갸리 버스 365일 [마니임~ 마당쇠 대령했사옵니다]

그냥 동그라미 줘도 될 것을…..

by 갸리

아침 출근 버스에서 종종 같은 사람을 볼 때가 있다. 정해진 출퇴근 버스만 타다 보면 분명히 누군가는 겹치기 마련이다. 주변 상황에 전혀 관심 없는 사람들은 같은 사람을 만나도 처음 만나는 사람으로 생각하기 쉽다. 특별하게 이상 행동이나 특이한 외모를 하지 않고서는 지극히 평범한 사람들은 많은 군중에 묻혀 기억조차 나지 않는 존재가 된다.


내가 타는 버스에는 담배 쩐내 나는 아저씨, 김숙 닮은 여자, 유치원 데려다주는 할머니와 손자, 아래층 아줌마, 자폐아 청년, 아빠와 딸 정도가 자주 만나는 이웃이라 할 수 있다. 이들 중 유일하게 나의 존재를 인지하는 사람은 아래층 아줌마뿐이며 마주쳐서 반갑지 않은 사람도 있다. 그들 입장에서 나의 존재도 그냥 많은 군중 중 하나일 것이다. 하루하루 만나는 빈도수가 늘어나 얼굴도 낯이 익어, 제발 마주치지 않기를 바라는 사람이 타지 않는 날엔 ‘휴’하고 한숨이 나오는 일도 있다. 또 한편으론 오늘은 어디를 갔나? 하는 궁금증이 일기도 한다.



한티역 근처에서 내리는 아빠와 딸도 자주 만나는 커플이다.

정돈되지 않은 긴 턱수염과 뻗친 머리, 건장한 체구는 산적의 느낌 그대로다. 산적 같은 아빠와 초등학교 3~4학년쯤 보이는 딸은 항상 나란히 자리에 앉아 오순도순 재미나게 이야기를 주고받는다. 딸의 계속되는 질문에도 싫은 티 하나 없이 차근차근 답하는 아빠. 딸내미를 학교에 데려다주는 것 같이 보이는데 아빠의 옷차림이 너무 가볍다. 아침 출근 시간의 아빠 옷차림과는 거리가 먼 허름한 반바지에 간편하게 입은 반소매. 혹시 백수 또는 전업주부인지는 모르겠지만, 딸을 대하는 아빠의 모습은 정말 마당쇠와 마님의 관계를 떠오르게 한다. 매일 아침 빗자루로 마당을 쓸며 이제나저제나 사모하는 마님이 나오길 기다리는 마당쇠 같다고나 할까. 마님을 지극정성으로 모시는 마당쇠처럼 딸의 책가방은 항상 아빠의 몫이다. 버스에서 내릴 때도 딸의 교통카드는 아빠가 알아서 ‘티딕’ 소리를 내며 챙긴다. 회장님의 가방을 들고 졸졸 뒤따라가는 비서처럼 버스에서 내린 아빠는 딸의 가방을 들고 뒤따른다.


딸은 아침 등교 시간만큼은 배 나온 회장님이 된다. 자기 딸에게 이 정도쯤은 해주지 않는 아빠가 어딨느냐고 반문하는 사람도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매일 아침 딸의 등교를 책임지기란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더구나 직장인이라면 더더욱.



나의 경우 아이들의 초등학교가 정류장 근처에 있어 아이들과 같이 나와 짧은 인사말 정도만 하고 빠이빠이 손을 흔들며 헤어진다. 어른 걸음으로 5분도 채 안 되는 짧은 거리도 마당쇠 아빠처럼 아이들의 가방을 들어주거나 하지 않는다. 이 정도는 아이들 혼자 할 수 있는 자립심을 길러 주기 위한 변명 아닌 변명이 왠지 회장님을 뒤따르는 비서가 되지 못한 아빠의 미안한 마음이 들기도 할 때가 있다.


어느 날 저녁.

자를 대고 그려야 할 수학 도형 숙제에 아들은 정확하게 자를 사용해 선을 그었고, 딸내미는 자를 사용하는 것이 귀찮은지 손으로 삐뚤빼뚤 지렁이처럼 선을 그어 매몰차게 정답 동그라미를 해주지 않았다. 그냥 손으로 그려도 된다고 징징거리고 울음까지 터뜨리며 빨간색 동그라미를 원했던 딸내미. 결국, 빨간색 엑스 표시를 주자 딸내미의 울음소리는 더 커지고. 동그라미 동그라미 해달라는 딸내미에게 나는 마님의 분부라면 무조건 따르는 마당쇠 아빠가 되지는 못하는 것 같다.


그냥 동그라미 줘도 될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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