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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yu Jun 02. 2022

로또 1등

 국어 3단원은 공식적인 말하기 상황에서 적절한 비언어 반언어적 표현을 배운다. 큰 목소리로 또박또박 말하기, 발표 자료 활용하기 등 기초적인 내용이다. 마지막 차시에는 자료를 제작해 직접 발표해 보기도 하는데 주제를 자유롭게 정하라고 되어 있다. 처음에는 재밌겠다 싶었지만 걱정부터 들었던 것도 사실이다. 아쉽지만 대부분의 고학년은 수업 시간에 주어지는 자유를 누리지 못한다. '자유롭게 그려보세요', '자유 주제로 쓰세요', '자유롭게 발표해요'에 얼음이 된다. 다른 학생들 눈치 보느라 바쁘다. 타인의 판단이 중요해지기 때문이다. 어른들도 어학원 말하기 수업에 가면 한국인들끼리 대화할 때가 제일 조심스러운 거처럼, 눈치라는 걸 살필 수 있게 되면 행동에 제약이 걸린다. 정말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는다고 떼를 쓰는 학생도 있다. 완벽하게 해야 한다는 압박 때문이다 그런 학생들 대부분 심혈을 기울여야 해서 시간이 오래 걸린다. 그래서 우리 반은 주제나 소제를 정해주는 편이다. 아니면 주젯거리를 몇 개 던져주거나.


 이번 발표 주제는 '내가 만약 로또 1등에 당첨된다면'이다. 로또 1등에 당첨된다면 무엇에 돈을 쓰고 싶은지 자료를 제작해 발표해야 하는데 당첨금액은 자유다. 사용내역도 물건의 금액도 원하는 대로 대충 적어 발표하라고 얘기한다. 정확성을 요구하기 시작하면 자료 조사에 애를 먹는다.


 사려는 물건은 대게 유사하다. 집, 차, 효도, 기부, 음식, 여행. 6가지를 벗어나지 않는다. 가끔 주식, 코인 등이 나오기도 하지만 여전히 새롭지는 않다. 기상천외한 건 금액이다. 강남 집이 1억 하는 꿈만 같은 일도 있고 하와이 3달 살기에 3백 언저리가 드는 자린고비 계획도 있다. 예상 소비 가격을 보고 있으면 '주식, 코인, 떡상, 인생 한방'을 고래고래 소리 지르면서도, 정작 물가도 잘 모르는 순수한 아이들이라 귀엽다. 번호 순서대로 발표하고 있는데 범상치 않은 제목의 파워 포인트가 눈에 띄었다. 외향적이고 장난기도 많은 남학생이다. 사고자 하는 것도 예사롭지 않았다.

                                                                                                                                                                                        

 님이 그 강을 건너는 게 로또 당첨과 무슨 상관인지는 모르겠지만 표현 자체가 기상천외하여 웃음이 터져 나왔다. 심지어 '건너지 마오'를 예상했으나 21년 유행어 '오히려 좋아'를 접목시켜, 자칫 지루해질 수 있는 오마주에 훌륭한 변주를 주었다. 바다 95평 낚시하기 또한 개성이 가득했는데 바다를 95평 소유한다는 생각 자체도 너무 아기자기했다. 가지려면 천 평 만 평 가질 수 있을 텐데 95평이면 충분하다고 느낀 걸까. 욕심이 가득 찬 발표 같지만 사실 욕심보단 만족과 꿈이 가득한 내용이다. 아직 저학년 티를 못 벗어 그렇다. 그래도 사춘기가 오고 어른이 됐을 때, 오늘의 재치와 활발함은 간직한 채로 자라길 바란다.


 난 우리 반 학생들이 그렇게 자랐으면 좋겠다. 세상의 쓴맛에 실망하고 이상한 방어 기제를 기르기보단 용감하게 맞서 싸운 뒤 툭툭 털고 일어서는 사람이 되길 기도한다. 특별하거나 평범한 거에 목숨 걸지 말고, 다른 사람이 되는 건 더 하지 말고, 자기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여유로 타인을 사랑하는 사람이 됐으면 좋겠다. 깊은 곳에서 마음이 하는 소리를 들을 줄 알았으면, 참으로 자신이 원하는 것과 무엇을 하면 행복한지도 발견할 수 있으면 넉넉하게 살 수 있지 않을까. 그러던 어느 날 문득 정신을 차리고 보니 세상이 너무 아름다워 보여서 사랑을 나누기 시작하는 따뜻함이 있으면 좋겠다. 그 사랑이란 게 거창할 필요는 없다. 그냥, 더운 날 밖에서 일하는 친구에게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선물할 수 있고, 지하철에서 무거운 짐을 진 사람을 도와줄 수 있는 거면 충분할 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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