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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펭귄들의우상 Jun 17. 2024

운전을 배웠어야 했다.

대체 언제까지 뚜벅이

대학에 갓 입학한 예과 시절 동기 3명과 함께 강원도를 놀러 간 적 있다. 가서 뭘 하고 놀지 계획을 세우는데, 아무도 운전을 할 수가 없으니 그냥 한 곳에서 놀기로 정해버렸다. 결국 돌아오는 기차를 타기 위해 강릉역 근처에서 카페를 간 것을 제외하고는 숙소 근처 1km를 벗어나지 않았다. 그때는 그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언젠가는 운전을 할 거고, 그때 가서 배우면 문제없을 거라 생각했다.


사실 20살이 되던 해 면허는 이미 땄다. 대학에 들어가기 전 이때가 아니면 마흔은 돼야 딸 수 있다는 주변 사람들의 말에, 학원을 등록하니 어찌어찌 면허를 받게 됐다. 운전이 딱히 어렵고 못하겠다는 생각은 없었으나, 미숙한 실력으로 사람을 치거나 주변에 부딪히면 어떡하지 하는 마음이 컸다. 도로주행 시험을 담당해 주셨던 감독관은 합격을 축하해 주시면서 '침착하게 하고 다 좋은데 차가 너무 느리다. 이러면 나중에 문제가 생길 수 있다.'라는 우려 섞인 조언을 해주셨었다. 아무래도 그때의 내가 감당하기엔 두려움이 컸나 보다.


면허를 딴 뒤, 어차피 당장 차가 있는 것도 아니고 차가 필요한 상황도 아니라 나중에 연수를 받으면 운전할 수 있게 되지 않을까 하는 단순한 생각뿐이었다. 면허를 따자마자 바로 운전을 시작하는 친구를 보면 그저 대단하다 생각할 뿐이었고, 면허를 받고 바로 가족 전체를 태우고 서울에서 부산을 갔다 온 동기를 보고는 그 가족들도 대단하다 생각했다. 그 정도였다 그냥.


시간이 지나면서 나이는 한 살 두 살 먹어가고, 주변에는 운전을 할 수 있는 친구를 넘어서 자차가 생긴 친구들이 등장했다. 집이 잘살아서 부모님이 사주신 친구들도 있었고, 부모님이 차를 바꾸면서 차를 넘겨받은 친구들도 있었고, 알바를 통해 돈을 모아서 중고차를 구매한 친구도 있었다. 그때까지도 별 생각이 없었다. 운전도 못하는데 차는 있어서 뭐 하냐 라는 생각도 들었고, 어딜 돌아다니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는 성격이기에 운전을 해봤자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다. 부모님은 슬슬 운전을 해야 하지 않겠냐, 부모님 차로 운전을 천천히 시작해 봐라 등 권해주셨지만 그때마다 시큰둥한 반응만 보였다.


그리고 시간이 더 지나면서 주변 남자 동기들이 대부분 운전을 할 수 있게 되었을 때, 뭔가 나와 그들 사이에 큰 차이가 있다는 걸 느꼈다. 모든 약속 장소를 광역버스나 전철이 닿는 위치에서만 잡을 수 있던 나와 다르게, 그들의 행동에는 제약이 없었다. 주말에 갑자기 캠핑을 떠날 수도 있었고, 교외에 있는 예쁜 카페에 갈 수도 있었다. 학교를 길게 다니면서 광역버스로 갈 수 있는 곳들은 웬만큼 다 가본 나는 항상 다니던 곳만 다녔고, 웬만하면 을지로, 사당, 한남, 강남을 벗어나지를 않았다.


우연한 기회에 모 제약회사에서 주최한 입사 설명회에 다녀오게 됐고, 거기서 또 우연히 동기를 만났다. 신라호텔에서 이뤄진 입사 설명회라 학교에서 올라가는 게 굉장히 곤란했는데, 동기를 만나자마자 '아 학교로 돌아가는 건 저 친구 차를 타고 가야겠다' 하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내 표정을 본 동기도 '너 내 차 타고 갈 생각에 좋지'하며 웃었고, 그냥 깔깔거리고 말았다. 비가 오던 그날 학교로 돌아가는 길은, 정확히 올라가는 데 걸린 시간의 절반이 채 걸리지 않았다.


이번 사태로 한창 일반의 자리를 구하는데 내게 가장 중요한 건 거리였다. 엄밀하게는 거리라기보다도 몇 번 갈아타야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는지였다. 면접을 간 병원마다 자차는 있는지 물었고, 조금 먼 지역으로 갔더니 차도 없이 어떻게 올 생각을 했냐고 물었다. 운전을 할 수 있었으면 어떻게든 갈 수 있었을 거리가, 그게 안 되는 나에게는 지원조차 할 수 없는 장벽으로 느껴졌다.


이런 에피소드는 지금 생각나는 것만 이 정도지 셀 수 없이 많다. 제주도에 졸업여행을 가서 며칠 더 놀고 올라가기로 했을 때, 걸어서는 제주공항을 빠져나갈 수 없는 구조에 그냥 공항에 갇혀 2시간 동안 차를 타고 올 친구를 기다리기도 했다. 처음 한 두 번 어려움을 느낄 때는 감수해야지 했는데, 이게 반복되니 정말 불편하더라. 꼭 자차가 없어도, 운전을 할 줄 아는 친구들은 쏘카를 빌려서든 렌트를 해서든 잘들 놀러 다녔고, 뚜벅이가 갈 수 있는 세상은 현실적으로 벽이 있는 느낌이다.


뜬금없지만 난 비가 정말 싫다. 비가 오면 바지 밑단이 젖고 신발이 더러워지는 것도 물론 싫지만, 기본적으로 두 손이 편하게 다니고 싶은데 우산을 들어야 하는 게 아주 귀찮다. 평소에 어떻게 하면 짐을 줄여서 가방을 안 들고나갈까 고민하는 나에게 우산을 드는 건 아주 신경을 자극하는 일이다. 왜 이렇게 비를 싫어하냐는 주위 사람들의 말에 이런 이유를 댔더니, 언젠가부터 '운전을 안 해서 그래'라는 답이 돌아왔고, 요즘은 그게 정답이라 느낀다.


20살에 면허를 딴 일은 정말 잘했다고 생각한다. 그때 시도하지 않았으면 지금까지 면허도 없는 채였을 테니. 지금 그때로 돌아가면, 면허를 따자마자 연수를 받았을 것 같다. 짧게 몇 주라도, 내 능력이 부족하다면 몇 달이라도, 돈 아까워하지 않고 기본적으로 운전을 할 수 있는 상태를 만들어둘 것 같다. 할 수 있는데 하지 않는 것과, 할 수 없어서 신 포도인 척하는 건 너무 큰 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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