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확히 15일 출근하고 퇴사했습니다. 시원하게 정리했습니다. 너무 빨리 정리한 거 아니냐고요? 좀 참고해야 하는 거 아니냐고요? 혹시 제가 끈기가 부족한 건 아니냐고요?
저는 16살 때부터 32살까지 16년간 기타리스트 외길을 고집했고, 32살부터 지금까지 안마의자 회사에서 근무했습니다. 즉 근속연수가 길다는 뜻이죠. 웬만하면 참고 견디는 사람이라는 뜻이죠. 그런 제가 왜 고작 15일 만에 이 일을 관두게 되었는지 간단하게 설명해보려고 합니다.
거두절미하고 가장 큰 잘못은 처음 일 시작할 때 근무 조건을 명확하게 설정하지 않은 저의 안일함입니다. 근무 조건이란 게 머릿속으로는 수십 번 되풀이해서 시뮬레이션하지만 막상 면접 때가 되면 그게 입 밖으로 잘 나오지 않는 것 같습니다.
출퇴근시간
기본급
인센티브
업무범위
연월차 및 각종 공휴일
근로계약서
소속 공인중개사는 일반적으로 기본급 + 인센티브로 급여가 구성됩니다. 중개사 업무를 위해 사용되는 비용은 기본적인 광고비와 점심 식대와 이동경비입니다. 경험 많은 능숙한 소속공인중개사라면 대부분 개업하기 싫고 자유롭게 옮겨 다니고 싶은 경우가 많기에 사실상 프리랜서로 봐야 하고 이들의 경우 개업 공인중개사와의 협의를 통해 가능한 많은 인센티브를 받으려고 합니다. 반대로 저처럼 초짜 소속 공인중개사들은 아직 영업에 자신이 없는 경우가 많고 업무가 익숙하지 않아 조금이라도 기본급을 받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제가 겪은 바 기본급은 쓸데없이 스스로에게 노예근성이 생기게 만드는 악독한 조건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50만 원의 기본급을 받기로 약속했는데 그게 뭐라고 그 돈에 얽매이게 되고 왠지 피고용자, 근로자가 된 기분이 들더군요. 저만 그런 거일 수도 있지만 개업 공인중개사들도 고작 50만 원 정도 지불하고 소속 공인중개사를 부려먹는 경우도 있다는 사실을 전해 듣게 되었습니다. 만일 아직 개업이 부담스럽지만 현업에 종사하고 싶은 공인중개사라면 기본급 없이 인센티브를 높게 설정하고 업무를 보시는 걸 추천드립니다. 기본급은 결국 스스로에게 쿠션이 되어 영업 의욕을 떨어트리고 개업공인중개사에게 실제적이든 정신적이든 휘둘리는 여지를 남긴다는 걸 알았으면 좋겠습니다.
제가 원래 원하던 조건은 공휴일에 쉬는 것, 토요일 이른 퇴근, 그리고 월차 2일이었습니다. 부동산은 기본적으로 주 6일을 일하기 때문에 월차 개념으로 평일 이틀 정도는 쉬고 싶었습니다. 병원을 비롯해 각종 개인일을 일요일에 할 순 없으니 말이죠. 문제는 여기에서 발생했습니다. 분명히 제가 확인한 조건은 월차 2일에 토요일 이른 퇴근이었습니다. 그러나 막상 일해보니 조건이 바뀌더군요.
첫 번째는 공휴이 일었습니다. 10월 9일이 한글날이었잖아요? 저는 당연히 쉬는 날인 줄 알았는데 확인해 보니 제가 근무하는 부동산은 공휴일에도 다 일하는 부동산이었습니다. 즉 1년에 공식적으로 쉬는 날은 추석과 설날뿐이라는 이야기였죠. 둘째로 월차입니다. 월차 2일이 맞냐고 물어봤으나 저의 대표는 융통성 있게 쓰면 된다고 어물쩍 넘어갔었던 거죠. 그게 화근이었습니다. 저는 첫 번째 월차를 한글날에 썼습니다. 이미 선약이 잡혀있었고 아무리 업무 초기라도 월차는 원하는 때에 써야 하는 게 맞잖아요. 이후 약 3주간 열심히 업무를 수행했고, 마지막 주에 사적인 업무를 보기 위해 월차를 신청했습니다.
"아니 부장님은 한 달에 두 번씩 쉴 생각이세요?"
"문제가 되는 부분이 있을까요? 면접 보실 때 월차는 융통성 있게 하자고 말씀하셨잖아요."
"아니 그게 사람일이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 비상시에 융통성 있게 하자는 거지 이렇게 매달 2번씩 쉬는 건 좀 아니지 않나요?"
