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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필로그2. 학교 다시 시작

복직할 결심

by 경주

다시 돌아갈 수 있을까? 휴직을 신청하던 그때, 사실 마음으로는 의원면직을 생각했다. 의원면직이란 본인의 청원에 의해 직위를 해면하는 것 그러니까 중학교 국어 교사로서의 내 자리를 자의로 끝내는 것이다. 그러니까 회사로 따지면 사표를 쓰는 셈. 2년이면 명예퇴직을 할 수 있는 경력이 쌓이지만 이렇게 나를 더 태우다가는 내가 소멸될 거라고 생각했다. 질병을 얻었을 때 휴직을 할 수 있는 여건을 갖추고 있는 이곳이 무척이나 고맙지만 내게는 그 자리가 몹시도 버거웠다. 그래서 모든 것을 내려놓고 싶었다.


물론 중등학교 국어 교사라는 자리는 내게 쉽게 허락된 곳이 아니다. 대학 재학 중에 본 임용고사 1차 시험에서는 0.5점의 차이로 낙방했다.


이후 학원에서 근무하며 재수했다. 내가 살던 동네에는 대학교가 있었는데 입장에 제한이 없었던지라 지역 주민이었던 나는 근무하지 않는 날에는 그 도서관에서 공부했다. 학원에서 너무 열정적으로 가르치는 바람에 성대폴립이 생겼고 크기가 너무 커서 수술을 권유받았다. 엄마는 학원을 그만두고 쉬며 목의 경이를 지켜보자고 했다. 그 바람에 매달 15만 원씩 인상해주는 월급으로 이미 국공립학교의 월급을 넘어선 학원 근무를 그만두었다. 수술을 미루고 약을 먹으며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지냈다. 목에서 쇳소리가 나고 밤새 기침에 시달렸다. 그래도 두어 달의 시간이 지나자 수술하지 않았음에도 거짓말처럼 목이 좋아졌다. 사실 이때부터 몸을 고치는 것은 휴식임을 알게 되었다.


건강을 회복한 후 공부에 전념했다. 새벽에 도서관의 불을 켜고 들어가고 가장 마지막으로 내가 입실했던 도서실의 불을 끄고 집에 오곤 했다. 그렇게 공부하고도 임용시험 1차에서 0.5점이 아닌 5점의 차이로 또다시 실패했다.


공부에 더욱 매진한 후 더 많은 점수 차이로 낙방한 것은 충격이었다. 물론 모든 문제가 다 아는 문제였음에 흥분하여 시간 안배를 못하고 1문제에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할애해 나머지 문제는 엄청난 속도로 푸는 둥 마는 둥 서술해야 했지만 그랬던 상황 역시도 위로가 되지 못했다. 노력과 보상은 비례한다는 교과서적 윤리관에 입각한 나의 인생관은 흔들리기 시작했다. 대학 재학 시절에 본 시험이야 내가 부족한 점이 있었을 테지만 두 번째 해에는 정말 후회 없이 열심히 공부했기 때문에. 교과에 대한 전문 지식이 훨씬 더 차올랐다고 자부했기 때문에.


다음 해에는 기간제 교사 생활을 하며 임용 시험을 준비했다. 최소 하루 5시간 이상은 공부하자고 마음먹었다. 간수치가 높아져 입원한 기간을 제외하고는 모두 공부 시간을 지켰다. 출퇴근 시간이 아까워 오가며 작은 메모장의 글을 읽었고 도서관에 가는 체력을 아끼려 집에서 공부했다. 그건 작년에 공부한 내용을 잊지 않으려는 노력 그 이상은 아니었다. 시간적 여유가 부족했다. 그렇게 3번째 임용시험을 준비했다.


합격자 발표가 나던 날. 발표가 있다는 사실을 가족에게 알려주지 않았다. 기간제 근무를 하면서 본 시험에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은근히 기대했다. 또 생각했다. 다시 낙방하게 되면 어쩌나. 혼자 두근거리며 명단을 확인했다. 합격이었다. 합격자 256명 중 52등이었다. 엄마에게 달려가 말했다. 엄마는 밥에 물을 말아먹다가 숟가락을 부여잡고 눈물을 흘렸다. 임용 시험에 떨어질 때마다 밥도 먹지 않고 방에서 나오지 않았던 나를 알던 엄마는 나보다 더 기뻐했다.


1차 합격 후 2차 면접을 준비하기 위해 친구들과 모의 면접을 준비했다. 친구들과 만들어둔 예상 문제와 크게 다르지 않았던 면접을 치르고 합격을 위한 의식을 치르듯 합격 루틴 코스인 면접 후 수원화성 걷기에 동참했다. 한겨울 높은 굽의 구두를 신고 완벽한 정장 차림으로 화성을 걸었다. 이후 최종 합격 소식을 들었다. 그렇지만 함께 걸었던 사랑하는 친구가 2차에서 낙방하면서 합격 비법으로 알려진 전설처럼 내려오던 수원 화성 걷기를 포함한 미신은 저 멀리 내던지자 생각했다.


