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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녕 Oct 14. 2021

전문가 콤플렉스

전문가가 되지 말자

많은 사람들이 일을 하면서 전문가가 되길 꿈꾼다. 나도 그랬다. 컨설팅을 하면서 어떤 한 분야에서만큼은 ‘이건 네가 맡아주지 않으면 안 되겠어. 네가 제일 전문가잖아’라는 말을 듣고 싶었다. 그래서 신입이었던 때로 다시 돌아간다 해도 내가 들인 노력보다 더 열심히 하긴 어렵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 만큼, 전력을 다해 배우고 일했다. 그렇게 몇 년을 일하면 적어도 한 분야에서는 전문가가 되어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아직도 어떤 분야의 전문가라고 말하기엔 모든 게 애매하다.


    맡은 일을 잘 해낼 자신은 있다. 그런데 전문가라고 남들이 인정하려면 자신감만으로는 안된다. 그 분야의 지식이나 경험을 많이 쌓았다고 증명해야 하는데, 자격증이 있거나 딱히 한 분야를 오래 연구했다고 보여줄 만한 게 없다. 관심사가 한 곳에 모이지 않는 탓도 컸다. 한 분야에서만 프로젝트를 받아 진득하게 하기보다는, 항상 새로운 프로젝트에 눈이 갔다. 그래서 연구를 시작할 때마다 연구 배경이나 취지를 이해하는데 시간을 많이 쏟았다. 일의 효율성을 따진다면 팀에 손해일 수도 있겠지만, 새로운 분야를 연구하는 시간이 즐거웠고 내겐 그게 중요했다.


    항상 관심사가 이리 튀고 저리 튀던 내게 한 분야만 연구하는 건 너무 힘든 일이었다. 그래서 일은 즐겁게 했지만, 한편으로는 전문가가 되지 못했다는 콤플렉스를 달고 살았다. 어떤 연구를 맡아도 잘 해낼 자신이 있는데도, 전문가가 아니라는 생각이 번번이 날 작아지게 만들었다. 그러다 문득 이런 질문이 들었다. ‘왜 전문가가 되어야 하지?’ 왜 난 당연히 전문가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을까. 뜬금없이 궁금해졌다.



전문가가 되려고만 하다 끝나는 인생


전문가가 왜 되고 싶은지, 왜 되어야 하는지 이유가 금방 떠오르지 않아 놀랐다. 일을 시작하면 전문가가 되려고 노력하는 건 너무나 당연한 수순이었다. 십 년 넘게 전문가가 되는 문제로 골머리를 썩였는데 이제 와서 이유를 모르겠다니, 말이 되나! 다시 찬찬히 생각해보자. 이유가 있을 거야, 분명히…….


    ‘이건 네가 맡아주지 않으면 안 되겠어. 네가 제일 전문가잖아’라는 말을 듣고 싶었다고 했으니, 여기에 숨은 욕망을 들여다보자. 결국은 남에게 인정받고 싶어서였나? 일터에서 필요한 존재가 되면 계속 살아남을 수 있으니까? 근데 좀 아리송하다. 어떤 분야에서 일등이 되어본 적만 없다 뿐이지, 나름 일을 믿고 맡길 수 있다는 평은 여러 번 받았다. 실제로 계속 같이 연구하자고 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그럼 된 거 아닌가.


    결국은 실력을 인정받는 기준이 반드시 한 분야에서 일등을 차지하는 거였구나 싶다. 그래야만 내가 날 전문가로 인정할 수 있었다. 와, 욕심이 대단했구나! 일등이 듣기엔 확고하고 절대적인 기준으로 보여도 지극히 상대적인 기준이다. 뭐를 우선시하는지에 따라 다르다. 실력은 더 우위라고 인정받아도 그 분야의 학위가 없으니 난 전문가가 아니라고 생각했고, 학위가 있으면 경험이 저 사람보다 부족하니 난 전문가가 아니라고 단정 지어 버렸다. 항상 나보다 잘난 사람과 비교하면서 스스로를 엄청나게 닦달하기만 했던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전문가가 되려고 한다. 심지어 ‘전문가 시대’라고도 부른다. 한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사람들이 각광받는 시대다. 그런데 요즘은 전문성에 창의성까지 요구한다. 많은 분야에서 나날이 발전해가는 인공지능 로봇이 우리보다 훨씬 전문적으로 일할 날이 멀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제 인간이 기댈 곳은 창의성뿐이다.


