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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녕 Oct 18. 2021

인생에 정답이 있을까

정답 없이 질문으로 살다

정답 없이 질문으로 살다

고전을 공부하고 있다. 어렵고 두꺼운 고전을 혼자 읽을 엄두가 나지 않아 인문학 공동체에 나가 사람들과 함께 읽는다. 그런데도 어렵다. 분명 한글로 쓰여 있는데 무슨 말인지 당최 모르겠다. 사람들과 주고받는 얘기 속에서 ‘이런 뜻이었을까’하고 짐작만 할 때가 더 많다. 아, 더 이해하고 싶은데 방법이 없을까. 컴퓨터 앞에 앉아 더 알기 쉽게, 더 자세히 강독해주는 강의를 열심히 검색해보다가 일순간 흠칫했다.


    고전을 이해하기 위해 세미나를 하고 있는데, 세미나로도 부족해서 또 다른 강의를 찾고 있는 내 모습이 순간 이상하게 느껴졌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스스로 더 공부해야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고, 지식을 떠먹여 줄 선생님을 자연스럽게 찾아 나서는 내 모습이 이상했다. 고전 공부는 취직을 위해 빨리 따야 하는 자격증 시험이 아니다. 단번에 이해가 안 된다면 내가 소화할 수 있는 만큼만 이해하고 넘어가면 될 일이다. 그런데 왜 자꾸 더 잘 가르쳐줄 수 있는 사람, 핵심만 쏙쏙 알려주는 강의를 찾고 있을까. 다른 사람들보다 더 빨리 이해하고 싶은 마음 때문에? 그런 마음이 없다고는 할 수 없지만, 항상 그래 왔다는 듯이 내게 이해시켜줄 대상을 자연스럽게 찾아 나섰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 방법이 혼자 노력하는 것보다 훨씬 더 효율적이고 낫다고 당연하게 여기고 있었다.


    만약 새로 신청한 강의도 이해가 안 간다면? 또 다른 강의를 찾을까? 부끄럽지만 고백하자면 실제로 그랬다. 강의를 이해하기 위한 강의를 들어도 부족하다는 느낌에 몇 개 더 꼬리물기로 수강했다가, 넘치는 숙제를 감당하지 못해서 결국 모든 강의를 참석하는 데만 의의를 두며 마쳤다. 왜 내가 직접 부딪혀 공부하고 이해하기보다 다른 사람들을 통해 잘 정리된 답안지를 받고 싶어 할까.



인생의 정답? 고정관념일 뿐!


뭘 하든 정답이 있어 보였다. 정답까지 가는 길도 뻔해 보였다. 그 길을 내가 잘 찾아서 직진으로 돌파하느냐, 아니면 길을 찾지 못해 헤매고 다니느냐만 남았다. 그래서 항상 그 길을 먼저 걸어간 사람들, 앞서 성공한 사람들에게 찾아가 길을 물었다. 인생은 결국 정답을 찾아가는 여정 아닌가. 내가 사는데도 다 이유가 있고, 그 이유를 찾아야 한다. 누군가는 소명이라 부르고 또 다른 누구는 달란트라고 부르는 그 이유를.


    일을 할 때도, 사람들과 관계를 맺을 때도 계속 정답을 찾으려 애썼다. 이렇게 하는 게 맞는지, 틀리는지를 끊임없이 자신에게 물었다. 그런데 정답을 몰라 찾아다니는 사람이 뭐가 정답인지는 어떻게 아나. 참 수수께끼다. 시간이 지나 보니 무슨 일을 하든, 누구를 만나든 정답이라 생각한 말과 행동을 똑같이 하려고 노력해온 일들이 사실은 헛수고이고, 오히려 내 신념만 비대하게 키운 꼴밖에 안 된다는 걸 알았다. 정답을 찾는 삶, 뭐가 문제일까.


