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그녕 Oct 20. 2021

머리로는 알겠는데 실행이 안돼

행위가 앎의 전부다

삶을 창조하는 사람은 앎이 삶과 일치하는 사람이라고 했다. (이전글 참고) 머리로 아는 것과 몸으로 행하는 것 사이의 간극이 없다는 뜻이다. 그런 삶이 가능할까. 지인이 머리가 너무 많이 빠진다며 고민을 털어놨던 적이 있다. 무슨 수를 써도 머리숱은 계속 줄기만 한다면서, 자신에게는 이게 죽을 만큼의 고통이라고 했다. 그에게 "고민할수록 머리가 뜨거워져 탈모가 더 빨리 진행되니, 너무 신경 쓰지 않았으면 좋겠다"라고 말했다. 그때 지인이 힘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머리로는 잘 알겠는데 몸이 안 따라줘.”


    1년이나 지났을까. 어느 날 거울을 봤는데 앞머리 가르마 부분이 휑하게 느껴졌다. 동그란 두상이 또렷하게 보이다니, 빽빽했던 머리가 듬성듬성해졌다는 증거다. 탈모인가. 덜컥 겁이 났다. 머리숱이 많다고 자부했는데 하루가 다르게 머리카락이 많이 빠진다. 지인에게는 이제 고민은 그만하라며 쿨~하게 얘기했던 내가 며칠 동안 매일 거울을 바라보며 탈모를 걱정하고 있다. 나 역시 머릿속 지식으로만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았을 뿐이다.


    한 시사 프로그램에서 진행을 맡은 아나운서가 했던 말이 생각난다. “제가 이제까지 여러분께 드린 말의 반만이라도 실천했다면, 저는 정말 괜찮은 사람이 되어 있을 텐데요.” 자신이 말한 대로, 또 아는 대로 사는 게 이렇게나 힘들다. 어찌 보면 살아생전에는 앎과 삶을 일치시키기란 불가능하지 않을까.



따로 알고 따로 행하고


그런데 오늘날 사람들은 도리어 앎과 행위를 두 가지로 나누고는 반드시 먼저 안 뒤에 행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자신은 지금처럼 먼저 강습과 토론을 통해 앎의 공부를 하고, 앎이 참되기를 기다리고 나서야 비로소 행하는 공부를 하려고 한다. 그러므로 결국 평생토록 행하지도 못하고 또 알지도 못한다. 이것은 작은 병폐가 아니며, 그 유래도 이미 오래되었다. 내가 지금 ‘앎과 행위가 합일한다’고 말하는 것은 바로 병을 치료하기 위한 약이다. (왕양명, 『실천적 삶을 위한 지침 : 전습록1』, 정인재・한정길 옮김, 청계, 2007, 91쪽)


중국 명나라 유학자인 왕양명의 말이다. 그가 살던 시대가 15세기 말부터 16세기 초까지니, 옛날이나 지금이나 사람들이 사는 모습은 똑같나 보다. 우리는 알아야 행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열심히 지식을 쌓는다. 가짜 뉴스처럼 허위사실이거나 인과가 엉망인 지식들은 가려낼 줄도 알아야 한다. 제대로 알아야 제대로 행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신중히 앎을 얻고 나서야 실천에 옮기려 든다. 알아가다 보면 나의 부족함을 더 알아가기 마련인데, 언제 앎을 완성할 수 있을까. 이러다간 앎만 구하다 삶이 끝나지 싶다. 


    아는 것도 끝이 없지만, 실천은 더 막막하다.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아는 대로 몸이 움직여지지 않는 경험은 다들 숱하게 갖고 있지 않나. 오늘 일을 내일로 미루지 말라고 ‘알고’ 있지만, 오늘‘도’ 미룬다. 지금은 시험기간이라 공부해야 한다고 ‘알고’ 있지만, 자꾸 스마트폰‘만’ 하게 된다. 우리 삶에는 아는 대로 행하는 일보다, 알지만 행하지 못하는 일들이 훨씬 많아 보인다.



    또 어떨 때는 아는 대로 행하지 않는 남을 보며 화가 나기도 한다. 코로나 시국에 마스크 착용은 필수다. 사람들은 자신의 건강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건강도 안전하게 지키기 위해 마스크를 쓴다. 그런데 공공장소에서 마스크를 쓰지 않는 사람들이 종종 보일 때면, 다들 갑갑해도 서로를 위해 마스크를 쓰는데 뭐 저런 이기적인 사람이 다 있나 싶다. 택시를 타려고 줄 서서 한참을 기다리고 있는데, 앞에서 한 명이 뛰어 들어와 택시를 가로채서 타고 가버리기도 한다. 누구는 한 시간 가까이 기다렸는데 양심 없이 새치기를 하다니, 어김없이 속이 부글부글 끓는다. 이때는 참된 앎을 억지로 행하려다 도리어 화를 얻는 걸까.


    그런데 양명은 “앎과 행위가 합일한다”라고 말한다. 그러니까 ‘지행일치(知行一致)’가 아니라 ‘지행합일(知行合一)’이란 말이다. 그 말이 그 말 같겠지만, 두 말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양명은 지행일치가 아닌 지행합일을 주장하면서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걸까. 그리고 지행합일은 어떻게 “병을 치료하기 위한 약”이 될 수 있나.



