벼가 익어가듯
매일 아침 출근을 하면서
딸아이는 재미있는 몸짓과 표정으로
저의 마음을 쥐락펴락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딸아이의 말에 저의 마음은
순간 정지가 된 느낌으로
하루를 보냈습니다.
그리고 그 하루의 마무리에 또 이렇게
글로 저의 마음을 풀어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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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느 때와 똑같이 현관문 앞에선 딸
다른 때와 같은 몸짓이겠지 했는데,
아이는 왠지 비장한 표정으로 긴 숨을 크게 몰아 쉬더니
처음으로 "돈 벌어올게."라는 말을 남기고
바람처럼 문을 닫았습니다.
순간 저의 마음은 고장 난 엘리베이터처럼
덜컹거렸고 비상벨을 찾기 위한 심박수는 짧은
시간이지만 요동을 치기 시작했습니다.
'돈을 벌어온다고'
생각해 보면
지금까지 돈을 벌기 위해 출근을 했던 아이인데
뭐가 이상했던 걸까
그 이상한 점을 찾기 위한 숨은 그림 찾기
1. 아이가 회사 생활을 하면서 그 사이에 생각주머니가
많이 커졌나.
2. 그 생각주머니가 혹시라도 힘듦이라는 경험치일까
3. 그 힘듦은 어떤 경험이었을까
4. 회사생활이 만만치 않다는 것을 느낄만한 일이 벌써 있었나
- 있었겠지
5. 그런 걸 느낀 후에는 여러 가지의 감정 이외에
훌쩍 커버린 나를 느낄 텐데
6. 나의 경우엔 우리 아빠가 이렇게 힘들게 우리를 먹여 살리셨구나
하는 생각과 함께 저녁에 퇴근하시는 아빠의 모습을 보고
가슴이 먹먹하여 밤새 울었던 기억이 있었는데
7. 우리 아이도 혹시 나와 같은 경험치가 있었던 것일까
그렇다면 감정적으로 많이 힘들었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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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아이는 영원히 겪지 않았으면 했던 일들이지만
사회생활을 하는 동안 언젠가는 여러 가지의 일들을 통해서
나와 같은 경험을 하고 나와 같은 생각을 공유하면서
승진도 하고 더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더 많은 것들을
세상사람들과 공유하겠지.
그러면서 벼가 익어가듯 감정을 컨트롤하면서
자신을 만들어 가는 거겠지.
그 벼가 익어갈 때까지 우리 아이는 얼마나 많은
뙤약볕과 비바람에 익숙해져야 할까
얼마나 많은 해충들과 외로운 사투를 벌여야 할까
지금도 많이 힘겨울 텐데
앞으로도 더 많은 일들이 있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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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감사하게도 오십을 훌쩍 넘길 즈음
나는 이 모든 일들이 나에게 그저 힘겨운 일을 넘어
그 경험들을 통해서 배우고 성장했던 것들이
얼마나 감사한 일이었는지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세상 그 누구도 가르쳐 줄 수 없는
나만의 경험들을 헤쳐 나갈 때는
너무 힘들어서 많이도 울었는데,
그 힘듦의 징검다리를 건너면서 내가 가야 하는 길이
안개가 걷히듯 점점 더 보이기 시작했고
다음 징검다리를 건너기 위한 지혜가 하나씩 쌓이기
시작했음을 긴 시간이 지난 뒤에야 알게 되었습니다.
이런 경험들이 없었다면 저는 아마도 지금까지
알을 깨지 못하고 엄마 품에서 삐악 대고 있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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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사랑하는 나의 딸은
이렇게 힘겨운 일의 첫 발을 아주 잘 떼고 있는 듯한
느낌입니다.
돈을 벌어 오겠다는 것은
자기가 책임져야 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안다는 뜻이고
그 책임을 다하기 위해 출근을 한다는 뜻이니까요.
그 책임의 무게가 너무 무겁지 않기를 바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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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나의 주님,
딸아이의 발걸음 하나하나에
늘 주님의 은총이 가득하시기를
그리고 그 은총으로 충만한 나의 딸이
늘 주님의 숨결을 느낄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아멘
by 굥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