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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누구보다 내게 필요했던 감각

받아쓰기란 무엇인가.

by 룰루박

2020년은 4차선 아우토반에서 갑자기 잠수함이 튀어나온 것 같은 해였다.


맥주 이름으로 친숙했던 코로나로 인해 초등학교 2학년 아이는 유례없는 온라인 수업으로, 나와 신랑은 재택으로, 세 식구가 한 집에 하루 종일 몇 달간 부대끼는 경이로운 경험을 하게 된다.



#온라인 수업

재택 용 책상 옆에 아이가 온라인 수업을 받을 수 있도록 자리를 세팅해두었다. 업무를 보면서도 아이가 수업을 받는 모습을 곁눈질로 살펴볼 수 있어 만족도가 큰 배치라 생각했다.


초반에는 일하며 온라인 수업을 받는 아이의 모습을 곧잘 훔쳐보곤 했다. 하지만 줌(Zoom) 화면을 통해 조곤조곤 또렷하게 들려오는 선생님의 언어를 제대로 알아듣지 못하고 계속 멍 때리는 아이를 보자니, 근본 없는 화가 치솟곤 했다. 하지만 아이의 체면도 있겠고 수업 중에 개입하는 것도 영 아닌 듯하여 노이즈 캔슬링 헤드셋을 끼고는 크게 신경 쓰지 않으려 노력했던 날들이었다.


#받아쓰기

온라인 수업을 하더라도 받아쓰기는 여전히 진행되었다. 선생님 백점 맞은 아이 그리고 하나 틀린 아이, 그리고 2개에서 4개 틀린 아이 그리고 그 이하의 차례로 손을 들게 하는 것 같았다. 화상 수업 특성상 모든 아이들의 얼굴이 보이고 한글이 아직도 취약한 아이는 늘 막판 꼴찌 차례로 손을 들어야 했다. 노이즈 캔슬링으로 소리가 명확하게 들리진 않았지만 아이의 표정에 고스란히 나타나는 난처함과 수치스러운 표정을 제대로 목격하게 된 어느 11월의 어느 목요일...


노래 한곡이 끝나고 또 다른 한곡으로 넘어가는 사운드가 공백이 되는 순간, 아이의 숨소리가 거칠어지면서 훌쩍 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내 모니터를 보는 척하며 눈을 살짝 들어 아이의 표정을 휙 살피려는데 아차, 눈이 마주쳤다. 아이는 울음을 꾹 참고 있었나 보다. 그러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왕 터져버렸다.


은유적 표현으로만 알고 있었던 닭똥 같은 눈물이 실제 존재한다는 것을 확인을 해주듯, 쉴 새 없이 흐르는 눈물을 흘리며 아이는 나에게 외쳤다.


엄마. 나만 못하는 거 정말 싫어

순간 나는 11월 현장 직원 급여를 계산하니라 엑셀에 수식을 넣고 있었다. 아이의 외침을 듣고 나도 모르게 컴퓨터를 덮고는 헤드셋을 벗었다. 그런 나를 보며 예준이는 얼른 화면의 음소거 표시를 눌렀다.

눈물을 질질 흘리면서도 음소거를 누르는 아이를 보며 온라인 수업에 최적화가 되었구나 감탄하면서 한편으로 울고 있는 아이의 모습과 화면 너머 선생님과 아이들이 떠들고 있는 소리가 너무 괴리가 느껴졌다.

스스로 울고 있는 모습이 화면에 보이는 게 너무 싫었나 보다. 소매 끝으로 슬쩍 눈가를 훔치는 척하며 여전히 음소거를 누른 채, 고개를 숙이고 있는 아이를 옆에서 보고 있자니 마음이 너무 애잔했다.


한 번쯤은 백점을 맞는 기분이 어떤 것인지, 그것도 자신의 에너지와 시간을 들여 노력을 한 뒤, 백점을 맞아보는 경험을 만들어 주고 싶었다. 사실 40대에 들어서니, 초등학교 때, 받아쓰기 백점을 몇 번 받는다는 사실 자체가 무슨 의미가 있나 싶기도 했다. 하지만 비록 지금은 엉망이지만, 한 번 더 하면, 그리고 조금 더 해보면 어제보다는 조금 더 나은 하루가 될 거란 감각을 느끼게 해주고 싶었던 것이 솔직한 심정이었다.


11월, 12월 매주 목요일 아이는 평소보다 한 시간 일찍 일어나서 나와 받아쓰기 시뮬레이션을 하고 시험을 보게 된다. 그리고 12월 마지막 어느 목요일, 아이는 받아쓰기 백점을 맞는다.


백점 맞은 공책을 가만히 지켜보자니, 내가 기를 쓰고 아이에게 느끼게 해주고 싶었던 그 감각,

오늘은 엉망이지만, 한 번 더, 그리고 한 번 더, 하면 내일은 괜찮아진다는 그 감각,

누구 보다, 아이보다, 나에게 절실히 필요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2021년, 이 감각으로 잘 맞이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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