앎과 행위는 하나다


‘지행일치’라고 하면, 일치시켜야 할 두 개의 대상이 있는 듯이 인식하기 마련이다. 양명은 “앎은 행위의 시작이고, 행위는 앎의 완성”(같은 책, 91쪽)이라고 말한다. 즉 앎이 행이고, 행이 앎이란 소리다. 그래서 지와 행이 서로 달라서 일치시켜야 한다고 바라보는 ‘지행일치’가 아니라, 지와 행은 하나라는 ‘지행합일’을 강조한다.


    양명의 제자인 서애는 지행합일이 언뜻 이해가 가지 않았다. 많은 사람들이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에게는 공손해야 한다는 걸 알고 있지만, 정작 그렇게 하고 있지는 못하지 않나. 이것만 봐도 앎과 행위가 서로 다르다는 걸 보여주지 않냐며, 스승에게 물었다. 나도 묻고 싶었던 말이다.


그것은 이미 사욕에 의해 (앎과 행위가) 가로막힌 것이지, 앎과 행위의 본체는 아니다. 아직까지 알면서도 행하지 않는 사람은 없었다. 알면서도 행하지 않는 것은 다만 아직 알지 못한 것이다. (…) 가령 아무개가 효도를 알고 아무개가 공손함을 안다고 말할 경우도 반드시 그 사람이 이미 효도를 행하고 공손함을 행해야만 비로소 그가 효도를 알고 공손함을 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지, 단지 이 효도와 공손함에 대해 말할 줄 안다고 해서 효도와 공손함을 안다고 말할 수는 없다. (같은 책, 88~89쪽)


    양명은 부모에게 효도하지 않고 형에게 공손하지 않은 태도는 사사로운 욕심에 막힌 앎이고 행위일지언정, 앎과 행위가 다르다는 근거는 못된다고 말한다. 오늘 할 일을 내일로 미뤘다면 오늘 일을 내일로 미루지 말라는 앎이 아니라, 오늘 일을 미뤄도 내일 좀 더 많이 해 놓으면 문제없지 않을까 싶은 앎에 기댄 행위다. 시험기간에도 스마트폰만 하고 있는 건 시험기간이지만 공부해야 한다고 아는 게 아니라, 시험을 망쳐도 큰일이야 있겠나 싶은 앎에서 시작한 행위다.


    남들의 엇나간 행동을 보며 화가 났던 경우도 마찬가지다. 화가 난 이유는 나도 마스크를 벗고 다니고 새치기할 수 있는데도 참고 있다고 생각해서다. 다른 사람들도 멋대로 할 수 있지만 도덕규범을 지키느라 애쓰고 있는데, 왜 저들은 편한 대로만 행동할까 싶어 미웠다. 그런데 양명 말대로라면 과연 내가 참는 걸까. 솔직히 내겐 마스크를 벗고 새치기하는 게 더 힘들다. 바르고 착해서가 아니라 마스크를 벗었을 때 불편한 마음,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 눈에 보이지 않아 어디 있을지 모를 코로나바이러스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또 새치기하려고 남들 눈치를 살피는 것보다 오히려 줄을 서 있는 게 마음이 더 편안해서다. 그러니 화를 낼 이유도 없다.



매 순간 알고 행할 뿐


이제까지의 앎은 사물에 담긴 근본 이치 같은 과학 지식이거나 또는 ‘이래야 한다’는 당위적인 기준들이었다. 이 앎을 다 알아야 잘 행동하고, 잘 살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다 보니 너무 많은 지식을 알아가느라 지치고, 그렇게 쌓은 지식과 다르게 살고 있는 자신을 보며 자괴감이 드니 또 지친다. 양명의 말처럼 “평생토록 행하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한다.” 이 병폐를 ‘지행합일’로 어떻게 치료할 수 있을까.


    지행일치는 감히 넘볼 수 없는 높은 경지처럼 보이지만, 지행합일은 다르다. 앎이 밖에서 구해야 하는 방대한 지식이 아니라, 자신과 눈앞에 벌어지고 있는 일과의 관계 속에서 실시간으로 구성되고 있는 앎이어서 그렇다. 그래서 다 알고 나서 하지 않고, 매번 할 수 있다. 뭘 아는지 모르면 자신의 행위를 관찰하며 스스로 물어보면 된다. 이 때는 얼마나 많은 앎을 아느냐가 중요하지 않고, 지금 스스로가 무슨 앎 위에서 행위하는지 정확히 아는 게 중요하다. 그러니 지행합일은 앎과 행위를 미루기만 하는 병을 치료하는 약도 되지만, ‘몰라서 그랬다’는 변명도 할 수 없게 만든다.



    행위는 꼭 몸으로 움직이는 일에만 국한되진 않는다. 지인의 탈모 고민을 듣고 머리가 뜨거워지면 더 안 좋아지니 너무 스트레스받지 말라고 했을 때 어떻게 대답해야겠다는 생각, 그때 내 앎과 행위는 딱 그만큼이었다. 단순한 생각 이상으로 알고 실천하고 있다고 혼자 착각했을 뿐이다. 앎은 한 번도 행위와, 삶과 별개였던 적이 없다. 그럼 하나의 질문만 남는다. 사사로운 욕심에 가로막히지 않는 앎과 행위, 올바른 앎과 삶은 어떻게 추구해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만.

이전 05화 전문가 콤플렉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