"그럼 제 개인업무는 어떻게 보나요? 대표님은 맨날 나가 계시고 미용실, 병원, 은행 다 다녀오시잖아요. 저도 하루 날 잡고 업무 좀 보려고 합니다."
결국 이 대화에서 가장 큰 문제점은 제가 사무실을 너무 오래 지켰다는 사실입니다. 능력 있는 중개사라면 외부 영업을 돌면서 고객과 물건을 확보하고 그 사이에 사적인 업무도 봐야 했는데 제가 사무실을 너무 오래 지킨 탓이었죠. 대표가 하루에 광고 최소 10개는 올리라고 지시하기도 했고, 사무실을 계속 비우다 보니 제가 지켜야 된다는 의무감이 생겨버리고 말았습니다. 물건을 모르니 광고 10개 올리기도 힘들고 개인 업무 또한 볼 수가 없었습니다. 기본급 50만 원의 함정이었죠.
심지어 점심시간도 문제였습니다. 식비를 따로 제공받는 게 아니라 대표가 점심 먹을 때 같이 가서 먹는 시스템이었기 때문에 원하는 루틴대로 점심시간을 가질 수 없었고 심지어 밥 먹고 바로 사무실로 돌아왔기 때문에 1시간이라는 점심시간 개념도 없었습니다. 그냥 업무 중에 밥만 후딱 먹고 오는 방식이었죠.
저는 오랫동안 주 6일 근무에 월차도 없고, 1년에 휴가 3일 쓰는 일을 했기 때문에 그다음 일은 절대 이렇게 하고 싶지 않아서 나름 확고한 조건이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형편없는 조건으로 다시 한번 일하게 된 셈이었죠. 그나마 다행인 게 기본급이 있다는 사실이었는데 이 기본급은 돌이켜보니 족쇄였습니다.
결국 월차 문제로 "개정색"을 한 대표와 더 이상 일하기 힘들겠다는 결론을 얻고 일을 관두게 되었습니다. 살면서 한 달을 채우지 않고 일을 관둔 건 아르바이트 포함해도 처음 있는 일이네요.
많이 배웠네요. 15일 동안 일한 것에 대해서는 정산을 약속받았는데 얼마를 줄진 또 모르겠네요. 깔끔하게 바로 주면 좋을 텐데 3일째인 오늘도 입금되지 않았습니다. 조속히 입금되지 않는다면 2차전이 시작되겠죠? 생각만 해도 짜증 나는군요.
이 글을 시작하면서 소속공인중개사의 낱낱을 들려드리고 싶었지만 결국 조기 종영하게 되었습니다. 대신 상가투자에 대해서 확실한 인사이트를 얻었기 때문에 이를 바탕으로 새로운 콘텐츠를 제작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저처럼 입사 확정이 두려운 마음에 근로 조건을 정확하게 하지 못하는 실수를 범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협상 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건 숫자입니다. 숫자에 관한 부분은 반드시 꼼꼼하고 정확하게 선을 그으셔야 합니다. 저처럼 두루뭉술하게 넘어가면 결국 나쁜 조건 혹은 나쁜 결말, 그리고 이를 통한 스트레스에 고통받게 되실 겁니다.
지인에게는 절대로 돈 빌려주지 말 것.
친구와 동업하지 말 것.
계약 조건은 명명백백히 정리할 것.
저는 이 세 가지를 모두 직접 경험해보고 말았습니다. 백날 책 읽고 다짐해 봐도 실전은 녹록하지 않습니다. 역시 인생은 실전입니다. 여러분 명심하세요. 뭐든 빠르게 경험하는 게 좋습니다. 될지 안 될지는 해봐야 알 수 있고 안 될 일이라면 어차피 안 됩니다. 그러나 남들이 안된다는 소리에 진짜로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내가 뭘 할 수 있는 사람인지 절대로 알 수 없게 됩니다. 쓴소리 좀 들어도 괜찮습니다. 경험해보지 않으면 고치기 어렵습니다. 기왕에 당할 사기라면 빨리 당하는 게 좋습니다. 그럼에도 열심히 공부하세요. 독서하세요. 그래야만 당했다는 사실도 빨리 알아차리게 됩니다. 그리고 반성하게 될 거고 성장하게 될 겁니다. 실수와 실패 없는 성장과 성공은 아마 거의 없습니다. 적어도 우리에겐 말이죠. 하루라도 빨리 상처받고 실패하고 실수하세요. 그게 우리를 성장하게 만듭니다. 두렵습니까? 저는 나이가 들어가는데도 두려워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상태가 훨씬 두렵습니다.
짧은 글이지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