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으로 논에 가기 전 날 아버지는 법원에서 편지 한 통을 받았다. 형은 힘든 직장생활을 하는 대신에 이런저런 사업들을 벌였는데 사업 시작을 위한 자금들은 대부분 시골에 있는 부모에게서 올라왔다. 몇 마지기 논농사를 짓는 살림으로 사업자금을 대기에는 턱없이 모자랐지만 부모는 맏이인 형의 장래를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다했다. 한 해 농사를 지어서 얻은 소득은 대부분 형의 뒤치다꺼리에 들어갔다. 형은 어머니를 졸라 사업을 벌이는 일에는 열심이었지만 돈을 버는 일에는 능력이 없었다. 힘들고 어려운 일은 남에게 맡기고 위기의 순간이면 시골로 달려가 부모를 조르는 능력만으로 되는 사업은 없었다. 끝없이 반복되는 실패의 연속에 부모는 지쳐갔고 결국엔 모든 게 끝장 나는 날이 오리란 걸 예감했다. 형은 마지막 남은 농토를 담보로 맡기고 사업을 벌였다. 부모의 불길한 예상대로 사업은 얼마 버티지 못하고 무너졌고 아버지가 누대에 걸쳐 가꾸어 오던 땅은 은행의 소유가 되어 법원의 경매 처분을 받게 되었다. 아버지는 심신이 지쳐 있었고 아직은 더 살아도 좋을 연세에 평온한 삶을 마감했다. 낙심한 아버지는 황금빛으로 일렁이는 들판에 마지막으로 서 있었다. 풍년 농사에 곡식을 여물게 하는 가을 바람이 아버지의 가슴을 시원하게 해주었지만 더 이상 기대할 미래가 없음을 깨달은 아버지는 집으로 돌와와 누운 다음 다시 일어나지 못했다.
멀쩡하게 깨어있는 대낮에도 꿈을 꾸는 섬망이 나타나던 시절에 어머니는 형의 손에 이끌려 어디론가 가야했다. 은행에 도장을 찍으러 토지 소유자 본인이 가야 한다고 해서 형의 손에 이끌려 은행으로 갔는데 그 때 가지 말았어야 했다고 어머니는 뒤늦은 후회를 했다. 졸라대는 형의 등쌀에 못이켜 가지 않을 수 없었고 그 때문에 아버지는 숨을 거둔 거라고 했다. 아버지는 일찌기 땅의 명의를 어머니 앞으로 돌려 놓았다. 얼마 안 남은 땅을 지키기 위한 궁여지책이었다. 이미 담보로 들어가 있는 땅을 제외하고 나머지를 어머니 앞으로 해 놓으면 형의 빚잔치를 다소라도 피할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어머니의 섬망 속에 나타나는 형은 초조한 얼굴로 어머니를 졸랐다. 여러 차례 반복한 일이지만 이번이 마지막이라는 말로 어머니를 설득해 마지막 땅 한 자락까지 넘어가고 말았다. 어머니는 차마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정신이 혼미해지는 시점에 마지막 기억으로 남겨 둔 것일까. 방을 나와 마루에서 흰 고무신을 꿰어 신던 시간을 카메라는 어떻게 기억에 남겨 둔 것인지 나는 어머니의 상념 속에서 불안한 시절을 탐색해 보았다. 그것은 형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어느새 결혼해서 두 아이의 아버지가 된 가장이 살길을 찾기 위해서 할 일이 있다면 마다할 수 없었을 것이다. 능력이 안돼서 벌이가 시원치 않았지만 나름대로 최선을 다 하며 산 것이리라. 어린애들을 두고 이혼 얘기가 나오던 시절이었다. 무너져 가는 가정을 지키기 위해서 형은 힘든 선택을 했지만 결과는 좋지 않았다. 사업은 뜻한대로 되지 않았고 만만치 않았던 생존의 몸부림을 증명이라도 하듯 형은 중년의 나이에 큰 병에 걸리고 말았다. 과중한 스트레스 때문인지 간에 종양이 돌이킬 수 없을만큼 자라 있다는 것이었다. 수술이 불가능한 상태가 되어서야 병원을 찾을만큼 어려웠던 그의 현실은 땅을 잃었다는 것으로 비난할 처지가 아니었다. 두 번의 혈관 시술을 거친 후 더 이상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의사의 판정을 받고 형은 하루 아침에 와병의 상태가 되었다. 먹고 사느라 바쁘게 뛰어다니던 사람이 불과 몇 달 사이에 초췌한 환자가 되는 것을 보는 건 괴로운 일이었다. 형은 돌이킬 수 없는 길에 들어서게 되고 나서야 삶의 여유를 찾은 것 같았다. 되는 일이 없는 삶이었지만 나름대로 열심히 살았고 이제는 할 일이 아무것도 없다는 체념이 늦게나마 안식을 준 것 같았다. 휠체어를 밀어 병원 구내를 산책할 때 형은 그 동안 사느라 바빠서 나누지 못했던 대화를 풀어 놓았다.
