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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yu Jun 03. 2022

풍선 펜싱

 반 분위기가 매년 바뀌어 같은 게임을 해도 그 풍경이 다 다르다. 확실히 작년 애들이 게임을 즐겁게 잘했다. 학기 초부터 많이 강조한 탓도 있다. 공부 안 하고 게임했다는 사실 자체가 중요하지 이겨서 밥 빨리 먹는 게 뭐 그렇게 대수냐는 내 말을 곧잘 받아들였다(점수가 높은 순으로 급식을 먹는 게 상품인데 일등과 꼴찌 배식 시간 차이가 3분도 채 안 걸린다). 우린 주파수가 잘 맞았다.


 올해는 게임을 스스로 재미없게 만드는 재능들이 뛰어나다. 점수 1점만 잃어도 '우리 또 꼴찌야. 어차피 꼴찌 할 거 대충 하자' 하며 열심히 했을 때 자존심이 입을 상처를 미리 보호한다. 본인이 흥미를 잃어 참여하지 않는 건 좋으나 그걸 꼭 다른 사람 귀에 들어가게 해 사기를 떨어뜨린다. 괜히 나도 그 학생이 밉다. 기운을 북돋아줘도 소용이 없다. 이미 짙게 깔린 방어기제는 그 불만을 해소할 묘책이다. 그래도 연만이 생겨 그 모둠이 유리하도록 슬쩍 게임을 진행해도 한번 꺾인 사기는 좀처럼 회복하기 힘들다.


 차라리 '급식 빨리 먹기'를 걸지 않고 하는 게임에 조금 더 적극적인 모습이긴 하다. 오늘은 점심 식사 후 5교시에 풍선 펜싱을 했는데 아무도 싸우지 않고 즐겁게 참여했다. 단순히 승부에 이기기 위해 풍선을 공중에 띄우는 학생들의 얼굴에 웃음이 번진다. 그래, 내가 보고 싶었던 건 이런 거다. 산송장 같은 표정으로 눈만 뻐끔뻐끔 끔뻑대며 책상에 앉아 생기를 잃은 거보다 훨씬 낫다. 공부는 원래 알아서 하는 거다. 내가 안 가르쳐도 본인이 필요하다 느낄 때 하게 돼 있다. 내가 가르쳐야 하는 건 공부 보다도 해야 하는 일을 하는 인내, 하고 싶은 걸 참는 절제, 남과의 상생이다.


 "선생님, 얘 풍선이 너무 커서 저랑 떨어지는 속도부터 차이가 많이 나요."

 볼멘소리를 하며 여학생이 나를 부른다.

 사실 아이들의 불만은 내 실수 때문이다. 전날 문구점에서 풍선을 산다는 게 그만 작은 물풍선을 사버린 것이다. 살 땐 낱개로 돌돌 말려있어서 의심 없이 큰 풍선이라 여겼다. 작년에도 똑같은 자리에 큰 풍선이 있었으니 확인할 생각도 안 했다. 준비된 풍선이 물풍선이라 미안했다. 깊은 속내까지 말하진 않았지만 '풍선이 더 컸더라면' 하고 자책했다. 그래도 딴에는 열심히 하겠다고 손가락으로 통통 튀기는 모습이 기특하고 고맙다.


 같은 피구지만 공 하나만 바꿔도 게임이 달라지기 마련이다. 짐볼 피구는 던지기도 힘들고 피하기도 힘들어 실력의 영향을 적게 받는다. 한낱 게임도 그런데 구성원 전원이 바뀌는 새 학기는 오죽할까. 같은 학교에서 6학년을 3년 내리 하다 보니 계속 비교가 된다. 능력이 부족한 탓이다. 올해는 장점보단 단점이 먼저 보여 애를 먹고 있는데 풍선 펜싱을 하는 아이들을 보며 '아, 내가 문제였구나' 싶었다.


 자세히 보면 각자의 매력이 다 다른 개성 있는 애들이다. 주장도 강한 게 사회에 나가면 제일 환불 잘 받을 거 같은 애들이다. 아, 그래서 자기 생각을 말하는 활동에 소질이 있다. 미술도 잘한다. 체육 엄청 좋아하고 잘한다. 눈치가 빠르다. 밥 잘 먹는다. 이만하면 훌륭하다. 나의 시선과 기준을 새롭게 바꿀 때지 애들을 바꿀 필요는 없다. 개성을 타성으로 사포질 하고 싶지는 않다. 그냥 뾰족하고 거친 게 잘 어울리는 아이들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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