    기존에 없었던 것을 만들어내는 힘은 전혀 다른 분야들을 연결하고 종합하면서 생긴다. 그래서 이제부터는 '융합형 인재'가 필요하다고 여기저기서 떠들어댄다. 그렇다고 전문성을 놓으라고 하지도 않는다. 특정 분야를 깊게 알면서도 모든 분야를 넘나들며 새로운 아이디어도 만들어낼 줄 알아야 한다. 아, 내 인생은 전문가가 되려고 노력만 하다 끝나겠구나 싶다.



전문가는 '거꾸로 된 불구자'일뿐


나 이보다 더 고약한 것을 보고 있으며 본 일도 있다. 그 가운데서 많은 것은 너무나도 역겨워 하나하나를 열거해가면서 이야기하고 싶지 않으며, 어떤 것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싶지 않을 정도다. 이를테면 하나를 너무 많이 갖고 있는 대신에 그 밖의 다른 것은 전혀 갖고 있지 않은 자들, 하나의 커다란 눈이거나 하나의 커다란 주둥이거나 하나의 커다란 배 아니면 또 다른 커다란 어떤 것일 뿐, 그 이상이 아닌 자들 말이다. 나 이런 자들을 일컬어 거꾸로 된 불구자라 부르는 바이다. (프리드리히 니체, 「구제에 대하여」,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정동호 옮김, 책세상, 2018, 234쪽)


독일의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는 자신의 대표작,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전문가를 ‘거꾸로 된 불구자’라고 부른다. ‘불구자’는 몸의 어느 한 부분이 온전하지 못한 사람을 뜻한다. 몸이 성한 자들에게 불구자라고 칭하는 것도 이상한데, 거꾸로 됐다는 건 뭔 말인가. '거꾸로 된 불구자'는 몸의 어느 한 부분이 지나치게 발달한 사람이다. 니체는 전문가를 “모든 것에서 너무 적게, 한 가지에서는 너무 많이 갖고 있는”(같은 책, 235쪽) 사람이라고 설명한다. 그래서 ‘거꾸로’다.


    니체는 전문가를 싫어하는 게 분명하다. 한 분야를 깊게 공부하면서 자신이 많이 아는 양 얘기하지만, 실제로는 자신이 일하고 돈을 버는데 필요한 지식이거나 흥미를 느끼는 지식만 쌓아온 사람들이라서 그렇다. 그것도 특정분야에서만 말이다. 한 분야를 누구보다 깊게 알아서 사람들에게 인정받지만, 정작 자신의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는 잘 모른다. 주식 전문가가 되려는 사람이 있다고 해보자. 경제신문, 주식 서적, 주식 관련 유튜브 영상들을 찾아보며, 주식을 잘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온갖 지식을 습득해야 한다. 또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지금 세계적인 트렌드, 또 우리나라의 트렌드는 무엇인지, 어떤 정치상황이 경제에 영향을 미치는지 빠삭하게 알아야 한다. 그래야 주식을 사고팔 타이밍을 알 수 있다. 이것만 해도 하루 24시간이 부족할 판이다. 그런데 새로운 지식은 날로 쏟아지고 트렌드는 계속 바뀐다. 갈수록 공부해야 할 것들은 늘어만 간다. 그런데 이 지식들이 그의 삶과 어떤 연관이 있을까.


    삶이라 하니 좀 막연하다. 이렇게 생각해보자. 우리는 태어나 늙고 병들어 죽는다. 아무도 피할 수 없는 길이다. 이 길 위에서 늘 고통받는다. 나이 드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 있을까. 사람들은 젊어지기 위해, 노화를 막기 위해 엄청나게 애쓴다. 암 같은 불치병이 아닌 만성질환이더라도 예상치 못한 채 덜컥 병에 걸리면 미래가 없다는 느낌을 받는다. 가까운 사람의 죽음은? 가족의 죽음은? 얼마나 고통스러울지 말할 필요도 없다. 이렇게 써놓고 보니 삶은 고통의 연속이다. 태어나서 이 모든 고통을 다 겪으니 탄생까지 고통!


