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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yu May 31. 2023

삶을 더 풍부하게 하는 것

 쉬고 싶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산다. 충분히 쉬고 있는 이때도 그렇다. 담임이 아니고 보니 학교 생활이 여유로워 무릎 꿇고 엎드려 황송할 정도다. 굳이 칼퇴를 결심하지 않아도 당연하게 할 수 있는 게 칼퇴다. 남은 일을 뒤로하고 자리를 뜰 필요가 없다. 학교 폭력 걱정, 학부모 상담, 생활 지도, 끊임없는 고자질, 미주알고주알 알고 싶지 않은 가정 내 사적인 불화. 모두, 안녕.

 한 가지 불만이 있다면 글 쓸 소재가 현저히 줄었다는 점이다. 배부른 고민이긴 하나 흥미나 재미가 떨어진 것도 사실이다. 아침시간부터 6교시까지 번갯불에 콩 볶듯 지나가는 하루가 그립기도 하다. 경황없는 하루 속에는 분노가 치밀 때, 깜짝 놀랄 때, 스트레스받을 때, 웃길 때, 만족스러울 때, 불만족스러울 때가 한데 섞여 있었다. 그땐 전담 시간 하나하나 소중했고 하루가 알이 꽉 찬 간장 게장처럼 깊은 풍미를 풍겼다. 갈등이, 토마토에 소금 한 꼬집을 넣어 달콤함을 살리듯, Salted Caramel이나 부러 소금을 넣는 아이스크림처럼 삶을 더 풍부하게 만들었다. 소설도 갈등 없이는 진행되지 않는데 나는 왜 내 삶에서 갈등이 사라지길 바랐을까. 더욱이 내적 외적 갈등이 없는 현재 내 직장 생활은 짐짐할 따름이다.

 호젓한 스승의 날도 낯설었다. 1-6학년 학생들을 모두 가르치다 보니 한 개인의 이름을 불러주지 못했다. 축구부 학생, 편집부 학생을 제외하곤 학생 이름도 모르면서 곧잘 받던, 처치 곤란이던 편지 한 장 받기를 기대했었다. 감정의 세계는 냉정했다. 내가 준 만큼 받게 돼 있다는 걸, 혹은 기대를 하지 않아야 실망도 없다는 걸 모르는 바가 아니었는데 날 반겨주던 목소리 때문이었는지 한 두 장은 받을 거라 생각했나 보다.

 15일 월요일은 다소 쓸쓸함을 남기고 끝이 났고 나는 부리나케 퇴근길에 올랐다. 다음 날 일찍 출근한 나를 잡아 세우며 야간 주사님이 말을 걸었다. 난 좀 조용히, 특히 직장 동료들과는 스몰 토크도 하지 않았음 싶은데 야간 주사님은 내가 반가운지 매일 아침 내게 말을 거셨다. 그날도 어김없이 별 내용이 없겠거니 했는데 돌연 솔빈이를 아냐고 물으셨다. 솔빈이가 친구 한 명과 어제 다녀 갔는데 퇴근 시간 후에 와서 돌아갔다는 것이었다.

 솔빈이는 재작년, 진흙탕 같은 반에서 우아하게  연꽃 같은 학생이었다. 학생들이 가장 예민하게 반응하는 행동이 '불공평'인데 사랑의 화살도 '불공평' 프레임을 쓰게 되면 곤란해지기 십상이라 솔빈이만 편애하진 않았다. 짐짓 가장 좋아하는 학생이었지만 짝사랑하는 것처럼  마음을 우리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게 전전긍긍했다. 오죽했으면 졸업식  학생들에게 편지  장씩  주는  관례라면 관례인데 솔빈이를 제외하곤 써주지 말까 싶었다. 그만큼 난장판인 해였다.

 편지를 받으며 울먹이던 솔빈이는,

 "선생님, 꼭 다시 올게요!"

 하던 다짐을 지켰었다. 커피 한 잔을 사서 돌려보내면서 내년에도 본교에 있냐고 묻길래 없다고 했더니 시무룩해졌던 뒷모습이 잊히지 않는다. 그래서 학교를 옮긴 뒤에도 찾아올 거라곤 예상하지 못했다. 스승 찾기 서비스에 동의하지 않았고 내 번호도 알려준 적 없었다. 아무래도 편애의 연장선인 거 같았고 나도 어느새 '불공평'에 목숨을 거는 어린애가 돼 있었다.

 나는 부랴부랴 재작년 자료를 훑었지만 솔빈의 번호는 찾을 수가 없었고 츱츱한  알지만 솔빈이가 다니는 학교에 전화를 걸었다. 그렇게 연결이  솔빈에게 나는 고맙다는 말과 휴대전화 번호를 알려주며 '다음엔 오기 전에  기별을 주라' 일렀다. 그러곤 수업 준비 종소리를 듣고 6학년 교실 올랐다. 6학년 복도는 예와 다르게 떠들썩했는데 인파 속에서 각 반 반장이 쭈뼛쭈뼛 나오더니 대뜸 시상식이 진행됐다. 각종 상장, 잘생겼상, 스승의  등을 전달받으며 섭섭해했던  미안해  쑥스러웠다.

 그러나  감정은 내적 갈등 없이 가당키나  행복일까. 진흙탕  연꽃도 결국엔 외적 갈등 속에 발견한 하나의 안식처였고. 인정하기 싫지만 우리 반이 그리운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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