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 위에서만 내가 보인다
가족과 오랜만에 외식을 했다. 한 달에 한 번씩은 꼭 모이는 저녁 약속이지만, 난 야근하느라 계속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회사 근처에서 외식할 테니 이번에는 꼭 왔으면 좋겠다고, 바빠도 저녁식사는 해야 하지 않겠냐며 잠시만 나와서 먹고 들어가라는 어머니의 청을 거절할 수 없어 그날은 모처럼 참석했다. 한창 식사하며 얘기하던 중에 어머니께서 대뜸 나를 보며 서운하다는 투로 말씀하신다. “너, 말투가 너무 사무적으로 변했어. 예전엔 안 그랬는데.”
어? 내가 무슨 말을 했더라? 사실 오늘 끝내야 할 일 생각에 정신 팔려 대화에는 전혀 집중하지 못하고 있었다. 어떤 말이었는지 알려달라고 해도, 어머니는 딱 꼬집어 말할 수 없다고 하셨다. 그럼, 어투가 문제였나? 이유를 알고 싶었다. 이건 내게 심각한 문제였다. 어딜 가나 일관된 모습이라는 걸 알게 모르게 느끼고 있던 차였다. 친구들과 대화할 때도, 여행을 가도 늘 일하는 사람 같았다. 딱딱한 말투, 긴장된 몸, 비판이 깃든 대화. 때와 장소, 대상을 불문하고 똑같은 모습을 하고 있는 내가 싫었다. 그래도 가장 편한 가족들에게만큼은 안 그러겠지 싶었는데, 어머니의 한마디에 그 희망마저 무너졌다. 나 완전 다른 사람이 된 걸까.
가장 그럴싸한 탈을 쓰고
뭐, 한때는 누가 봐도 컨설턴트답게 보이길 바랐다. 그러려면 우습게 보이면 안 된다. 그게 어떤 거냐고? 첫째, 너무 어려 보이거나 가벼워 보여선 안 된다. 어두운 톤의 무거운 정장을 입고 연륜 있는 몸짓을 보여줘야 한다. 둘째, 누가 질문했을 때 당황하지 않고 유려하게 대답할 수 있어야 한다. 몰라도 아는 듯, 구렁이 담 넘듯 넘어갈 수 있는 대화 센스가 필요하다. 노력해도 잘 안 되는 부분이긴 했다. 말재주가 없으니 예상 질문을 왕창 뽑아 답을 미리 생각해보는 방식으로 대처했다. 셋째, 보고서를 작성할 때 쓰는 언어가 따로 있다. 평상시에는 절대 쓰지 않는, 한자가 많이 섞인 언어. 한 번은 글쓰기 수업을 갔는데 한글로 쓸 수 있는 걸 굳이 한자로 어렵게 쓰면 안 된다는 말을 들었다. 글쓰기 수업에서 배운 대로 회사에서 보고서를 쓴다면, 구어체를 쓰지 말라고 지적받을게 뻔했다. 글 쓰는 내가 둘로 분열되지 않게 둘 중 하나만 하기로 했다. 일을 관둘 수는 없으니, 수업받길 관뒀다.
컨설팅 일을 한지 몇 년이 지난 후부터는 만나는 사람마다 내게 컨설턴트처럼 보인다고 말한다. 처음 만나는 사람들도 직업을 정확히 맞추진 못해도 교사나 강사라고 추측한다. 컨설턴트라고 얘기해주면 고개를 끄덕이며 나와 잘 어울리는 직업이라고 한다. 어딜 가나 말 잘하고 가르치는 사람처럼 보이는 모양이다. 애쓴 결과였다. 그런데 내 모습에서 이질감을 느낀 이후부터는 노력의 결실이 하나도 기쁘지 않았다. 사람들이 농담을 주고받을 때도 경직되어 있는 나, 편한 만남에서도 빈틈을 보이지 않으려고 긴장하는 나를 마주할 때마다 씁쓸했다. 내겐 이제 모든 만남이 '일'이 되어버린 것 같아서. 어디에서도 쉬지 못하는 것 같아서.
독일의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는 우리 자신의 얼굴이 가장 “그럴싸한 탈”이라고 말했다. 우리는 자신의 진짜 모습을 사람들이 알아볼 수 없도록 탈을 쓰고 산다. 학생 때는 ‘학생답게’ 지내야 했다. 옷은 단정하게 입어야 하고, 학생의 본분인 공부를 항상 잊지 않아야 한다고 배웠다. 물론 못 지켜서 어른들에게 혼나는 게 일상이었지만. 한창 혈기왕성할 때니까 나가서 맘껏 뛰어놀라는 얘긴 들어본 적이 없다. 학생의 본분에 맞지 않으니까. 성인이 되고 나이가 들수록 무엇‘다워야’ 할 게 늘어난다. 어른다워야 하고, 가장다워야 하고, 자식이면서도 한편으로는 부모다워야 하고, 직장인다워야 하고, 팀장다워야 하고, 팀원다워야 하고 등등. 몇 세대를 거쳐 왔을지 모를, 그래서 출처도 모르는 기준들을 받아들이며 우린 서로 비슷해진다. 서로의 모습이 정말 어떤지는 잊은 채로.
‘나를 찾는다’는 말은 틀렸다
내 모습을 찾고 싶다. 근데 인문학 강의를 아무리 들어도 나를 찾는 방법을 모르겠다. 지금 하는 일을 모두 멈추고 혼자 있는 시간을 만들어야 할까. 아니면, 이제까지 살아왔던 걸 기억나는 대로 복기하면서 반성해야 할까.