엄마와 아빠에게는 국어 교사가 된 나는 큰 자랑이었다. 내가 아이를 낳고 육아휴직을 했을 때도 학교에서 교사로 가르치지 않는 나를 엄마는 안타까워했다. 딸을 국어교사로 키워냈다는 자부심에 엄마는 졸업앨범에 찍힌 나의 사진을 3학년 2반 담임교사라고 적힌 부분이 나오도록 촬영하여 엄마의 프로필 사진으로 삼았다.

엘리베이터 앞에서 같은 아파트에 사는 아주머니를 만난 6살 꼬마였던 우리 아들은 주민을 만나면 이렇게 인사하곤 했다.

안녕하세요? 우리 엄마는 중학교 국어 선생님이에요.

아들에게는 너무 자랑스러운 엄마였나 보다.


힘들게 이 자리에 섰고 사랑하는 가족들은 내가 이 자리에 있음을 무척이나 기뻐한다.


36개월이 되면 보통의 아이들은 말을 한다. 물론 우리 딸도 6개월부터 조금씩 말할 준비를 하였다. 그런데 12개월이 된 나의 딸에게 동생이 생기고 난 후부터 나의 딸은 입을 닫았다. 그렇게 겨우 12개월 차이가 나는 연년생 남매를 키웠다. 아들이 태어난 후 딸은 음식을 먹지 않았다. 나와 눈도 마주치려 하지 않았다. 치료를 받으러 다녔다. 비용도 그렇거니와 어린 두 아이를 데리고 차를 태워 기관에 오가는 일은 곤욕이었다. 아이가 치료를 마치면 치료 선생님과 상담하게 되는데 그럴 때마다 나는 너무나 많이 울었다. 어쩌면 그 시간은 아이가 아닌 나의 치유를 위한 시간이었다.


내게 육아휴직은 너무나 힘든 시간이었다. 그렇지만 결국 딸은 말을 찾았고 나는 복직을 했다. 아침에 남편은 아이들을 어린이집에 데려다주었다. 아이가 없는 시간이 생기게 되면서 비로소 나를 위해 거울을 보고 예쁜 옷을 찾아 입고 학교로 출근할 수 있었다. 많은 아이들이 내게 귀 기울여주고 있음에 감사했다. 말이 통하는 아이들과 소통할 수 있다는 것은 감동이었다. 나의 노력이 가정에서보다 훨씬 더 큰 보상으로 다가왔다. 나의 마음은 휴직했을 때의 열 배, 백배는 밝아졌다.


나는 읽기를 즐긴다. 더 젊은 시절에는 도서관에서 소설을 읽는 것에 열광했다. 하나의 소설을 읽고 가슴에 남으면 그 작가의 모든 소설을 찾아 읽었다. 대학교에 다닐 때 가장 큰 즐거움은 도서관이었다. 더 나이가 든 지금은 모르는 내용을 찾아보는 것이 신난다. 재미있는 글을 읽거나 새로운 내용의 정보를 접하면 알 수 없는 짜릿함이 든다. 게다가 그렇게 알게 된 내용을 아이들에게 전할 수 있다는 건, 그것이 업이라는 건 엄청난 행복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학교 일은 수업만 있는 것은 아니다. 수업만 하고 싶다면 차라리 학원 강사나 유튜브 교육 크리에이터가 맞지 않을까? 담임으로서 처리해야 하는 수많은 업무, 학교에서 배당한 부서 업무, 거기다 사건, 사고에 휘말리게 되면, 늦은 밤에도 연락하는 학부모들을 만나게 되면 과부하에 걸리게 된다.


문제는 어려움에 닥쳤을 때 나의 마음이다. 메니에르에 걸리고 경직된 일자목으로 목디스크 진단을 받고 알 수 없는 미열이 계속되고 간수치로 입원하고 위염이 생기고 설사가 일상이 되고. 서서히 내 몸의 면역체계는 말썽을 부리고 있었다.


휴직을 하고 온전한 나만의 시간을 가지며 나에게는 뱃심, 배짱이 생겼다. 무슨 일이 일어나면 아랫배에 힘을 준다. 전에는 일이 생기면 겉으로는 태연한 척하지만 사실 내면은 아주 작은 일에도 가슴이 쿵쾅거리고 어쩔 줄 몰라 종종거리곤 했다. 마음을 표현하며 살지 않았다. 나를 내보이는 것 자체가 두려웠던 모양이다. 가면을 쓴 용감함. 그러나 지금은 무슨 일이 생기면 뱃속까지 깊은숨을 내보내며 배에 단단히 힘을 준다. 그러면 그 일이 조금은 더 작아진다. a로 태어난 내가 b가 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래도 나는 a가 아닌 A가 되어 보기로 한다. 충분히 즐길 수 있는 일은 충분히 즐기면서, 조금 어려운 일은 어렵다 표현하면서 조금 더 가볍게 살아가기로 한다. 그러고 보니 복직할 결심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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