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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거니 Mar 18. 2022

어떻게 내 전부까지 사랑하겠어

사랑할만하니까 사랑하는 거지

요즘의 치유공감힐링위로 에세이를 보면 나 자신을 사랑하라는 조언으로 넘쳐난다. 나는 그 자체로 사랑받을 자격이 있으며,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존재라고. 자기혐오나 자기 연민에 빠져있다가도 이런 문구에서 위안을 받기도 한다. 그런데 돌아서서 생각해보면 조금 이상하다. 세상 모든 사람에 앞서서 나를 사랑해야 할 이유는 무엇일까? 책을 뒤적거리다 보면 다음과 같은 대답을 듣게 된다.


1. 나는 사랑받을 만큼 사랑스러운 존재니까.

2. 나를 진정으로 사랑해줄 존재는 나밖에 없으니까.

3. 그래야 하니까.


나에 대한 사랑은 당연하면서도 당연하지 않다. 사랑을 하는 주체와 받는 주체가 동일하기 때문이다. 이건 마치 자기 자신에게 훈장을 내리는 모습과 비슷하다. 무슨 학술적인 근거까지는 없더라도 적어도 납득할만한 사소한 무언가라도 있어야 하지 않을까? 애초에 자기혐오나 연민에 빠지는 데에는 강력한 동기가 있다. 그 결과를 뒤집을 정도로 분명한 계기가 없다면 '나에 대한 사랑'은 그저 공염불에 불과할지 모른다.


한편으로는 자기애의 필요성을 역설하며 이건 자신에 대한 의무라고 주장할 수도 있다. 내가 사랑받을만한 존재여서 사랑을 하는 게 아니라, 사랑해야 하는 존재여서 사랑을 한다는 말이다. 아이가 매 순간 예쁘지 않더라도 무한한 사랑을 줘야 하는 것처럼. 자기애는 나라는 존재로 살아가는 동안 내게 부여된 규칙이다. 세상 그 누구도 나를 나만큼 아껴줄 수는 없으니까. 어느 정도 납득이 되는 말이다. 자기애는 지나치지만 않으면 분명 삶에 도움이 된다. 자신을 혐오하거나 동정해서 얻을 수 있는 건 없다. 제 마음에 생채기를 내며 느껴지는 묘한 자기 파괴적 쾌락밖에 없지 않을까?


다만 여전히 의문이 남는다. 자기애를 사랑의 한 형태로 인정한다고 하면 (필요성을 포함하여) 내가 사랑하는 대상은 누구일까? 이건 생각보다 중요한 문제다. 이해를 위해 나르키소스 신화를 간단하게 살펴보자. 그리스-로마 신화에 등장하는 나르키소스는 고백을 매몰차게 거절한 대가로 저주를 받는다. 바로 연못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사랑하게 되는 저주를. 그는 오매불망 물에 투사된 자신의 이미지를 소비한다. 하지만 영영 닿을 수는 없다. 그가 손을 뻗어 수면에 닿는 순간 이미지는 물결과 함께 흩어져버리니까. 그렇게 나르키소스는 자신의 이미지와 분리되어 살아간다.


그럼 나르키소스는 누구를 사랑한 걸까? 자기 자신? 아니면 자기 자신의 이미지? 아니면 다른 누군가? 신화에 자세히 묘사되지는 않지만 아마도 나르키소스의 마음속에 있는 애정의 대상은 그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이었을 것이다. 정확히는 자신의 이미지를 가지고 나타난 타인이다. 물론 외부에서 보기에 그는 자기애가 넘치는 사람이다.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역설적이게도 나르키소스는 나르시시스트가 아니다. 그저 환상만을 좇는 불쌍한 청년이었을 뿐.


나르키소스가 사랑한 건 허상이다. 그럼 내가 나를 사랑한다고 했을 때, 실상은 그림자를 좇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불안감이 엄습해온다. 단순히 사랑의 주체와 객체가 동일하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보다는 사랑하게 되는 '나의 영역' 내지는 '범주'가 어디까지인지를 확신할 수 없어서다. 영화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에서 두 주인공은 연인을 자신의 이름으로 부른다. 이는 변형된 자기애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들은 서로의 존재를 사랑하며, 동시에 서로를 사랑하는 자신을 사랑한다. 그래서 자신의 이름으로 상대방을 부르는 것이고, 또한 서로의 눈동자의 비친 나의 모습을 응시한다. 이런 맥락에서 내가 사랑한 나의 모습은 '너를 사랑하는 나'다.


처음 언급한 치유공감힐링위로 에세이가 전하는 메시지가 허망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나를 어디까지 사랑할지, 어떻게 사랑할지, 또 왜 사랑해야 하는지 말하지 않고 무턱대고 자신에 대한 사랑을 강요하기 때문이다. 물론 앞서 살펴보았듯이 나를 사랑하는 건 분명 자신에게 유익한 행위다. 다만 그렇다고 해서 꼭 자신을 사랑할 필요는 없다. 그리고 사랑하기로 마음먹었다면 그 대상을 명확하게 해야 한다. 나르키소스와 같은 실수를 하면 안 되니까. 그는 거짓된 이미지를 중독적으로 소비했고, 결국 목숨을 잃는다. 그러고 나서 물망초라는 꽃으로 다시 태어난다. 이름 그대로 '나를 잊지 마세요'라는 꽃말을 가진 존재다. 기억해야 한다. 나를. 나는 '나'를 사랑해야 하는 것임을.


그럼 나에 대한 사랑도 선택적으로 해야 하는 걸까? 그건 말 그대로 선택하기 나름이다. 자신을 사랑할 단단한 이유를 찾든, 아니면 맹목적으로 사랑하든 그건 개인이 결정할 문제다. 사랑을 위한 사랑이 필요할 때도 있지만 오래가진 못한다. 나 자신을 사랑받을만한 존재로 만드는 것. 내 사랑, 그리고 다른 누군가의 사랑을 얻을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내 인생에도 도움이 되니 손해 보는 장사는 아니다. 그렇다면 실상은 나를 사랑하기 위해서 누군가가 나를 사랑하게 만드는 노력 또한 필요하다. 자신에게는 무한대로 솔직해질 수 있는 게 사람의 본능 아니던가. 다른 사람은 몰라도 적어도 나를 속이면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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