    너무 거창한가. 그럼 이렇게 생각해보자. 어제도 별 일도 아닌 일로 엄마에게 화를 냈다. 너무 후회되지만 주워 담을 수 없는 일이 돼버렸다. 가까운 사람일수록 왜 이렇게 자꾸 성을 내나. 어차피 후회할 거면서. 대학에서 조별 발표가 있는데 같이 하는 사람들이 맡은 일은 안 하고 변명만 늘어놓는다. 나까지 그래 버리면 기말 점수는 형편없을 게 뻔하다. 그렇다고 혼자 하자니 억울하다. 회사에서 맡은 일을 그르쳐서 상사에게 심하게 혼이 났다. 자기 잘못은 없나, 뭐. 당장 내일 출근해서 그를 어떻게 봐야 하나. 10년 넘게 같이 살던 개가 죽었다. 며칠 동안 눈물이 멈추지 않는다. 내가 더 챙겨줬더라면 지금도 내 옆에 살아있었을 텐데, 개가 죽은 게 내 탓인 것만 같아 너무 미안하다. 이렇듯 고통받을 일은 도처에 있다. 생각에 생각을 더해 온갖 최악의 상상을 하고, 감정도 롤러코스터를 탄다. 이렇게 우리 앞에 놓인 삶의 문턱들이 주식보다 더 중요하다.



융합형 인재는 삶을 창조하는 사람


하루에도 몇 번씩 어떻게 살아야 할지 막막한 순간들이 찾아온다. 로봇이 아닌 인간으로 사는 한, 우리는 언젠가 마주할 수밖에 없는 삶의 문턱들을 잘 넘어야 한다. 고통을 안 겪는 게 아니라 잘 겪는 것, 그래서 고통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게 살아가는데 필요한 ‘진짜 능력’이다. 그러려면 삶과 죽음의 원리를 적극적으로 탐구해야 한다.


    주식을 하는 것 자체가 나쁘다? 그건 모르겠다. 대신 내 삶을 적극적으로 탐구해서 고통으로부터 자유로워지겠다는 방향 위에서 주식이든 뭐든 해야 한다. 가령 주식을 할 때 주가가 조금만 내려가도 마음이 철렁하거나 돈을 잃었을 때 세상이 끝날 것처럼 슬프다면, 그러면서도 주식을 못 끊고 계속 돈을 붓고 있다면 그것 자체가 자신의 문턱이고 탐구할 지점이 된다.


    생로병사를 관통하는 원대한 삶의 방향 없이 한 분야에 깊이 몰두하면, 그 분야에서 다른 사람의 인정이나 자신의 앎에 대한 뿌듯함 이외에 뭘 얻을 수 있을까. 아, 전문가인 만큼 많은 일이 들어올 테니 돈을 잘 벌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뿐이면 언제든 허무해지기 십상이다. 전문가가 되어도 계속 새로운 지식이나 기술을 습득해야 한다. 시간이 지날수록 배워야 할 건 점점 많아지는데 내 습득력은 예전보다 못하다고 여기는 순간, ‘언제까지 이 생활을 반복해야 할까’, ‘아직 10년 넘게 더 일해야 하는데 그때까지 계속 전문가 소리를 들을 수 있을까’하는 생각들이 몰려와 날 주저앉힐게 분명하다. 재밌는 사실은 더 이상 배우지 않아도 이 정도면 충분하다고 판단해도, 그때부터 편하게 지내는 게 아니라 다시 정신을 빼앗길 새로운 분야를 찾는다는 것이다. 계속해도 괴롭고, 안 해도 괴롭다. 삶과는 동떨어진 앎만 습득하고 있는 셈이다.



    이 시대는 창의성을 지닌 융합형 인재를 요구한다고 했다. 각 분야별 지식을 새롭게 결합시켜 기존에 전혀 없던 결과물을 만들어내길 바란다. 그럼 각 분야별로 심도 있게 알고 난 후에, 연결하는 능력을 갖춰야 할까. 마치 ‘연결하는 능력’이 또 하나의 분야가 된 듯하다. 이건 어떨까. 삶과 죽음의 원리를 탐구하는 방향 위에서 지금 내가 직면한 삶의 문턱을 넘기 위한 지혜들을 구해보자. 생물학과 인류학을 들여다봐야 할 수도 있고, 기독교의 역사와 근대 철학을 공부해야 할 수도 있다. 자립이 문턱이라면 돈의 흐름을 알기 위해 경제공부도 필요하다. 지금 내 앞에 놓인 문턱을 넘기 위한 공부도 깊이를 지닌다. 전문가처럼 자신의 분야에서 성과를 올리기 위해 필요한 것들만 좇는 깊이가 아니라, 삶의 본질을 마주하는 깊이다. 지금 맞닥뜨린 문턱을 넘어서서 내가 서 있던 곳에서 한 발짝씩 나아간다면, 그 삶 자체가 창의적이자 그 존재만의 고유성을 보여주지 않을까. 융합형 인재는 결국 내 삶을 창조하는 사람이요, 자신의 앎이 삶과 일치하는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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