을 틀면 현장에서는 대혼란이 벌어진다.


열심히 제설작업을 했는데 지나가던 사단장의 "허허, 이 부대는 낭만이 없구먼" 이 한마디에 눈을 다시 덮어놓았다는 군대 잔혹동화도 있지 않은가. 특히 '알아서 기는' 수직적인 조직의 경우 상사의 말 한마디는 더 큰 무게감을 갖는다. 창고 청결상태를 사장님께서 손수 체크한다고 하니 난리법석을 떨던 전 상사가 생각난다. 평소에는 키보드에 손도 안 대던 귀하디 귀한 분이었는데 그렇게 신속하게 움직이다니. 역시 조직은 먹이사슬의 연속이다.






대퇴사시대나 인구절벽 등의 흐름이 이런 관행을 조금이나마 바꾸진 않을까 하는 기대를 살짝 품어본다. 사람이 귀한 시대는 언제쯤 만나볼 수 있을까. 너 말고도 일할 사람 많아, 넌 회사의 부품이야 식의 스탠스로 일관하면 조직원 역시 회사를 그저 환승역 정도로 생각한다. 애사심까진 아니어도 최소한 조직에 사람이 남아있어야 유지가 될 텐데 말이다.


실제로 얘기를 나눠보면 회사에 뼈를 묻겠다는 사람이 거의 없다. 임원으로 진급하고 싶다는 이도 없다. 욕심이 없어서가 아니라 오히려 욕심이 많아서다. 회사는 이미 이들의 욕구를 충족시킬 수 없다. 그래서 기회만 생기면 나갈 채비를 한다. 근무 마지막 날, 인사를 하러 다니는데 '좋은 자리 있으면 소개시켜줘'라는 말을 정말 많이 들었다. 심지어 억대 연봉을 받는 부장님도. 이 회사에는 정말 미래가 없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코인 대박 + 주식 대박 + 부동산 영끌 + 무조건 저축' 전략으로 조기 은퇴를 하겠다는 파이어족도, 인생 2막을 준비하는 중간관리자도, 입사한 지 일주일도 안돼서 다른 회사 공고를 뒤적이는 신입사원도 퇴사를 꿈꾼다. 회사에서 주는 (크지도 않은) 경제적 보상만이 모두를 붙드는 유일한 끈이라면 조직원의 다양한 욕구를 담아내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회사가 돈 버는 곳이지 그럼 뭐 어쩌라는 거냐' 식의 생각을 가지는 건 자유다. 하지만 회사 경영진의 마인드셋이 저렇다면 곤란하다.


최근 들은 강연에서 강사가 이런 얘기를 들려준다. 자기가 아는 한 스타트업의 CEO가 최근 면접을 봤다고 한다. 면접관이 아니라 면접자로서. 능력 있는 개발자를 데려오려고 자료도 준비해서 열심히 설득했다고 한다. 그 개발자는 이미 다른 회사에서 스카우트 제의를 받은 상황이었다. 그는 연봉이나 복지가 아니라 회사의 비전을 물었다. 내가 왜 당신의 조직에 합류해야 하는지 설득해봐라 이거다.


'우리 회사에 지원하게 된 동기가 뭡니까?'라는 질문에 열심히 답해야 하는 대다수에게는 꿈같은 얘기다. 하지만 적어도 회사를 선택하는 기준이 예전과는 많이 변화했음을 느낀다. 여전히 높은 연봉이나 안정성은 중요하지만 그게 다가 아니다. 연봉과 안정성을 좇아 대기업에 들어갔다가 뛰쳐나오는 사람이 부지기수다. 공무원도 퇴사를 하는 세상이다.


당장 유튜브에 퇴사라는 단어만 검색해도 수백 개의 영상이 노출된다. 적어도 젊은 세대 사이에서 퇴사는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오히려 맞지도 않는 회사에 죽치고 앉아있으면 더 괴로워한다. 퇴사는 이제 하나의 트렌드이자 밈이자 목표가 되었다. 퇴사 브이로그를 올리고, 퇴사 일기를 쓰고, 경제적 자유 달성을 위한 체크 리스트를 게시한다. 정보 공유도 활발하다. 공감대를 형성할 퇴사 동지도 넘쳐난다.


그럼에도 퇴사는 여전히 망설여진다. 취업 준비라는 매몰비용도 생각나고 퇴사를 하게 되면 발생할 각종 기회비용도 있다. 아직까지는 주변에서 퇴사를 한 사람보다 하지 않은 사람이 더 많다. 그런데 퇴사를 하고 싶냐고 물어보면 하나같이 그렇다고 답한다. 그럼 왜 안 하느냐고 하면 먹고 사는 문제를 꼽는다. 반대로 말해 경제적인 이슈만 해결되면 퇴사를 하겠다는거다. 더 깊게 들어가면 현재 회사가 주고 있는 가치란 돈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말이다. 이보다 더 슬픈 관계가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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