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에 중독되는 이유를 파헤치다
나는 일중독자였다. 인정하기까지 참 오래 걸렸다. 친구들이 나를 보며 ‘워커홀릭(workaholic, 일중독)’이라고 할 때마다 온갖 핑계를 대며 그럴 리 없다고 박박 우겼다. 오전 9시 출근, 오후 6시 퇴근을 지키는 건 일의 다양한 형태를 인정하지 않는 기계적 재단일 뿐이라며, 컨설팅은 업무 특성상 시간이 들쭉날쭉할 수밖에 없다며 등등. 하지만 일이 일상의 거의 모든 시간을 잠식하자 나조차도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 특히 친구들의 경조사가 주말인데도 참석하지 못할 때는 이게 잘 사는 건가 싶었다. 일이 많아 점심식사를 거를 때면, 동료들이 지나가며 한 마디씩 던지는데, 다 같은 얘기다. “먹고살자고 하는 짓인데, 먹으면서 일해야지.” 처음엔 농담으로 듣고 넘겼는데, 언제부턴가 그 말이 마음속에서 계속 맴맴 돌았다. 이어 드는 의문, ‘나 정말 뭘 위해 이렇게 일하지?’ 의문을 품은 채 몇 년 더 일에 매달리다가, 결국 몸져누워서야 일을 향한 맹목적인 질주를 멈췄다. 아팠던 당시에는 다시 일할 수 없겠다는 절망감에 빠져 괴로웠지만, 지금은 몸이 그때 브레이크를 걸어준 게 천만다행이라고 생각한다. 몸이 아프지 않았다면? 그 뒤는 상상하기도 싫다.
왜 일에 그토록 매달렸을까. 몸이 아팠을 때 이 질문을 진지하게 던졌어야 했다. 그랬다면 다시 운동에 중독되는 일은 막을 수 있었을 텐데. 회사를 다니지 못할 때 헬스클럽에 ‘출근’했다. 다니던 헬스클럽이 쉬는 날엔 다른 헬스클럽에 일일이용권을 끊고 운동했다. 그렇게 6개월간 하루도 빠짐없이 열심히 운동한 끝에, 고관절을 다쳤다. 무리한 운동이 원인이었다. 처음엔 한 시간만 했던 운동이 두 시간으로, 두 시간에서 다시 세 시간 이상으로 늘어났기 때문이다. 운동을 제대로 해본 건 난생처음인데도 강하게 드는 이 기시감은 뭘까. ‘일’을 ‘운동’으로 바꿨을 뿐, 난 여전히 중독자였다. 일이어서 중독된 게 아니었다. 대상이 문제가 아니라, 내 안에 장착된 중독의 회로가 문제였다. 스스로 멈출 수 없는 모든 것은 ‘중독’이다. ‘운동’, ‘독서’, ‘봉사’ 등 사람들이 아무리 좋고 선한 가치라고 인정하는 것들도, 그것에만 매달리는 순간 가치의 의미는 사라지고 오히려 병을 얻는다. 그래서 다시 묻기로 했다. 왜 자꾸 중독에 빠지냐고.
불안의 씨앗, 자신감 부족
직장을 여러 번 옮겼고, 그때마다 새로운 일이 주어졌다. 다양한 경험을 할 수 있어 즐거웠지만, 한편으로는 불안했다. ‘처음 접하는 일을 잘할 수 있을까’, ‘일을 크게 그르치면 어떡하지’라는 생각들이 나에 대한 믿음이 있어야 할 자리에 두려움만 가득 채웠다. 특히 컨설팅 기업에서 일을 시작할 땐 자신감이 바닥이었다. 동년배들은 이미 한 프로젝트의 실무를 도맡아 날아다니고 있었는데, 난 이제 걸음마를 막 뗀 단계였다. 배우는 속도도 느린 편이니 남들보다 두세 배는 더 노력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일마다 끝내야 할 기한은 일정하니 식사하고 쉬고 잠자는 시간을 줄여 일을 배우는데 공들였다. 상사에게 자문도 열심히 구했다. 그게 스스로 믿지 못하는 내가 결과물의 완성도를 높이는 방법이었다.
