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를 먹어가며 잃은 시력, 그리고 삼십에서 오십센티 사이
눈이 나쁜 아이
멀리 있는 것이 잘 안 보이는 것을 근시라고 한다. 어릴 때부터 눈이 나빴던 나는 초등학생 때부터 안경을 썼고, 대학에 들어가서는 운동하는데 안경이 방해가 되었기 때문에 렌즈를 착용했다. 그리고 30여 년이 지난 지금은 시력을 잃고 있다는 또 다른 사실에 직면했다.
잃는다는 것은 대체로 나쁜 이야기인 편이 많지. 멀리 있는 것을 잘 보고자 착용했던 렌즈는 이제 그 구실을 반 밖에 못한다. 몰랐지만 렌즈를 끼는 순간에 나는 아주 가까운, 예를 들어 일 이십 센티미터 거리의, 물체를 아마도 또렷하게 못 봤을 터였다. 그런데 몰랐던 거지. 노안이라는 질병이 오기 전까지는 말이다.
안 보인다
사십 대 중반을 살짝 넘어 후반으로 넘어가던 어느 날, 사실 '그날'은 아니었겠지만, 하루 종일 보는 모니터의 글자가 잘 안 보였다. 글자가 흐리다. 눈을 찡그려 째려봐도 달라지는 건 없다. '아, 이게 노안이구나.' 먼 것을 잘 보지 못했던 내가 가까운 것도 보지 못하게 됐으니 사면초가에 빠진 것 같은 느낌. 이제 어른의 상징인 돋보기를 준비해야 하는 건가?
불현듯, 이런 생각이 들더라. 먼 것과 가까운 것을 조금씩 양보하면 내가 가장 필요한 것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렌즈 없이는 오십 센티미터 이내의 가까운 거리만 또렷하게 보이고 몇 미터만 멀어져도 간판 글자조차 안 보인다. 렌즈를 끼고는 먼 것은 잘 보이지만 오십 센티 이내는 보기가 어렵다. 그리고 내가 가장 많이 보는 거리는 삼십에서 오십 센티미터 사이.
마이너스 4라는 높은 도수의 렌즈를 마이너스 2.5로 바꾸기로 했다. 먼 것과 가까운 것을 조금씩, 아니 꽤 많이, 버렸다. 종일 모니터를 들여다보는 직업 때문에, 그리고 스마트폰으로 수많은 정보를 입수하고 일을 처리하기 때문에 필요한 삼십에서 오십 센티미터 사이. 어쩌면 근시가 아니었다면 새롭게 돋보기를 맞추었어야 했을 거다. 언제까지 가능할지 모르겠지만 먼 것과 가까운 것을 조금씩 덜어내고 나니 예전과 같은 생활을 할 수 있게 됐다.
잃어간다
잃어간다. 시력을 잃어가고 있고, 학설에 따르면 이미 이십 년쯤 전부터 근력도 잃어가고 있다. 엊그제 백 하고도 일 년을 더 살아오신 외할머니를 잃었다. 시간이 또 많이 지나면 부모님을 잃을 것이고, 그리고 또 시간이 지난 어느 날 나를 잃겠지. 나이를 들어가면서 이런 두려움에도 담담해진다.
맞아, 그게 나이를 먹어가는 과정이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