받을 수는 있을까
책『정확한 사랑의 실험』은 다음과 같은 구절로 시작한다.
그러나 정확하게 표현되지 못한 진실은 아프다고 말하지 못하지만,
정확하게 사랑받지 못하는 사람은 고통을 느낀다.
- 신형철,『정확한 사랑의 실험』, 마음산책(2014), 7p
정확하게 사랑받는다는 것, 정확하게 사랑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사랑이라는 감정에 정확이라는 수식어가 가당키나 한 걸까? 정확함이라는 단어는 이성과 논리의 영역에 남을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이성과 논리는 사랑의 입장에서 보면 초대받지 않은 손님에 가깝다. 그러나 사랑을 하다 보면 알게 된다. 뛰는 가슴만큼이나 머릿속에서 정리한 사랑에 대한 관념이 관계를 이어감에 있어서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는 걸. 그리고 사랑에 관한 많은 문제가 정확하지 못하게 행해진 여러 말과 행동으로 인해 발생한다는 걸.
연애를 하다 보면 가끔씩 '너는 나를 왜 사랑해?'라는 질문을 듣게 된다. 이는 사랑을 정확하게 확인받고 싶어 하는 욕망이 투영된 물음이다. 만약 상대에 대한 어떠한 관념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그리고 그 관념이 보다 명시적인 언어의 형태로 표현될 수 없다면, 상대방은 관계의 진정성에 의구심을 품게 된다. 그렇다고 사랑이 논리적으로만 설명될 수는 없다.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논리적인 답변이라는 게 과연 존재하기는 할까?
이는 정확함이라는 단어가 쓴 누명에서 비롯된 오해다. 정확함이란 비단 논리적이고 이성적인 영역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그보다는 그 사람이 가진 감정을 비롯한 여러 관념의 총체가 보다 더 확실한 기반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는 설명에 가깝다. '너는 나를 왜 사랑해?'라며 상대방이 물었을 때 머릿속으로 계산기를 두드릴 이유는 없다는 소리다. 본인이 가진 감정을 있는 그대로, 하지만 조금 더 확실하게 드러내면 된다. 정확하다는 건 그런 거다.
신형철 작가는 책『정확한 사랑의 실험』을 통해 사랑 이야기를 한다. 정확히는 각종 영화가 보여주는 사랑의 모습을 비추어준다. 흔히 말하는 로맨스 영화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스릴러 영화부터 성장영화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스펙트럼의 바다에서 헤험친다. 일견 어려운 단어와 문장으로 쓰였지만 찬찬히 곱씹을수록 그가 말한 '정확한 사랑'이라는 개념이 무엇인지 분명해진다. 결국 어떤 형태로든 표현할 수밖에 없다면 사랑이란 그토록 정확해져야 한다고, 그는 말한다. 앞서 언급한 구절과 같이 정확하게 사랑받지 못하는 사람은 고통을 느끼니까.
지난 세월 씁쓸하게 끝나버린 사랑을 반추해본다. 그때마다 난 비겁했고, 또 정확하지 못했다. 사랑이라는 게 뭔지, 나는 너를 왜 사랑하는 건지, 애초에 사랑하기는 하는 건지 알지 못했다. 표면상으로는 연애라는 형태로 나타났지만 그걸 과연 사랑이라고 부를 수 있을지 모르겠다. 연애감정과 사랑, 좋은 기분과 사랑, 좋아함과 사랑은 엄연히 구분되어야 할 감정이다. 그런 의미에서 난 정말 누군가를 사랑해보았을까.
반대로 나 역시 과연 정확하게 사랑받았는지 떠올려본다. 정확한 사랑이란 애초에 무엇일까? 나라는 존재 그 자체를 인정받는 걸까? 만약 그렇다면 그렇게 정확하게 사랑해줄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지구 상에 존재할까? 물론 신형철 작가가 언급하는 '정확한 사랑'이란 연인관계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사랑이란 그보다 훨씬 더 방대한 관념이다.
이렇게 소결론을 내릴 수 있을 것 같다. 정확한 사랑이란 관계에서의 충만함을 위해서 필요한 조건 중 하나라고. 반대로 모호해진 관계는 상대방을 고통의 골짜기로 밀어붙인다고. 정확한 사랑이란 내가 너에게 줄 수 있는 무언가이면서 내가 받아야 하는 무언가라고. 내 다음 사랑의 모습은 정확해야 한다고.
고백컨데 내 브런치 작가 설명란의 두 번째 줄, '일상을 정확한 언어로 표현하는 일을 합니다'는 저 책의 영향을 받아 작성되었다. 그의 논리를 어설프게나마 이해하는 데는 오랜 시간이 필요했지만, '정확함'이라는 단어가 나를 온전히 사로잡았음을 알아차리는 데는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글쓰기가 세상과 나 자신에 대한 사랑 표현이라고 한다면, 정확한 언어로 정확한 글쓰기를 하는 게 나의 숙명이리라.
사실 지금까지 그 작업을 잘 해왔는지 알 길은 없다. 내가 글쓰기를 정확하게 해왔는지, 글쓰기 또한 나를 정확하게 표현했는지 말이다. 지금까지는 큰 고통 없이 합이 잘 맞고 있으니 나름은 잘해오고 있다고 자기 위안을 삼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