운동도 마찬가지다. 계속 아파서 다신 일을 할 수 없을까 봐 불안했다. 불안한 마음을 잠재우기 위해, 또 건강을 빨리 회복하기 위해 운동에 매달렸다. 그러니까 무얼 하건 간에 나를 믿지 못하는 불안과 걱정으로 시작하고, 그 마음은 대상에 의지하고 집착하게 만든다. 그때부터는 대상밖에 보이지 않는다. 내가 왜 일을 하는지, 왜 운동을 시작했는지는 관심 밖이다. 오로지 눈앞에 있는 대상에만 불을 켜고 달려드니 끝은 뻔하다. 성공하면 할수록 대상에게 더 집착할게 뻔하니, 크게 실패하거나 호되게 아파야지만 집착을 잠시라도 멈춘다.
중독은 불안과 세트다. 불안하니 의지할 대상을 찾고, 의지하는 대상이 없어지면 또 불안하다. 불안의 씨앗은 나에 대한 신뢰가 없는 것, 즉 ‘내가 이걸 잘할 수 있을까’, ‘지금 이대로도 괜찮을까’하는 마음이다. 바꿔 말하면 ‘지금의 나로는 부족하다’며 결핍을 생산하는 마음이다. 이 마음을 지니고 있는 한, 부족한 날 완성시켜줄 대상을 끊임없이 찾게 된다. 일을 크게 그르친 뒤 생긴 불안일까 싶어 과거를 더듬어봤지만 딱히 그렇지도 않았다. 물론 일을 그르친 적도 많다. 그런데 막상 그 순간은 어떻게 수습할지만 생각하느라 불안한 마음을 가질 여유도 없다. 그 경험들이 큰 트라우마로 남지도 않았다. 반대로 일을 잘 마무리한 경험도 꽤 있다. 그런데 일을 그르치기 전부터도, 일을 잘하고 난 후에도 내 안에 불안은 계속 일렁이고 있었다. 한마디로 날 의심하지 않았던 적이 없는 것이다.
지금의 나로는 부족하다고 여기는 마음을 많은 사람들이 성장을 위한 ‘동력’, 또는 ‘열정’이라고 포장해서 부른다. 그 마음이 있어야 계속해서 노력하고 발전하니까. 나도 그 마음을 간직해왔고 때로는 부추기기까지 했다. 하지만 이젠 안다. 그 마음은 어김없이 중독을 불러온다는 걸. 어느 정도 성장하면 스스로 멈출 수 있다고 자신하겠지만 불가능하다. 급변하는 사회 속에서 일하는 한, 도처에는 배워야 할 일들 투성이고 내가 부족하다고 깨닫게 될 일만 많아질 테니.
다른 무엇이 되라고 요구하지 않는 것
있는 그대로의 것을 이해하는 데는 노력이 필요 없습니다. 노력한다는 것은 주의력의 산만을 의미합니다. (…) 있는 그대로의 것은 사실이며 진실입니다. 그 이외의 것은 모두가 도피며, 진실이 아닙니다. 있는 그대로의 것을 이해하려면 이 이원(二元)의 대립이 정지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있는 그대로의 것과는 별다른 것으로 되려는 부정적 반응이 그 이해를 거절하기 때문입니다. (지두 크리슈나무르티, 『자기로부터의 혁명1』, 권동수 옮김, 범우사, 2013, 275쪽)
철학자인 지두 크리슈나무르티는 ‘노력하지 말라’고 단호하게 얘기한다. 현대인들에겐 어리둥절한 얘기다. 어렸을 때부터 부모님이나 선생님들에게 귀 따갑게 들어왔던 말이 노력하라는 말 아닌가. 근데 노력하면 오히려 내가 ‘지금’ 겪고 있는 모든 것에 대한 주의력을 잃는다니! 생뚱맞은 얘기 같지만, 꽤 설득력 있다. 우리는 되고 싶은 모습이 있을 때 노력한다. 바꿔 말하면 노력할 때는 지금의 모습과 되고 싶은 모습 간에 거리가 있다는 뜻이다. 그 떨어진 거리가 멀면 멀수록 지금의 ‘나’를 대면하기가 싫어지고 그만큼 불안이 싹튼다. 있는 그대로의 모습, 즉 사실이자 진실을 부정하는데서 오는 불안이다.
