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에도 외출, 그럼에도 출근.

울산 책방, 그럼에도

by 경주ist


휴직 3주 차의 금요일.


일하지 않는 삶은 역시나 좋더라. 시간을 정해서 일어날 필요가 없고, 늦은 오후의 커피가 허락되니까. 고요한 새벽에 책을 읽고 와인을 마시고 체력이 다 할 때까지 사색해도 나 자신조차 나무라지 않는다. 마침내 체력을 다해 쓰러져 잠드는 기분을 한동안 잊지 못할 것이다.


첫 주는 나름 알차고 바쁘게 살았다. 평소에 가지 못했던 서점을 가고 혼자만의 시간을 충분히 보냈다. 그러나 삶과 시간의 경계가 무너진 삶은 건강하지 못하다. 충분한 잠을 청해도 피로가 풀리지 않았고. 일상을 긴장감 없이 살다 보니 식욕이 없음에도 살이 차올랐다. 그렇게 어떠한 지시도 받지 않고 3주간 좋아하는 것들로 채우며 휴식하고 있었다. 어제는 계획 없이 집을 나와 자동차 타이어에 바람을 넣고, 갑자기 생각난 스케일링에 3년 만에 치과에 방문했다.


“고개 왼쪽으로 돌려보세요”


왼쪽..? 3초는 족히 흘렀을 거다. 3주 만에 처음 내려진 지령에 방향을 고민하고 있었다. 깊은 생각 끝에 왼쪽을 찾았다. 긴장해서 잊었을 리 없다. 긴장하지 않고 살아서 잊혔을 거다. 약속이 없는 날엔 흘러가는 대로 하루를 흘렸다. 그리고 오늘, 휴직 3주 차의 금요일이 되어서야 실감 났다. 남은 휴직은 일주일이고, 나에겐 해야 할 일이 많이 남았다는 것을. (매일 글을 쓰겠다는 당찬 브런치북의 시작도 주 2회로 수정했으나 그마저도..)


흐리진 않지만 그리 맑지도 않은 날. 회색빛의 하늘임에도 그럼에도 외출했다. 3주 차의 마지막 평일인 금요일에 약속이 없음에도 자의로 집을 벗어났다. 다음 주에는 정말 해야만 하는 일들로 채워질 거 같은 불안이 엄습했기 때문에 저녁에 포항을 가야 하는 일정이 있음에도 그럼에도 가방을 챙겼다. 경주에서 울산으로 향하는 기차를 기다리며 연거푸 하품이 나오는 걸 보고, 나에게 지금 필요한 휴식은 서점이 아닌 집에서의 시간임을 알아차렸지만 그럼에도 기차에 몸을 실었다. 지금 가지 않으면 조만간 사무실에서 모니터만을 응시하고 있을 나에게 미안할 수도 있는 일이다. 오늘이 아니면 안 된다. 그렇게 울산 ‘그럼에도’ 서점으로 향했다.


울산 태화강역에 내려 버스를 탔다. 몇 년 전 이곳으로 컴퓨터 학원을 다녔기에 익숙한 길. 잠시나마 치열하게 살았던 때가 생각나 피식거렸다. 다섯 정거장을 지나 버스에서 내려 걷고 또 걸었다. 아니 사월인데, 벌써부터 땀이 나면 어떻게 하나... 욕심껏 가방에 책을 넣어온 1시간 전의 내가 원망스럽다. 지도를 확대해 가며 길 찾기에 몰두. 나만큼이나 땀을 흘리던 중국집 근로자가 눈에 들어왔고 고개를 올려보니 여기가 맞다. 책방, 그럼에도. 2층까지 계단을 올랐다. 유리문 앞에 오래된 그림이 걸려 있었다. ‘뭐야, 여기 아닌가 봐’ 다시 1층으로 내려갔다. 중국집을 지나쳐도 2층으로 향하는 문은 없었고, 건물 외관의 생김새를 다시 봐도 아까 그 계단이 맞다. 다시 2층, 방금 열지 못한 문을 열고 두리번거리니 사무실 간판의 그럼에도 상호를 찾을 수 있었다. 투명하지 않은 철문이라 열면서도 이곳이 맞나 싶었다.

서점의 내부는 사각형 공간이었다. 사각형 카펫, 사각의 창, 직사각형 테이블이 두 개가 합쳐진 정사각형의 테이블, 노란 사각형 포스트잇, 누군가의 서재와 사각형 책장에 사각형의 책이 적당히 채워져 있었다. 나는 그곳에서 사각형의 패드와 사각형의 다이어리를 꺼냈다. 그리고 사각형의 핸드폰으로 사진을 찍어 H에게 보냈다. 사무실에서 비워진 내 자리를 가장 크게 느끼고 있을 그녀. 그리고는 한참을 카톡으로 종알거렸다. 시간이 언제 이렇게나 흘렀는지, 휴직의 연장 가능성에 대해, 이번 주 월급은 또 밀릴 거라는 소식, 지금 이 공간이 얼만큼의 힐링인지, 그리고 책과 글 쓰는 이야기.


서점 한편에 붙여진 그럼에도 메모에 관해서도 이야기했다. H가 말한다. '다들 긍정적이네, 그럼에도 의 힘인가. 뒤에는 대부분 긍정적인 게 오는 건가 하고.' 뒤이어 내가 말했다. '나는 이거, 그럼에도 외출.' 나의 그럼에도 에 그녀가 답한다. '나는 그럼에도 출근으로 할게.'


휴직의 하루를 가득 채워준 공간. 그럼에도. 그럼에도 긍정적일 수도 있고, 그럼에도 해야 하는 일일수도 있다. 그럼에도 중요한 건, 그럼에도 그럼에도 놓지 않고 있다는 사실. 그 사실 때문에 결국 변하는 거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