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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거니 Mar 24. 2022

이 선 넘으면 침범이에요

- 가족과 연인: 20cm

- 친구: 46cm

- 회사 동료: 1.2m

- 일반 대중: 3~5m


관계별로 알맞은 물리적 거리다. 무조건 가깝다고, 혹은 멀다고 좋은 게 아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항상 적절한 거리감이 필요하다. 중간에 있는 그 빈 공간만큼 상대방을 받아줄 여유가 생긴다. 특히 사랑하는 사람과 있을 때에는 더 의식적으로 지킬 필요가 있다. 공적인 사이에서는 사실 가까이 접근할 경우가 드물다. 만원 지하철이 아닌 이상은 말이다. 사회 속에서 모든 사람은 암묵적인 규칙을 지킨다. 그중 하나가 사회적인 거리다.


다만 사적인 관계에서는 이런 거리두기가 잘 지켜지지 않는 경우가 있다. 오히려 간격을 확 좁혀서 진공포장처럼 붙어있는 게 더 좋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물론 경우에 따라 맞는 말이다. 하지만 반대도 있다. 가장 가까운 이와도 어느 정도 멀어지고 싶은, 그런 때가 있기 마련이니까. 문제는 상대방이 그 신호를 눈치채지 못하고 계속 선을 넘을 때 발생한다. 행동을 지적하면 관계의 진정성마저 의심을 받는다.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어? 이런 말이 절로 나온다. 그게 아닌데. 그저 시간이 조금 필요할 뿐인데.


너는 나와 다르다. 나도 너와 다르다. 다른 둘 이상의 사람이 같이 살아가려면 이런 기본적인 전제를 생각해야 한다. 요즘 본가에서 살아가며 정말 뼈저리게 느낀다. 물론 좋은 점도 많지만 힘든 점도 여기에서 온다. 사이가 안 좋은 부부가 휴지 거는 방향 하나로 말다툼을 한다는 게 정말 농담이 아니다. 같은 공간에서 누군가가 살아 숨 쉬고 있다는 건 생각보다 굉장히 큰 일이다. 학창 시절이나 군대에서야 어쩔 수 없는 측면이 있으니 그냥저냥 버틴다고 치자. 이제 사회생활도 하고, 내 취향껏 공간을 쓰고 싶은데 누군가의 존재는 큰 짐이 된다.


이 모든 갈등을 사랑이라는 단어 하나로 해결하기에는 역부족이다.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다. 오히려 사랑하기 때문에 더 갈등의 골이 깊어진다. 사랑이란 기대니까. 군대 내무반에서 누군가 양말을 책상 위에 올려도 별로 화가 나지 않는 건, 그만큼 기대가 없어서다. 어차피 다 같이 끌려온 사이인데 무슨 미련이 있겠는가.


하지만 가까운 사이일수록 서로에게 거는 기대감이 커져간다. 거창한 기대도 아니다. 그저 내 마음을 조금은 알아줬으면 하는, 그리고 내게 맞춰줬으면 하는, 딱 그 정도다. 그런데 써놓고 보니 이렇게 비현실적일 수가 있을까? 사실 나라는 사람도 다른 가족 구성원에게는 그런 존재겠지. 마음대로 되지 않고, 마음을 알아주지도 않는, 그런 존재. 물론 여기까지 생각이 미친다고 해서 아무렇지 않은 건 아니다. 휴지 거는 방향이 반대로 되어 있으면 또 화가 치민다. 짜증이 난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거리감이라는 건 단순히 마음만 먹는다고 얻어지는 게 아니다. 물리적인 분리가 필요하다. 사실 자취를 하던 시절에는 겪지 않았던 일이다. 본가에도 한두 달에 한번 정도만 방문했기에 여행을 가는 기분이다. 여행이 일상이 되는 순간, 사람은 여정을 멈추게 된다. 조금 다른 얘기지만 그래서 난 세계여행에 대한 로망이 없다. 더구나 가족과 같이 가는 세계여행? 가지 않는 게 낫다.


물론 누군가는 가족과 사이가 너무 좋아서 붙어있어도 즐겁고 행복한 경우가 있겠지. 그런 사람조차도 매 순간 유쾌하진 않다. 나 자신과 사는 시간도 힘들 때가 있는데, 다른 사람은 오죽할까. 그저 숨 쉬듯 당연하니 넘기고 또 넘길 뿐이다. 개인적인 공간과 시간이 중요한 나에게는 본가 생활이 힘들 때가 있다. 물론 아까도 말했지만 그건 가족들도 마찬가지다. 나 때문에 힘든 순간이 있겠지. 그래서 서로 배려하고 인내하고 넘어가는 부분도 많다.


결국 언젠가는 나만의 공간을 찾아 나서야 한다. 난 물건에 대한 욕심은 없어도 공간에 대한 욕심은 있다. 내게 공간이란 사람이다. 어떤 사람과 얼마나 많은 삶의 부분을 공유하는가, 그게 공간이다. 꼭 자연인처럼 산속에 있다고 해서 행복하지도 않고, 북적북적한 도미토리에 있다고 꼭 불행하지도 않다. 결국은 사람의 문제다. 가족이 싫다는 게 아니다. 약 10년 가까이 가족과 떨어져 지내며 다른 삶의 반경을 나름대로 형성했을 따름이다. 이건 나이를 먹어가며 아마 더 깊어질 마음이겠지.


한편으로는 물리적인 의미로서의 공간에 나 자신을 듬뿍 담아내고 싶다. 내 취향과 라이프스타일이 한껏 드러 나는 그런 공간을 꾸미고 싶다. 이런 욕망은 인테리어를 넘어 공간의 의미에 와닿는다. 이 공간은 내게 어떤 의미인가? 단순히 잠자고 밥을 먹는 공간? 내가 나일 수 있는 공간? 아니면 그 이상? 공간의 의미란 감정일 수도 있고, 용도일 수도 있고, 관계일 수도 있다. 이래서 다들 내 집을 마련하려고 용을 쓰는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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