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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재미 탐험가 이숙경 Dec 31. 2021

나는 김장을 안 해요.

같은 마을에 살면서 언니 동생이 사이가 된 친구에게 전화가 왔다.


"언니 김장 도와줘서 고마워요. 마을 엄니들께도 한쪽씩 나눠드렸는데 모두 맛있다고 칭찬해 주셨어요."

"그랬구나. 너무 잘했다. 늘 자식들에게 주기만 하시다가 젊은이에게 김치를  받으시고 얼마나 기분 좋으셨을까? 정말 잘했다."(우리 마을에서 50대는 젊은이다.)


염소농장 친구 부부

친구 부부는 마을에서 좀 떨어진 산 밑에서  염소농장을 한다. 요양보호사를 하고 있는 친구는 아이들을 대학에 보낸 후부터 방통대에 다니기 시작해 졸업을 앞두고 있다. 틈틈이 라인댄스며 사물놀이 등 취미활동도 열심히 하는 부지런하고 열정적인 친구다. 나도 그 열정 덕분에 주민센터의 라인댄스 교실에 발을 들여놓았었다. 코로나로 인해 댄스교실이 중단되었지만, 지역아동센터에 나가기 전까지는 우리 7평 집에서 춤 연습을 하며 더 가까워졌다. (몸치인 나를 위해 친구가 개인교습을 해주었다.)


김장을 도우러 간 사연

지난주 일요일 오랜만에 맑은 날씨에 빨래를 잔뜩 널었다. 오후에  장에 가려고 빨래를 걷으려다가 볕이 좀 아까워서  다녀와서  걷으려고 집을 막 나서려는데 부녀회장한테 전화가 왔다. 나와 친한 바로 그  친구네로 김장을 도와주러 가는 길인데 함께 가겠냐는 거였다. 반가운 마음에 널린 빨래는 생각도 않고 바로 따라나섰다. 부녀회장 말이 양념이 다 되었고 양도 얼마 안 되니 금방 끝내주고 오자고 한다. 친구 집에 거의 도착할 무렵 커다란 장바구니를 들고 나오는 친구를 만났다. 어디에 가냐고 물으니 갓을 뜯으러 간단다. 이제야 갓을 뜯으러 간다고? 그제야 널어놓은 빨래가 걱정되기 시작한다. 그런데 어쩐지 집에 다녀오겠다는 말이 나오지 않는다. 


친구 집에 도착하니 친구 남편이 반가이 우리를 맞이한다. 그리고 친구를 집으로 오게 하고 자신이 갓을 뜯어 오겠다고 했다. 시간을 줄일 수 있겠구나 생각하면서도 걱정은 되었다. 흙 묻은 야채를 다듬고 씻는 것이 내게는 시간이 많이 걸리고 어려운 일이다.  


친구를 부르러 간 사이 우리는 주인 없는 집으로 들어갔다. 커다란 함지박에 김치 양념이 100포기쯤은 담을 만한 양이다. 다행히 배추는 서른여섯 포기라고 한다. 양념이 다 돼있고, 여러 사람이 속 넣는 일만 하면 되니  금방 끝내고 빨래를 걷으러 갈 수 있을 것 같기도 했다. 친구가 올 때까지 부녀회장이 친구 집 김장을 도와주게 된 사연을 들었다. 


고마운 부녀회장님

부녀회장이 어제 우연히 이 집에서 김장을 담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혼자 어려울 것 같아 몇 가지 김장 양념을 가지고 왔었다고 한다. 그런데 준비된 과일은 너무 적고, 무는 바람이 들어 버려야 하는 데다 믹서기도 너무 작아서 그대로는 김칫속을 제대로 만들 수 없다고 생각했단다. 그래서 저녁에 자기 집으로 돌아와서 재료를 준비하고 새벽에 친구 집으로 커다란 믹서기까지 가져와서 김칫속을 만들었다고 한다. 그러니까 지금은 세 번째 방문이다. 부녀회장도 농사가 많고 일이 많은 사람인데 자신의 일을 제처 두고 와 준 것이 너무 고맙다. 부녀회장은 나보다 한 살 어리지만 마음 씀씀이는 훨씬 넉넉하다.


잠시 후에 친구가  돌아와서 따뜻한 차를 준비하는 동안 친구 남편이 갓을 뽑아왔다. 아주 짧은 시간이었는데  매우 많은 양을 뽑았다. 밖에서 갓을 다듬고 씻는 동안 짧은 겨울 해가 달음질이라도 치는 것 같은데 한가하게 차를 마셨다. 오늘따라 날이 좋아 빨랫줄에 꽉 차게 널어놓았는데... 갓을 뽑으러 간다고 했을 때 집에 다녀올걸. 자꾸 후회가 되다가도 부녀회장의 활기찬 무용담(?)을 들으면 내 걱정이 너무 사소하고 하찮게 여겨진다. 


