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그녕 Sep 20. 2021

일하다 길을 잃을 때

심연에 질문 던지기

한참 일하다가 갑자기 모든 상황이 낯설게, 또 어떨 때는 무섭게 느껴질 때가 있다. ‘내가 여기서 뭐 하고 있지’라는 바보스러운 의문이 들기도 하고, ‘나 지금 잘하고 있는 것 맞나’, ‘이렇게 사는 게 맞나’라며 밑도 끝도 없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기도 한다. 이 질문들은 대게 행복하기보다는 불행하거나 허무함을 느낄 때 찾아온다. 문제는 이 불편한 느낌들을 갖게 만든 원인의 정체를 알기 어렵다는 데 있다.


    왜 이런 기분이 드는지, 왜 엉뚱한 질문을 끊임없이 찾아오는지 알다가도 모르겠다. 뭔가를 바쁘게 하고 있던 중에 문득 질문이 찾아왔다면, 그 일이 내게 무슨 의미인지 갑자기 의구심이 들어서였을까. 누군가와 말다툼을 벌이고 난 후에 질문을 던졌다면, 다르게 말하고 행동했었더라면 좋았겠다 싶은 후회 때문이었을까. 이유는 끝내 알 수 없었다. 질문이 떠오르면 이내 머릿속에서 지워냈기 때문이다. 하던 일 계속하는데 방해만 될 뿐이라고 생각했다. 왜 이런 질문을 하는지, 왜 이런 애매하면서도 울적한 기분이 드는지 이유를 당장에 알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지금 하는 일이 어차피 반드시 끝내야 할 일이라면, 이유도 모를 질문 때문에 지체할 시간도, 여유도 없었으니까.


    질문들을 아예 무시하진 않았다. 나름의 노력은 했다. 5년 가까이 다른 사람들과 인문학 공동체를 함께 운영하면서 정기적으로 인문학 강의를 열었다. 강연자마다의 경험에서 길어 올린 통찰을 배우며, 또 강의에 참석한 전국의 다양한 사람들과 서로의 삶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며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답을 구하고 싶었다. 그래서 열심히 활동했고, 강연자들에게 맹렬히 질문했다. 2년쯤 지나서였나. 언제부턴가 강연자에게 질문하지 않게 됐다. 내 안의 질문들을 다른 누군가에게 자꾸 묻고 답을 구하는 자체가 어불성설이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내게 물어야 할 질문들을 왜 애먼 사람들에게 묻고 다닌단 말인가.



욕망에 떠밀려 살다가 길을 잃다


수년간 크게 아팠다. 몇 개월간은 몸져누워있기만 했고, 또 몇 개월간은 죽만 겨우 먹기도 했다. 누가 어디가 아팠냐고 물으면 지금도 대답하기가 참 애매하다. 병은 한 가지로 특정할 수 없는 만성질환의 복합체였고, 몇 년째 병원에 가고 있지만 발병원인은 단 하나도 못 찾았기 때문이다. 꽤 오래 아프고 나서야, 병원에만 매달릴 게 아니라 스스로 병의 원인을 찾아 나서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지금이 그동안 미뤄놨던 질문들과 정면승부를 해야 하는 순간이라고 직감했다. 이젠 더 이상 빠져나갈 수도 없고, 빠져나가서도 안 된다. 그런데 여전히 모르겠다. 어떻게 답을 구해야 하는지.


우리 인생길 반 고비에 올바른 길을 잃고서 난 어두운 숲에 처했었네. (...) 어떻게 숲에 들어섰는지는 확실히 말할 수 없으나, 진정한 길에서 벗어난 그때 잠에 취해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 (단테 알리기에리, 『신곡 : 지옥편』, 박상진 옮김, 민음사, 2018, 7쪽, 1:1~3, 10~12)


    여기 나처럼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몰라 헤매는 또 한 사람이 있다. 중세시대 사람으로 이름은 단테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어두운 숲에 들어서버렸다고 한다. 잠에 취한 탓에 진정한 길에서 벗어났다고. ‘길’이란 단어 앞에 붙은 ‘인생’, ‘올바른’, ‘진정한’이란 표현을 보니, 길이 단순히 두 발로 걷거나 차로 이동하는 공간만을 의미하진 않나 보다.