거꾸로 우리의 관심이 세계관에 담긴 영속적으로 고정된 내용이 무엇인가에 집중되어 있어서, 우리의 모든 지식이 “실재 그 자체” 또는 “어떤 것이 있다”라는 것을 암묵적으로 가정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결과 현재 과학적 전통을 지배하는 진리관의 태도는 인류가 수 세기에 걸쳐 그리고 현재도 당면한 가장 심각한 문제의 근원이 되는 사고 내용과 기능을 따로 떼어놓고 생각하는 방식에 우리를 은연중에 빠뜨려버립니다. 물론 지금 언급하는 것은 세계관에 관한 내용이지만, 이에 견주어 우리가 경각심을 가지고 주의해야 할 점은 절대적이고 최종적인 진리가 있다는 암묵적인 생각에 빠져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데이비드 봄, 『봄의 창의성』, 김정래 옮김, 2021, 박영사, 182~183쪽)


    데이비드 봄은 우주 전체를 포괄하는 질서를 알아내는데 몰두했던 물리학자다. 그는 정답이 있다는 생각을 조심해야 한다고 힘주어 말한다. 조심하지 않으면 외부의 변화에 전혀 영향받지 않는 “어떤 것이 있다”라고 단정해버리고 살게 되기 때문이다. 인생에 정답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정답을 다른 말로 바꾸면 ‘고정관념’이다. 알기 쉽게 조금 과장해서 비유해보자면, 조선시대 사람이 그 당시의 세계관으로 21세기를 사는 것과 같다. 조선시대 때처럼 한복을 단정하게 입고 다녀야 하는데, 요즘 사람들은 나시에 반바지를 입으니 열등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고 쳐보자. 그는 한복을 입지 않은 사람들을 볼 때마다 열등한 사람으로 보고, 열등하게 대하려는 충동을 느낀다. 이렇게 생각한 대로 보고 느끼는 게 사고의 기능이다. ‘한복을 단정하게 입어야 한다’는 사고의 내용대로 사고의 기능이 작동했을 뿐인데, 우리는 보통 보고 느끼는 것만 따로 떼서 진실로 받아들인다. ‘내가 계속 이렇게 똑같이 보고 느끼는 걸 보면, 이건 진실인 게 분명해’하면서 말이다. “사고 내용과 기능을 따로 떼어놓고 생각”해서 범하는 오류다.




정답은 싸움과 고통을 만든다


사고의 내용이 기능에 미치는 영향을 확연하게 구분하기 위해 ‘조선시대 사람’과 ‘한복’을 예시로 들었지만, 사실 우리가 알아차리지도 못하는 고정관념들이 훨씬 더 많다. 성별, 직업, 국가, 인종, 종교에 대한 차별은 모두 진실이 아닌 고정관념에서 비롯된 분열이다. 자신이 탄생하기도 전인, 언제부터 이어져왔는지도 모를 생각에 기대어 사고의 기능이 작동했을 뿐인데, 우리는 사고의 기능만 보고 국가, 인종, 종교를 걸고 전쟁을 하며, 성별, 직업 간에도 크고 작은 싸움을 하고 있다. 이게 다 “자신이 생각한 내용이 사고의 기능과 뗄 수 없는 단일체로서 작용한다는 점을 보지 못하기 때문”(같은 책, 174쪽)이다.


    그래서 인생에 정답이 있다는 생각도 위험하다. 만약 내가 정답을 발견했다고 치자. 여기서 진실은 그 정답이 내가 가진 어떤 생각 때문에 사고의 기능을 반복하면서 굳힌 고정관념이란 것뿐이다. 운이 좋으면 살아가는 한 때에는 유용한 답이 될 수 있겠지만, 삶의 다른 국면을 만나면 그 답은 바로 폐기돼야 한다. 하지만 정답은 ‘잠정적 답’이 아니기에 쉽게 폐기하지 못하니, 이제부터가 큰일이다. 정답에 맞게 행동하지 않는 사람은 적이고, 정답에 맞게 벌어지지 않는 모든 일들은 내게 고통으로 다가온다. 스스로 적을 만들고 고통을 불러낸 격이다.


