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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yu Mar 03. 2023

일상 소회

 여전히 아침은 쌀쌀했다. 강아지 아침 산책 길에서 롱패딩을 여민다. 강아지는 민둥하게 자른 털옷에 춥지도 않은지 발랄하다. 출근이 늦을까 강아지를 재촉하며 저벅저벅 걷는 중에 매화를 마주했다. 봄같이 피는 꽃 중에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매화. 곰곰이 보면 매실은 가을에서야 빛을 발하는데 뭐가 조급했기에 이리도 서둘러 폈을까.

 꽃이라는 게 탄생의 시작은 아닐 테지. 씨앗이 있고 꽃이 있고 열매가 있을 테지. 그러나 그 모든 순환 중에 꽃이 꼭 처음일 것만 같다. 씨앗은 발라 먹을 수 있고 열매야 두말하면 입 아픈데 꽃, 그건 맛도 없는 주제에 이목은 홀로 차지한다. 그 앙증맞은 여우짓이 밉지 않다.

 보암직한 꽃을 동경했으나 아무래도  길이 아닌가 보다. 삶을 대하는 태도도 식목의 탄생처럼 동글동글 순환하는 것이라면 한동안 꽃이었으니 이제는 열매가  차례다. 제자리에서 야발지게 기다리지만 기실 인정에 목마른, 허구의 구원에 갈급한 꽃이 아니라 차라리 배고픈 누군가의 포만감을 채우는 열매이고자 한다. 간단하게 말하자면 이건 진실로 꽃 같은 인생과의 작별 인사다.


 주짓수 시합에 나가게 되면서 체급을 낮추게 됐다. -76Kg이 흔하디 흔한 체중이라는 것도 모른 채 동준이의 꾐에 넘어갔다. 덕분에 다이어트라는 것을 좀 빡시게 했는데 뭘 잘 모르기도 하거니와 다들 고구마를 먹는 거 같길래 무턱대로 고구마 한 박스를 샀다.

 기억 속의 고구마라 함은 신김치를 올려 먹지 않고서야 목이 맥히는(고구마는 막히는 게 아니라 맥혀야만 한다), 그 온전한 단맛을 즐기기엔 다소 난해한 뿌리 열매다. 나는 호기롭게 산 고구마를 압력 밥솥에 잔뜩 찌고 식탁에 올려 뒀다 저녁에 하나씩 챙겨 먹었다.

 손에 쥐기도 어렵게 뜨거울 땐 껍질이 술렁술렁 잘 까지더니 식고 나선 까는 게 일이다. 한참을 고군분투하다 한입 베어 물었다. 달달하고 찐득한 게 치아에, 입천장에 여기고 저기고 할 것 없이 달라붙었다. 목이 콱콱 맥히는 고구마를 먹다 콜록콜록 기침을 하기도 한 오늘, 문득 내가 고구마를 참 좋아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물이나 우유를 곁들일 수 있었는데 그러지 않았다. 식감이 참 마음에 들었다. 여기저기 엉겨 붙은, 결대로 찢어지는 고구마를 씹고 있자니 생의 감각이 활기를 띠었다.

 '아, 나는 살고 싶구나. 이렇게 먹기 번거로운 고구마를 먹으면서까지 나는 사실 살고 싶은 거였구나.'

 죽겠다고 결심한 적은 없었어도 기꺼이 오는 죽음을 거부하진 않겠다 했는데  상념과 다르게 나는 치열한 저작운동을 통해 삶에 대한 집요한 애착을 보이고 있었다. 나는 고구마를 꾸역꾸역  먹고 집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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