“중학교 때 서울서 혼자 있을 때가 가장 힘들었다. 시골서는 친구들이 많았는데 서울 가니 친구를 사귈 수 없었다. 매일 혼자서 이 골목 저 골목을 떠 돌았다. 어린 놈이 갈 데는 없고 한강에 가서 돌을 던지며 놀았다. 늘 시골에 있는 친구들과 부모님 생각뿐이었는데 학교에 안 가고 시골집에 내려가면 아버지는 지게 작대기로 두들겨 패서 올려 보냈다. 네가 어릴 때 기억나니? 겨울에 강에 가서 많이 놀았잖아. 방학 때는 집에 내려갈 수 있으니 그 때가 가장 행복했다. 어린 너를 썰매에 태워서 밀어주면 너는 소리를 지르며 즐거워했지. 여름에는 연못에 멱을 감으로 갔지. 너는 늘 나를 따라다녔어. 개학해서 서울로 올라갈 때는 죽기보다 싫었다. 너는 나를 따라간다고 버스 정류장에서 엄마에게 매달려 울었고 나는 엄마와 네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뒤쪽 차창에 매달려 눈을 떼지 못했다. 그럴 필요가 없었는데 쓸데 없이 고생들을 하면서 살았어. 내가 공부를 잘 하는 것도 아니었는데 부모는 나를 왜 서울로 올려 보냈을까. 차라리 시골서 농사나 지으며 살았으면 마음 편히 살았을텐데…”
카메라의 기억은 흐릿한 영상 속에서 혼자 걸어가는 형의 뒷모습을 보여준다. 어머니는 버스 정류장에서 형을 따라 가겠다고 우는 나를 달래고 버스는 먼지를 일으키며 신작로를 달려간다. 먼지 구덩이 속에서 버스는 형을 데리고 먼 나라로 달려가고 나는 형을 향해 손을 뻗는다. 내 손은 너무 작아서 형에게 닿지 못하고 벌레 울음소리 같은 내 울음소리만 커져 간다.
“어딘가 따듯한 품이 그리웠다. 아버지가 무서워 말하지 못했지만 혼자 거리에 있는 게 끔찍하게 싫었다. 고등학교에 올라가서야 친구들을 사귈 수 있었는데 질이 안 좋은 애들이었지. 그 애들은 철저히 나를 이용했고 나는 혼자 있기가 싫어서 그들의 요구를 다 들어 주었어. 시골서 올라오는 용돈은 그 애들과 만나는 데 다 들어갔고 나는 하숙비를 제대로 내지 못해 먹는 것 조차 변변히 않았어. 나중에 그 애들은 시골집까지 찾아왔지. 내가 친구들이라고 소개하면 어머니는 며칠이고 융숭한 대접을 해 주었어.그 애들하고 싸움도 많이 했는데 끝내 벗어나지 못하고 군대에 가서야 멀어질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