나는 관계라는 틀 속에서만 내 자신을 관찰할 수 있는데, 그것은 모든 삶이 관계이기 때문이다. 구석에 앉아서 자신에 관해 명상하는 건 쓸데없는 짓이다. 나는 나 혼자 있을 수 없다. 나는 다른 사람들, 사물들, 생각들과의 관계 속에서만 존재하며, 내적 사물과 마찬가지로 외적 사물과 사람들과의 관계를 탐구해야만 나 자신을 이해하기 시작한다. 다른 형태의 이해는 단지 추상에 지나지 않으며, 추상 속에서는 자기를 탐구할 수가 없다. (지두 크리슈나무르티, 『아는 것으로부터의 자유』, 정현종 옮김, 물병자리, 2002, 34쪽)
아이였을 때, 혹은 관계 속 역할에 대한 아무런 부담이 없던 순간에 했던 행동들을 기억해낸다면, 내 진짜 모습을 찾을 수 있을까. 그럴 리 만무하다. 설령 찾았다 할지라도 그때의 나와 지금의 나는 세포 한 개조차 같지 않은, 완전히 다른 사람이다. 과거 속에서 나를 찾는 건 ‘기억’이라는 틀에 나를 맞추는 것뿐이다. 내가 그리는 미래의 모습 역시 나 일리 없다. 아무리 내가 원하는 모습일지라도 또 하나의 정형화된 모습이고, 그것‘다워야’하는 탈을 하나 더 쓰는 것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과거의 기억과 미래의 관념 같은 추상 속에서는 ‘진짜 나’를 만나기 어렵다.
삶은 관계다. 관계를 떠나 나를 찾을 수 없다. 부모와 자식이 기르고 길러지는 관계로, 학생과 스승이 가르치고 배우는 관계로, 남편과 아내로 함께 한 가정을 책임지는 관계로, 회사로 고용하고 고용된 관계로, 팀장과 팀원의 관계로, 적 또는 친구관계로, 자연과 공생하는 관계 등으로 각자가 설 곳이 정해진다. 그러니 나를 찾는 일 역시 관계 속에서 행해져야 한다.
관계 속에서 나를 찾는 건 정형화된 모습을 만드는 게 아니다. 직장에서 팀장과 팀원으로 만나더라도 어떤 사람이 그 역할을 맡았는지에 따라 각양각색의 관계가 나온다. 또 내가 누구를 만났는지에 따라 내 모습도 수시로 바뀐다. 여기선 내성적이었는데 저기선 외향적이고, 나보다 감성적인 사람 앞에선 논리적이다가도 나보다 논리적인 사람 앞에선 감성적이 되기도 한다. 이쯤 되니 ‘나를 찾는다’는 말이 이상하게 들린다. 아니, 그 말은 틀렸다.
내 모습은 성격유형검사를 받아 결론 내리듯 하나로 단정 지을 수 없다. 타고난 기질도 살면서 바뀐다. 인간을 가장 진화된 동물이라 일컫는 이유는 타고난 기질도 관계 속에서 얼마든지 바꿀 수 있기 때문이다. 어른이 돼서도 태어났을 때의 기질을 유지한다면, 지나온 관계 속에서 새롭게 배우고 익힌 일이 전무하다고 고백하는 것과 같다. 어떤 관계에도 영향받지 않는, 변함없는 ‘나’는 어디에도 없다. 그런데도 계속 나를 찾겠다고 고집 피우면, 영원히 스스로를 의심하며 살아가야 한다. ‘이 모습이 진짜 나 맞아?’하면서.
지성으로 나를 만나다
크리슈나무르티가 말하듯 “관계를 탐구해야만 나 자신을 이해”할 수 있다. 관계라는 “거울”을 통해 내 마음, 말, 행동을 비춰보는 것이다. 관계 안의 모든 움직임에 눈을 떼지 않아야 나를 알 수 있다. 여기서의 ‘나’는 어느 구석에 존재한다고 믿는, 고정된 허상이 아니라, 매번 관계 속에서 만나는 ‘나’이다. 관계마다 알게 되는 나에 대한 데이터는 축적되지 않고 다만 바뀔 뿐이다. 굉장히 희망적인 얘기 아닌가. 실제로 나를 만나는데 늦은 때가 없고 복잡한 절차도 없으며, 그동안의 모습들을 기억할 필요도 없다니. 지금 맺고 있는 관계에 당장 주목하기만 하면 된다.
내가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심란했던 진짜 이유는 달라지는 관계를 보지 못하고 ‘컨설턴트 되는 법’이란 매뉴얼이 있는 것 마냥 항상 똑같이 말하고 행동했기 때문이다. 내면과 외면 사이 벌어진 간격만큼 괴로웠다. 그러면서 나를 찾겠다고 인문학 강의를 듣는 데만 매달렸다. 그게 나를 외면하고 또 다른 매뉴얼을 찾아 헤맨 꼴이란 걸 이제야 알았다.
매뉴얼을 버려야 눈앞에 살아있는 관계가 보인다. 여전히 내면과 외면이 일치하지 않겠지만 괴로워할 필요는 없다. 매뉴얼 만들기에 정신 팔렸던 과거와 달리 내가 나를, 관계를 지켜보고 있으니까. 이건 아~~주 큰 차이다. 내 마음이 얼마나 요동치는지,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어떤 행동을 하는지 알면 그걸 바꿀 힘도 생긴다. 내가 어떤 관계 속에 놓여있는지 아는 것, 그리고 관계의 장에서 나를 주시하고 이해하는 것, 나를 바꿀 힘이 내 안에 있다고 믿는 것이 바로 ‘지성’이다. 지성이 없이는 나를 만날 수도 없고, 좋은 관계를 맺을 수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