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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yu May 13. 2022

똥 묻은 개

 다들 작당 모의라도 한 걸까. 아침부터 정신이 없다. 사건이 어찌 항상 전화로부터 시작되는지, 연구실에서 차 한 잔 타 오니 전화벨소리가 울렸다. 단짝에게 사과를 못 받은 게 억울해서 어젯밤 태훈이가 엉엉 울었다고 하셨다. 분명 어제 6교시까지 잘 놀았던 걸 봤는데 언제 싸웠을까. 눈치 채지 못했던 게 사뭇 죄송스러워 관찰했던 것들을 장황하게 늘어놓았다. 어제도 분명 잘 놀았으나 현도가 저에게 와서 태훈이의 반복되는 장난 때문에 힘들다 토로했고, 태훈이 손에 상처는 혼자 가위질하다 난 거라며 급히 스스로를 변호했다. 우선 학교에 보내주시면 얘기를 나눠보겠다고 일단락 지었지만 그 둘은 절대 싸울 사이가 아니라 여겼는지 어안이 벙벙했다. 아침 시간, 쉬는 시간, 점심시간까지 다 합쳐 상담을 하니 현도는 쌓인 게 많았지만 하지 말라는 말을 못 했고 태훈이는 현도의 마음을 잘 몰랐던 게 원인이었다. 여전히 마음이 상해 있는 상태라 화해는 그들의 자율에 맡겼다. 마칠 때 보니 둘은 잘 화해한 거 같았다.


 3교시 체육 시간에도 여학생 두 명이 말다툼하다가 늦었다. 문제는 그 둘 싸움을 말린다고 덩달아 여학생 4-5명이 3분 정도 늦었다. 나는 그것도 모르고 학생들 앞에서 우왕좌왕했다. 분명 수업에 늦을 땐 친구를 통해 말을 전하라 일렀건만. 하는 수 없이 5층으로 올라가려는데 여유롭게 내려오는 여학생 무리를 목격했다. 그들의 성향을 고려해 볼 때 싸움을 말리려다 너도나도 한 마디씩 거드는 바람에 늦은 거 같았다. 드넓은 운동장에서 우당탕탕 잔소리 시간을 가졌는데 정작 본인들은 발로 모래 장난을 치며 딴청을 피웠다. 즐거운 체육 시간을 더 이상 망치고 싶지 않아 더 말하지 않고 넘어갔다.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체육을 마치고 올라오니 이번엔 나경이가 잔뜩 울상을 지으며 교탁으로 왔다. 자기는 관찰부 일을 열심히 하고 있는데 남학생 한 명이 아무 일도 안 한다고 딴지를 걸었다며 속상해했다. 하루에 비슷한 문제로 3연타. 짜고 치는 고스톱도 이보단 단조로우리라. 4교시 종이 울리고 국어책을 폈는데 마침 5단원이 속담 단원이었다. 계획에 없던 속담 초성 퀴즈를 냈다. 선생님 속도 모르고 즐거워 방방 뛰는 아이들을 보고 있자니 코웃음만 나왔다.

 "ㄸ ㅁㅇ ㄱㄱ ㄱ ㅁㅇ ㄱ ㄴㅁㄹㄷ"

 기가 막히게 똥을 알아보는 개구쟁이 남학생. 그 힌트를 듣고 여학생 한 명이 정답을 외친다.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일장연설을 늘어놓는다.

 전에도 말했지만, 각자 자기 할 일이나 잘하자. 너희들이 선생님 눈치 보느라 이거 해라 저거 해라 하며 친구 기분 상하게 하지 마라. 선생님은 아무 말 안 하는데 너희들이 왜 그러냐. 우리 모두 똥 묻은 개다. 선생님도 실수하고 사람 다 실수한다. 여기서 완벽한 사람 있냐. 말도 좀 가려해라. 마찬가지로 똑같은 말이지만, 꼭 해야 하는 말인지, 상대가 기분 나빠할지 생각하고 말해라. 이 두 가지만 잘 지켜도 싸울 일 없다.

 말을 하고 나니 묵은 체증이 내려간 듯했다. 표정만큼 단호한 마음으로 잔소리를 쏟아붓는 건 아니다. 말하는 나도 최대한 아끼고 아껴 한 말이지만 내뱉는 순간 사족이 된다.


 폭풍의 오전을 지나 연구실에서 점심 상담을 끝낸 뒤 반으로 돌아가려는데 웬일로 반에서 왁자지껄한 소리가 난다.

 "야 선생님 온다 빨리!"

 하려면 좀 조용히라도 하든지, 딱 봐도 깜짝 파티다. 뭔 날인가 곰곰이 생각하며 가보지만 딱히 떠오르는 날은 없다.

-외부인 출입금지-

 미안하지만 난 외부인은 아닌데. 귀여운 쪽지에 슬쩍 연구실로 돌아가 준다. 앉아 있으니 남학생 한 명이 쪼르르 와서는 이제 다 됐단다.

 교실에 가보니 아이들이 책상을 하트로 배치하고 그 안에서 플래시 터트리며 스승의 은혜 노래를 배경음악으로 틀고 있었다. 6학년만 3년 했지만 이런 건 또 처음이었다. 오전 내내 잔소리를 듣고도 뒤돌아서면 그만인 아이들. 나는 눈치 없이 오늘이 스승의 날이 낀 평일인 거도 몰랐다. 어쩐지, 여학생 한 명이 그제 초콜릿 한 봉지를 주려고 했는데 거절했었다. 웬 초콜릿이지 했더니 스승의 날 선물이었나 보다.


 한창 감동의 도가니에 흠뻑 빠져 동영상을 찍고 있는데 나지막한 목소리로 반장이 말했다.

 "피구 해요."

 박장대소. 수가 뻔히 보이는 개구쟁이들. 못 말린다. 올해는 유독 공부를 싫어해서 보상으로 체육을 많이 시켜줬더니 매일매일 놀잔다. 지나친 승부욕으로 지면 노발대발하면서도 게임이 그렇게 좋나 보다. 그래도 기대를 가지고 등교하는 거 같아서 뿌듯하다. 편지 내용도 대게 '게임 많이 준비해 주셔서 감사합니다'였다.


 얘들아, 똥 묻은 선생님이 너희들 인생에 똥물 튀길까 걱정이다. 선생님의 기우에 너희들이 깎이고 획일화되지는 않았으면 좋으련만. 선생님의 잔소리,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하지만 '들은 자가 모두 따르지는 말지어다'. 선생님도 사랑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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