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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yu Dec 23. 2022

부산에 가루눈이 내리면

 몇 년 만에 추운 겨울이다. 작년 재작년 겨울엔 염치없을 정도로 따뜻했는데 올해는 제법 겨울답다. 소복하게 쌓이는 눈은 기대할 틈도 없이 새어 들어오는 바람에 온몸이 시리다. 새벽에 일어나 말씀을 읽고 기도하는 게 성가셔지는 건 차가운 바닥만큼이나 쌀쌀맞은 태양 탓이 크다. 7시는 돼야 희붐해지는 창밖의 풍경을 곁눈질로 보고 있자니 잠이 쏟아진다. 추위에 얼어붙은 몸 때문에 늦장을 부리다 보면 자연스레 출근길이 늦어진다. 8시 즈음에 도착하던 게 8시 20분이 되면 여유롭던 아침 준비가 산만해지기 마련이다.

 목, 금의 경우 1교시가 전담 수업이라 뽈뽈거리며 다니지 않아도 돼서 다행스럽다. 언제나처럼 스테인리스 물병 2통과 전기 포트에 정수기 물을 받고 차 내릴 물을 끓였다. 밤새 서류가 오진 않았는지, 오늘 할 일은 뭔지, 수업 준비에 모자람은 없는지 살피다 보니 어느새 8시 50분이 됐고 아이들을 보내기 위해 줄을 세웠다. 텅 빈 교실에 앉아 차를 연신 홀짝이다 생활기록부 작업을 마무리했다. 오탈자는 없는지 확인하고 두 번 들어가거나 겹치는 내용은 없는지 살피다 보면 눈이 빠질듯 아프다. 깨알같이 적힌 행동특성 및 종합의견을 들여다보고 있으니 한 해가 정리되는 듯한 기분에 뿌듯하기도 하다.

  정도 작업을 마치고 나니 종이 치고 학생들이 우르르 몰려왔다. 4교시가 전담이라 그때 끝마치기로 하고 수업을 이어 나갔다. 학기말이라 나도 아이들도 마음이 들떠 수업이  매끄럽지 못하다. 준비한 체온계와 맥박계가  작동하지 않아 당황했지만 군말 없이 게임에 최선을 다하는 아이들 덕분에 과학수업도  마무리했다. 학기 초엔  놔라  놔라 이것도 불만 저것도 불만이었던 아이들이었는데... 전연 다를 것이 없는 모습이라 보람도 없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놓고 보면  뼘쯤은 자라서 대견하다.

 국어, 과학을 마치고 체육 수업에 보내고 다시 찾아온 적막이 반가웠다. 허기가 져서 그런지 생활기록부도 눈에 들어오지 않고 시계만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그때 복도  반에서 합창부원  명이 소리치는  우리 교실까지 들렸다.

 "눈 내린다!"

 나는 그 학생 어마무시한 고성에 고개를 절레절레 돌리곤 슬쩍 창밖을 눈은커녕  코빼기도 보이지 않아 심기가 불편했다. 귀여운 장난은  반에서  처리되리라 하고 넘어가려는 찰나에 이번엔 우당탕탕 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물이  열리더니,

 "선생님, 눈 오는데 밖에 나가도 돼요?"

 이게 무슨 말인가 싶어서 어리둥절하고 있으니 애들이 부연설명을 덧붙였다. 지금 밖에 눈이 내리고 있고  같이 나가서  놀고 싶다는 말이었다. 눈은 차치하더라도  걱정이 앞섰던 나는 밥은 먹고 나가라고 일축했다. 아이들이  앞을 떠날 생각은 하지 않고 연신 끙끙 앓길래 다시금 창밖을 보니 가루눈이 내리고 있었다.

 나도 아이들만큼이나 커버린 걸까. 눈을 보며 설레기보단 배 골을 게 걱정이었던 걸 보면 영락없이 한국인, 그것도 지루하기만 한 어른이다. 나는 혀를 끌 한번 차고는 나갔다 온나 하고 말하곤 달려가는 학생들을 보며 뛰지 마! 위험해! 하고 소리치려다 말았다. 그렇게 황망하게 30명의 아이들을 보내고 나니 문득 땅이 얼어서 위험하지는 않을지, 길이 미끄럽던데 혹시나 다치진 않을지 염려스러웠다. 아차 싶어서 주의를 주러 나갈까 말까 하다 밖이 너무 추워서 창문 밖으로 고개만 빼꼼 내밀고 조심해서 놀라고 소리쳤다.

 뭐라고 하든  관심도 없고 그냥 내가 얼굴을 내밀었다는  마냥 즐거운 아이들은 '선생님'을 외치며 손을 흔들어댔다. 눈이랄 꺼도 는 가루눈을 휴대폰에 담는 천진난만한 모습이 흥겨워보였다. 곧장 나가서 함께 시간을 보낼까 싶기도 했지만 체육 선생님이 계시기도 했고 밥이나 준비해야겠다 싶어 교실에 남아 있었다.

 종이 치자 우다다다다 올라온 아이들은 밥을 빨리 먹고 다시 나가기 위해 허겁지겁 밥을 마셨다. 그 분위기에 휩쓸려 덩달아 밥이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 모르고 우걱우걱 쑤셔 넣었다. 웬만해선 밥 먹는 속도로 안 지는 내가 발을 동동 구르고 있는 아이들에게 말하길,

 "선생님이 뒷정리할 테니까 먼저 나가."

 살짝 보깬 배를 붙잡고 뒤뚱뒤뚱 걸어 나가니 운동장엔 이미 진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학년 구분 없이, 그렇게 철저하게 지키던 남녀칠세부동석, 그 철학도 소용없이 모두 손을 붙잡고 강강술래를 뛰고 있었다. 그 모습에서 양분화 문제의 해답을 어렴풋이 찾을 수 있었다. 부산에 가락눈이라도 내리는 날이면 남자냐 여자냐 애냐 어른이냐 관계없이 모두 손에 손 잡고 대통합을 이루고 있으니 가락눈이 정답이다. 우리끼리 싸울 게 아니라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대외적인 축제가 필요한 시점이다. 함박눈이라도 내리는 날이면 진실로 부산은 색이나 성별이나 연령에 무심경하게 될 것이다.

 이렇듯 부산에 가락눈이 내리는 날이면 기분 좋은 헛소리가 늘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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