    중세 이탈리아의 작가, 단테 알리기에리는 『신곡』의 주인공을 자신으로 설정하고, 정치적으로 가장 전성기였던 시절을 길을 잃었을 때라고 표현한다. 최고 공직에 올라 권력에 취해 있던 그때가 삶이 잘못 흘러가는지도 모르고 그냥 정신없이 살았던 때라고 고백하는 셈이다. 그런데 작품 속 단테의 역경은 길을 잃는 데서 그치지 않는다. 그는 어두운 숲을 벗어나기 위해 비탈길을 오르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표범, 사자, 암늑대를 차례로 만난다. 갑작스러운 짐승들의 등장은 또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작가는 자신이 권력에 취해 있을 때 순간순간 이렇게 사는 게 맞는 건지 되묻기도 하고 바른 길로 가려고도 해봤다. 하지만 그때마다 성욕, 권력욕, 탐욕에 떠밀려 어두운 숲에서 벗어날 수 없었음을 세 마리의 짐승들이 두려워 계속 낮은 곳으로 밀려나는 주인공의 모습으로 그려낸 것이다.


*출처 : 김태균, 「[김태균의 다시, 고전!] 단테의 신곡」, 광주드림(gjdream.com)

 

   우리로 치면, 회사에서 실력을 인정받고 승진하면서 승승장구하다가 문득 이렇게 사는 게 맞는 건가 의문이 드는 순간, 다시 돈과 명예, 인정 욕망에 이끌려 의문은 금세 잊어버린 꼴이랄까. 그리고는 이제까지 살아왔던 대로 똑같이 살아가겠지. 작가는 작품의 첫 장면으로 단테가 길을 잃은 모습을 보여줬다. 그럼 앞으로 그가 올바른 길을 찾아가는 여정이 그려지겠구나! 그를 통해 미뤄놨던 내 질문에 답하는 법을 찾을 수 있겠다. 희망이 보인다.



길 잃은 사람들을 보는 것부터


재밌는 건, 주인공인 단테가 길을 잃은 곳이 사후세계라는 점이다. 사나운 짐승들에게 밀려 어두운 숲에 갇혀버릴 뻔했던 순간, 자신에게 숲을 벗어날 길을 알려주고 그곳으로 인도해줄 한 사람을 만났는데, 그는 죽은 영혼이었다. 그의 이름은 베르길리우스로, 로마의 위대한 시인이었다. 그가 단테에게 말했다. “이 숲을 벗어나고 싶다면 너는 다른 길로 가야 한다”(같은 책, 13쪽, 1:92~93)고.


그는 심연으로 빠져 들었고 마침내는 그에게 길 잃은 사람들을 보여 주는 것밖에는 그의 영혼을 구할 다른 길이 없었지요. 이 때문에 나는 죽은 자들을 방문했고, 지금까지 그를 안내한 이에게 눈물로 호소했던 겁니다. (단테 알리기에리, 『신곡 : 연옥편』, 박상진 옮김, 민음사, 2018, 274쪽, 30:136~141)


    베르길리우스가 말한 ‘다른 길’은 어떤 길일까. 그에게 단테가 길을 찾을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부탁한 숨은 조력자의 말에 따르면, 이미 길을 잃어버린 그에게 길을 찾는 방법은 단 하나, 길 잃은 사람들을 보는 방법뿐이다. 자신처럼 길을 잃은 사람들이 계속 그렇게 살다 간 어떻게 되는지 알아야 그 길을 빠져나올 수도 있다는 말이다. 사후세계인 지옥, 연옥, 천국 중 지옥이 단테가 첫 번째로 가야 할 길인 이유도 그 때문이다.


    단테는 베르길리우스의 안내에 따라 지옥을 순례한다. 그리고 성욕, 권력욕, 탐욕에 빠진 자들이 그곳에서 어떤 벌을 받고 있는지 두 눈으로 직접 보게 된다. 성욕에 빠진 자들은 태풍에 휩쓸려 사방으로 휘둘리고 있다. 식탐에 빠진 자들은 구정물이 뒤섞인 세찬 빗물이 고여 악취가 심한 웅덩이에 몸이 잠긴 걸로도 모자라, 머리가 셋인 사나운 개, 케르베로스에게 몸이 조각조각 찢겨나간다. 부를 쌓기만 하거나 반대로 낭비한 자들은 서로 다른 방향으로 무거운 돌을 힘겹게 굴리고 있다. 그러면서 한쪽에서는 왜 쓰기만 하는지 모르겠다고, 다른 한쪽에서는 왜 모으기만 하는지 모르겠다며 소리친다. 그렇게 서로를 적대시하면서 걷다 보면 지형이 고리 모양이다 보니 마주치게 되는데, 그럴 때마다 몸을 돌려 왔던 길로 되돌아간다. 분노에 휩쓸린 자들은 진흙에 뒤덮여 서로 난투를 벌이고 있다. 이곳은 개울물까지도 부글부글 끓고 있다. 단테는 지옥의 끝까지 순례하면서 점점 더 무거운 죄를 지은 자들을 만나고, 그들이 어떤 벌을 받는지 하나하나 지켜보게 된다.