 드디어 씻어 온 갓이 들어왔다. 물을 먹어서 그런지 엄청 양이 많아 보인다. 부녀회장과 함께 갓을 썰기 시작하는데 나와 속도가 10배는 차이가 난다. 내 한심한 칼질 탓인지 갓이 쉽게 줄어들지 않는다. 그런데 부녀회장이 갓을 너무 많이 넣으면 김치가 검어진다며 3분의 1쯤은 남기자고 한다. 왠지 시간을 많이 번 기분이다.


생각보다 갓을 빨리 썰었지만  양이 많아서 양념에 섞는 일도 만만치는 않았다. 몇백 포기씩 김장을 하는 부녀회장이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라며  익숙한 솜씨로 정성껏 양념을 섞었다. 드디어 배추에 양념을 버무리는 순간이 왔다. 그러나  친구 남편은 염소를 돌보는 일로 바빠 김장을 돕지 못한다고 한다. (매년 친구 혼자서 자정까지 김장을 했었다고 한다.) 게다가 부녀회장이  친구에겐 김치 버무리는 일을 하지 말라고 한다. 버무려진 김치를 통에 담고 정리해야 하니 양쪽 장갑에 양념을 무치면 안 된다는 것이다. 다섯 명이 할 거라고 생각했던 일을 광민과 나, 부녀회장 셋이 하게 되었다. 그나마 나는 배추 버무리는 일이 너무 서툴다. 양념을 바른 뒤에 다시 검사하면 양념이 발라지지 않은 곳이 발견되곤 한다. 거기에 배추 포기가 커서  쉬이 줄어들질 않는다.  일이 익숙해질 무렵 허리가 뻐근해지고  밖이 어두워지기 시작한다. 그런데  어느 틈엔가 빨래 걱정은 사라졌다. (김칫속은 내 예상대로 반 가까이 남았다. 작년보다  김치 양을 늘린다고 친구가 김치 속을 너무 많이 만들었나 보다.)


일이 끝나고 친구가  김치와 김치 속을 주었다. 언제나 다들  더 많은 양을 주려고 하지만 우리 집 냉장고는 작아서 많이 받을 수도 없다. 부녀회장은 양념으로 넣은 황칠나무 열매 때문에 옻을 탈 지 모른다며 맛도 볼 수 없다고 했다. 


날이 깜깜해져 돌아오는 길  왠지 더 이상 빨래 걱정은  되지 않았다. 조금 축축해졌으면 어떤가. 태양열로 값싸게 쓸 수 있는 보일러 좀 돌리면 된다.( 생각해보면 처음부터 걱정할 일도 아니었다. 사람마다 걱정 총량의 법칙이라도 있는 걸까? 걱정이 없으면 만들어서라도 하게 되는 것 같다. 이제 빨래 걱정 따윈 걱정 목록에서 제외시켜야겠다.)  부녀회장의 인심과 솜씨가 가득 담긴 친구네 김치가 더해져 우리 집 냉장고엔 동네 김치로 꽉 찼다.


"언니 제가 이 마을에 와서 이렇게 행복하게 김장을 해 본 건 처음이에요."

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목소리에 감동이 가득하다. 얼마 전 우리가 이사 오기 전까지 함께 어울릴 사람이 없어 마을을 떠날 생각까지 했었다는 말을 하던 친구다. 


친구 남편은 바로 옆 마을에서 자랐기 때문에 마을 사람들과 잘 아는 사이었는데도 5년이 넘도록 이 마을에서 집 지을 땅을 구하지 못했다고 했다. 마을에 살면서 염소 농장이 마을 사람들에게 여러모로 달갑지 않았을 수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커다란 사료차가 지나다니는 바람에 묘지가 망가졌다며 길을 폐쇄하게 된 이유를 말하는 사람도 있었고, 풀어놓은 염소가 작물을 망쳐놓았다는 불만도 들렸다.  


그런데 부녀회장이 김장을 도와주고, 그것을 마을 어머니들과 나누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부녀회장의 속 깊은 정이  따스하게 마을에 퍼져나갔다.


"엄니들에게 김장을 나눠드릴 생각을 하다니 너도 너무 멋지다!'

좋은 사람들이 오랜 시간이 흐르면서 조금씩 서로를 알아보게 된 것 같다.  이렇게 좋은 사람들과 함께  살아갈 수 있다는 게 얼마나 행복한지 가슴이 벅차고 설렌다.



광민은 동네 김장 도우미로 엄니들에게 인기가 많다.



나는 김장을 담지 않는다

시골은 1년 내내 김장을 생각하며 살아간다. 김장 담그기가 한창인 요즘 벌써 내년 김장에 쓸 마늘이 들판에 가득 차가운 겨울바람을 이겨내고 잘 자라고 있다. 그러나 나는 김장을 담지 않는다. 준비해야 할 재료가 너무 많고, 그것들을 보관하려면 김치 냉장고도 있어야 하고 냉장고도 더 큰 것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래도 동네 엄니들 김장은 열심히 도우러 다닌다.(올해는 내가 지역아동센터로 출근하면서 광민 혼자 도우러 다녔다.) 김장을 도와드리는 집은 물론 돕지 못한 집에서도  우리 집에 김장을 조금씩 나눠 주신다. 그래서 우리 집 냉장고엔 맛있는 동네 김치가 한가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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