일을 문제없이 잘 해내고 싶다는 건 상상이다. 사실을 외면하고 그 상상을 붙잡고 있는 한, 하루하루가 살얼음판이다. 혹여나 문제가 생길까, 다른 사람이 볼 때 실수가 있을까 싶어서다. 이때 다른 사람이 내게 지적이라도 한다면? 절대 쿨~하게 받아들일 수 없다. 앞에서는 아무렇지 않은 척 받아넘길지 몰라도 속으로는 몇 날 며칠을 끙끙 앓을게 뻔하다. 원하는 대로 일을 성공적으로 해냈다고 치자. 새로운 일이 온다면? 내 모습 그대로 난관을 돌파해본 경험이 없기 때문에 다시 상상하기 시작한다. 이제 다시 견디고 버티는 시간이 찾아온다. 끊임없이 나로부터 도피해서 상상을 향해 달려가는 삶 속에서 자신감을 찾기란 불가능하다.
꼭 바라는 무엇이 되거나 다른 사람이 날 인정해야만 자신감이 생기는 게 아니다. 외부조건에 기대어 찾는 자신감은 언제 꺼질지 모르는, 또 꺼질 수밖에 없는 바람 앞에 촛불이다. 자신을 믿는다는 건 '다른 무엇이 되라고 요구하지 않는 것'이다. 지금 그대로도 충분하다고 애써 위로할 필요도 없다. 그냥 자신과 지금 흘러가는 모든 것을 응시할 뿐이다. 상상을 멈춰야 내가 보이고, 내가 처한 상황을 이해할 수 있다.
사실을 알기 위한 능동적 행위, '응시'
나를 응시하고 이해하는 일이 수동적이고 시시한 일이라고 생각한다면 큰 오산이다. 아무것도 안 하고 가만히 앉아있는 게 너무나 어려울 정도로 우리는 바쁘게 움직이는 걸 더 익숙하고 편안히 여긴다. 무얼 하는 것뿐만 아니라 안 하는 것도 매우 힘이 드는 일이다. 어떻게 되어야 한다는 상상을 멈추고, 잘 가고 있는지 의심하지 않으며, 내가 어떤 모습이건 간에 비난하거나 자책하지 않는 행동은 가장 적극적이며, 용기 있고 대담한 행동이다.
과거에 친구들이 내게 일중독이라고, 쉬면서 하라고 아무리 조언해도 그 말이 들리지 않았고, 난 전혀 바뀌지 않았다. 그럴 때는 다른 사람들의 말이 괜한 참견으로 느껴져 기분만 상한다. 만약 순간순간마다 사실을 알려고 주의를 기울이고 있었다면? 몸에 통증이 있을 때 통증이 있는 걸 ‘알고’, 마음이 불편할 때 불편하다는 걸 ‘알았을 것’이다. 알면 원인이 궁금해지고, 관찰하다 보면 원인을 또 알게 된다. 날 아프게 하고 힘들게 하는 원인을 직면하면, 그 원인이 일어나는 힘은 약해진다. 그 행동이 내게 이롭지 않다는 걸 절실히 알아야 멈출 수 있다. 그때는 사람들의 얘기를 참견이 아닌 조언으로 들을 수 있다. 그럼 변한다.
사실을 알고 사실 간에 연결성을 알아야 변할 수 있다. 노력은 노력대로 하면서 마음과 몸이 힘든 이유는 지금 하는 일과 몸과 마음을 이어서 생각하지 못하는데서 비롯된다. 일을 하는데 마음이 힘들면 대부분 일은 일대로 하고 힘든 마음은 외면한다. 참고 이겨내야 한다면서. 사실들을 연결할 줄 모를 때 괴로워지는 건 당연하다. 힘든데도 일을 해야 하는 이유를 자신에게 계속 주입해야 하고 힘든 마음을 억누르기 위해 합리화하는 일명 ‘정신승리’를 해야 하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일도, 마음도 더 힘들어질 뿐이다. 나로부터의 도피를 멈추고 자신을 만나는 만큼 사실들의 연결 고리를 발견하고 전체를 볼 수 있다. 이걸 누군가는 ‘몰입’이라 부르고, 다른 누군가는 ‘명상’이라 이름 붙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