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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yu Feb 10. 2023

나는 너를 이렇게 기억한다

 너의 작년 담임이었던 영어 선생님이 내게 와 힘들지 않았냐고 속삭였다. 나를 공감해 줄 수 있는 유일한 선생님, 그녀에게 솔직한 마음을 토로하며 함박웃음을 지었다. 그걸 본 네가 졸업식 연습을 하며 말했다.

 "선생님, 앞으로도 계속 그렇게 웃어주시면 안 돼요?"

 당황스러운 너의 한마디가 옳다. 웃는 얼굴로 내게 아양을 떠는 너의 부탁에서 푹 익힌 냄새가 났다. 나는 정곡을 찔린 마음이 열없어 고의로 네 말을 듣지 못한 척하며 '어?' 하고 되물었다. 너는 정당한 요구를 주머니에 꼬깃꼬깃 도로 넣곤 시선을 돌렸다. 네 앞에서 가득 웃는 표정이나 상냥한 말씨가 유독 힘든 이유가 무엇이길래 흔해야 할 공기가 이리도 귀한 금덩이가 됐을까.

 선생님 사용 설명서를 쓰는 시간에도 네가 재잘거린다.

 "작년에는 선생님 화 한 번도 안 내셨대!"

 오빠나 형, 누나나 언니가 있는 너는 귀동냥으로 들었을 말들을 목적 없이 내뱉었다. 종이에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게 '깜짝 파티', '잘생겼다는 칭찬'이라고 적었다. 내가 싫어하는 것에는 '폭력', '욕'이라는 말이 적혔고, 후배들에게 하고 싶은 말로는 '우리 선생님 화나게 하지 마'가 기세등등했다.


 가감 없이 너를 묘사하겠다. 너는 짜증이 많기도 침착하기도 하다. 너는 때론 똑똑하고 어느 땐 어리석다. 너는 장난치는 것과 장난의 대상이 되는 것까지 사랑한다. 너는 몇 개월 보지도 못한 체육 선생님이나 5학년 담임 선생님을 떠나보내며 울었다. 지극히 인간스러웠다

 나는 너를 사랑한다. 내 최선이 바닥에 뒹굴어 짓밟혀도 나는 결코 내 의무를 저버리지 않았다. 1년 내내 나눗셈만 풀어도, 장난이 심해도, 질투심에 친구를 따돌려도 너를 이해했다. 그 과정에서 격렬했던 나의 학창 시절을 자꾸 꺼내 보았다. 해묵은 일들을 헤집으면서까지 나는 어떤 학년도보다 너희를 이해하려고 애썼음을 자부한다. 그 과정이 즐겁지는 않았다. 힘을 쫙 뺐던 해와 비교하면 잔뜩 긴장한 올해가 힘들 수밖에. 너도 그걸 느꼈나 보다. 잔소리는 어딘가 흘러가도 내 기분이 좋은지 나쁜지만은 동물적 감각으로 알아채 반응했으니.

 너희도 나를 사랑한다. 깜짝 파티를 준비한 수고는 순전히 너희들의 취향이라고 여겼는데 기실 내가 파티나 칭찬을 좋아한다는 오해 때문이었다. 다 아는 수학 공식이지만 수업을 들어줬다. 나를 대신해 조용히 하라며 소리치는 너를 마주할 때는 자리를 박차고 나가고 싶었다. 배웠으면 하는 역량에 눈치는 없었는데 말이지. 행여나 내 감정에 책임감을 느낄까 봐 지레 겁이 나기도 했다.

 너희는 자유롭고 주체적이다. 우리가 삐걱거렸던 이유, 내가 간헐적으로 화를 냈던 이유, 우리가 서로 애정했던 것도 다 그 때문이다. 30명이 섞여 있는 공간에서 너는 규칙을 따르지 않고 멋대로 행동하는 럭비볼, 어디로 튈지 몰라 항상 긴장되는 대상이었다. 럭비볼 정도로 설명할 수 없으려나.

 너는 모양이 제각각이다. 너는 앙증맞은 테니스공, 너는 바람에 취약한 셔틀콕, 무겁고 딱딱한 야구공, 차는 대로 뻗어 나가는 축구공까지. 그래서 너희가 자랑스럽다.


 잘 가라. 1년 간의 미안함과 고마움을 꾹꾹 눌러 담아 전한 내 편지는 읽고 버리도록. 나는 그곳에 적힌 대로 너를 기억할 것이다. 너는 그만큼 멋졌고 사랑스러웠다.

 오늘 아침은 안개가 짙다. 데워지는 땅과 차가운 새벽 공기가 만나 자연스럽게 생긴 자연현상이 산세와 어우러져 장관을 이뤘다. 봄이 오고 있다. 설레기도 하고 두렵기도 하고 무감각할 수도 있지. 너만의 방법으로 봄을 맞이하는 것뿐이니 새로운 자리가 어색해도 된다. 종국에는 등굣길에서 네가 올 때마다 빼꼼 내다보는 강아지나 간지러운 꽃봉오리를 있다고 하게 될 것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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