    지인이 나와 통화하면서 이런 얘기를 한 적이 있다. “내 삶에 정답을 꼭 찾고 말 거야.” 아마도 그가 지금 하고 있는 일에 회의를 품고, 앞으로 하고 싶은 일도 뭔지 막막해서 나온 말일 거라 짐작했다. 나만 이런 생각을 했던 게 아니구나 싶어 잠시 반가웠지만, 그가 진심으로 걱정됐다. “정답을 찾고 난 다음엔 너의 삶이 더 이상 궁금하지 않을 텐데, 그런 삶이 괜찮을까?” 짤막하게 대꾸했지만, 이런 말을 이어서 해주고 싶었다. ‘정답을 알고 나면 싸움과 고통이 찾아올걸. 나도 내가 찾은 답이 정답이라고 믿고 산 세월 동안 크게 아팠거든. 다른 사람들도 많이 아프게 했고. 나중에서야 그게 내가 정답이라 믿고 있던 고정관념을 움켜쥐고 있었기 때문이란 걸 알게 됐지.’



인생은 질문을 만나는 여정


정답을 찾을 때는 이상하게 삶을 보지 않게 된다. 보편적인 답이니 어딜 봐도 마찬가지란 생각 때문이기도 하다. 그래서 답을 알았다 싶으면, 내 삶이 아니라 가장 극단적인 예시를 생각하고 대입해 본다. 그 예시까지 포함하면 정답이겠거니 싶어서. 고전 공부를 할 때도 그랬다. 한동안 답을 알기 위해 강의만 찾아다니고, 내가 고전과 어떻게 만나고 있는지는 신경 쓰지도 않았다. 삶을 보지 않는 게 문제라는 건 알겠다. 그럼에도 정말 인생에 정답이 없는지 계속 의문이 남는다. 붓다나 예수, 공자처럼 진리를 찾아 헤매고 설파한 많은 현자들도 있지 않은가. 또 한편으로는 진리가 없다면 뭘 위해 살아가야 하나 하는 허무감도 든다.


배움의 핵심은 자신의 신체가 움직이는 것이다. 몸이 반응하고 마음이 움직여야 한다. 앎을 열망하고 그 기쁨을 맛보고 또 그만큼의 자유를 누리고. 이런 과정이 생략된다면 아무리 최상의 교육을 받는다 한들 완전 도루묵이다. 진리는 움직인다. 즉 앎과 신체가 교감하는 순간 진리로 구성되는 것이지 내용 자체가 진리를 보장하는 건 결코 아니다. (고미숙, 『바보야, 문제는 돈이 아니라니까』, 2017, 북드라망, 146쪽)


    현자들이 좇았던 진리는 고정관념처럼 죽어있는 개념이 아니다. 그 말인즉슨 특정한 내용을 진리라고 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진리는 살아있다. 그래서 움직인다. 우리가 고전을 배우며 진리와 만난다는 건 그들이 했던 가르침을 단순히 암기하고 삶의 절대적인 기준으로 삼는다는 의미가 아니다. 고전을 만나 내가 가진 고정관념, 낡은 습관을 버리고 새로운 윤리를 만들어가는 과정 속에서 기쁨과 자유를 느낀다는 의미다.



    그래서 인생은 답을 찾기보단 질문을 만나는 여정 같다. 질문을 만나려면 매 순간을 살아야 한다. 자신이 만나는 모든 것에 주의를 기울이면서. 물론 모든 것에는 자기 자신도 포함된다. 그러다 문득 ‘왜’라는 질문이 드는 순간, 어떤 고정관념과 부딪혔는지, 새롭게 배운 지점은 뭔지 잘 살펴야 한다. 그렇게 물어물어 길을 내며 걸어가는 삶 자체가 각자의 소명이고 달란트이지 않을까. 그 삶이 어떤 삶일지는 당사자만 알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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