* 출처 : 애플사우루스, 「[애플사우루스] 윌리엄 블레이크의 위대한 작품들...」, 네이버 블로그(naver.com)


    『신곡』의 지옥은 작가가 상상한 허구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현실적이다. 성욕에 빠진 자들은 폭풍에 휩쓸린 것처럼 이성을 잃은 자들이다. 그들은 욕망에 사로잡혀 쉬지 않고 서로를 탐하게 된다. 그 행위가 자신들을 몰락시키는지도 모른 채. 식탐에 빠진 자들은 또 어떤가. 돼지우리처럼 냄새나는 장소에서 몸이 찢기는 고통을 겪고 있다. 부를 탐하기만 하거나 낭비한 자들은 서로의 길을 방해하며 미워한다. 절제하지 못하는 모습이 상대와 닮았다는 생각은 전혀 하지 못한다. 분노한 자들은 뭐, 지옥이라고 뭐가 다르겠는가. 계속 싸우고 있겠지. 모두 지금 살고 있는 세상에서 충분히 볼 수 있는 모습들 아닌가.



발 디딘 현장에서 질문하기


심연은 그런 곳이다. 욕망에 빠져 관계는커녕 자신도 돌아보지 못하게 된 곳. 정처 없이 욕망에만 휩쓸려 살고 있는 상태라고도 할 수 있겠다. 그렇게만 살았을 때 어떤 상황에 빠지게 되는지 제대로 알아야 그 삶을 반복하지 않는다. 그래서 길잡이를 자처한 베르길리우스는 단테가 궁금해하는 것들마다 답해주고, 때로는 죄를 지은 영혼들에게 직접 질문하도록 했다. 또 그가 죄인들의 마음에 동화되려 할 때마다 다시 정신 차리고 이성의 끈을 놓지 않도록 다잡아주었다.


    일하다 길을 잃었다는 생각이 갑자기, 그리고 반복적으로 찾아온다면, 내 심연부터 들여다봐야 한다. 지금 어떤 욕망에 빠져 허우적대고 있는지, 그 욕망으로 벌인 일들이 내게 어떤 이익을 줄 거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는지, 실제로 욕망의 끝에 기다리고 있는 건 뭔지, 내 기대와 어떻게 다른지 알아야 한다. 베르길리우스 같은 길잡이가 없다고 절망할 필요는 없다. 베르길리우스는 스승이기도 하고, 지성을 상징하기도 한다. 바른 길을 찾겠다는 마음을 먼저 내고, 그 마음 안에서 질문을 붙잡고 살아간다면 답까지 안내해 줄 스승은 얼마든지 만날 수 있고, 지성으로 내가 놓인 관계를 살필 수 있다.


    사람들과 함께 인문학 공동체를 운영할 때도 많은 스승을 만났다. 인문학 책도 열심히 읽었다. 하지만 나를 심연으로 안내해 줄 베르길리우스를 만나지 못한 이유는 내가 밖에서만 답을 찾으려고 해서다. 나를 떠나 어딘가에 정답처럼 존재하는 바른 길은 없다. 반드시 내가 발을 딛고 서 있는 현장에서 질문을 던지고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세세히 살펴야, 다음 한 걸음을 어디로 내딛을지 알게 된다. 우리는 그렇게 인생길을 걷는다. 최종 목적지를 정해놓고 가지 않고, 지금 서 있는 자리에서 한 걸음씩. 러면 알게 된다. 내 질문이 변하면, 이전까지 스승이 아니었던 사람들도 순식간에 스승이 될 수 있음을.

이전 03화 '나'를 찾고 싶어!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